황금영(黃金榮)은 자는 금용(錦鏞)이며, 절강 여요 사람이다. 1868년, 상해 청방(靑幇)의 우두머리중 하나이다. 일찌기 상해의 프랑스조계의 순포방에서 독찰장을 지냈다. 나중에 상해에서 널리 제자를 받아들여, 상해 암흑세계를 장악한다. 1927년,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張嘯林)등과 함께 장개석이 일으킨 "4.12"정변에 참여한다. 남경국민정부가 성립된 후에는 소장참의(少將參議) 및 행정원참의(行政院參議)를 역임했다.
상해탄의 으뜸가는 암흑계 두목인 황금영은 1949년 상해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해방초기에 황금영은 상해에 칩거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황금영이 일찌감치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치거나 혹은 인민정부에 의하여 체포구금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금영이 쓴 자백서(悔過書)가 실리자 시민들의 반응은 아주 격렬했다.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시간에 황금영을 죽여버리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자료관에 보존된 당시 민중들로부터의 서신을 보면, 모두 황금영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 '대깡패' '노악패(老惡覇)'를 조치해달라고 요구했고, 황금영의 자백서를 보고는 '이렇게 간단한 몇 마디 말로서 그의 겹겹이 싸인 혈채를 덮을 수 있을 것같으냐?", "그는 인민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혈채를 지었으니, 우리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인민정부에서 이 죄악의 근본을 뿌리뽑아주기를 바란다." "황금영은 죽여야하고 남겨두어서는 안된다"고 써서 보냈다. 그리고 황금영의 제자들중 일부도 앞장서서 고발하고 공산당에 잘보이려고 했으며, 황금영과는 선을 긋고자 했다.
이때의 황금영은 길거리의 쥐새끼와 같았다. 보는 사람마다 소리치고 때리려고 했다.
해방초기에는 인민정부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다보니, 황금영도 한동안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아편을 피우는 것으로 말하자면, 정부에서 비록 명문으로 금지하였지만, 황금영은 모른척 하고 예전처럼 그대로 피웠다. 그리고 집안에 대량의 상급 아편을 숨겨두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남은 평생을 피워도 남을 만큼'이라고 하였다. 비록 어떤 사람이 고발까지 하였지만,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아편뿐아니었다. 황금영은 매일 세 가지 일을 했다. 아편을 피우고, 마작을 하며,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삼건투(三件套)"라고 말했다. 국민당이 정권을 잡든, 공산당천하이건 마찬가지이며,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라고 하였다. 그가 상해에 남게 된 것도 이 '삼건투'가 어느 정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황씨집안에는 아래위로 20여명이있었는데, 모두 용문로 균배리 1호에 살았다. 이곳은 황금영이 성공한 후에 지은 3층짜리 양옥이다. 부근의 집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 빌려서 쓰고 있었다. 여름에 피서를 위해서 조하경(漕河涇) 황가화원(현재의 계림공원)에 잠깐 머무는 것을 제외하고는 황금영은 계속 이 집에 거주했다.
이때 황씨집안은 식구가 적지 않았다. 대가족이라 할 수 있었는데, 상주인구만 해도 다음과 같다: 큰며느리 이지청(큰아들은 이미 사망함), 둘째 아들 황원도, 손자와 손자며느리 2명, 문지기 2명, 여자일꾼 3명, 남자일꾼 5명, 운전사 2명, 3륜차부 1명, 주방요리사 2명등이었다. 이때도 이 정도였으니, 그의 전성기에는 얼마나 더 대단했을지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드나드는 옛친구, 제자들까지 합치면 차수마룡(車水馬龍)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막하지는 않았다. 하루에도 식사를 5-6번 내놓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멀리 홍콩에 가 있는 두월생보다는 나았다. 두월생은 그저 맹소동이 부르는 경극의 노래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황금영은 목욕을 즐겼다. 양주인들의 소위 '아침에는 가죽을 물에 담그고, 저녁에는 물에 가죽을 담그는' 것이다. 당초 두월생이 그에게 함께 홍콩에 가자고 권했을 때, 황금영은 바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홍콩에도 목욕탕이 있는가? 나같은 80여세의 노인이 매일 가서 담글 수 있는 데가 있는가?" 두월생은 더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인민정부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황금영이 경영하는 그의 사업들을 놔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세계(大世界), 황금대희원(黃金大戱院), 영금대희원(榮金大戱院)등에서 매월 적지 않은 수입이 들어왔다. 황금대희원은 화동문화부 산하의 대중극단에 임대주었는데, 매월 수입이 백만위안이었다. 황금영은 이외에도 여러개의 부동산이 있었는데, 모두 제자들이 도급받아 대외로 임대를 주었는데, 임대료가 적지 않았다. 황금영은 이들 사업을 계속 경영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제자에게 넘겨주기도 하고, 둘째아들 황원도에게 처리를 맡기기도 하였다. 돈은 한동안 문제가 없었다.
1951년초,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된 후, 황금영의 나날은 고달퍼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황금영의 집앞에 모여 그로 하여금 비판투쟁을 받도록 요구했다. 고발장, 고소장이 눈발처럼 시정부와 공안기관에 밀려들었다. 모두 정부로 하여금 그를 처벌하여 정의를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 공안국은 또 하나의 정보를 얻는다. 황금영의 집안에 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안국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황금영과 얘기를 시작했고, 그 사실이 있는지를 문책했다. 황금영은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황씨집안에 확실히 총이 한 자루 있었다. 황금영이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총와 탄약은 황원도가 감추고 있던 것인데 ,그는 이전에 송호경비사령부 조사대대의 분대장을 맡았었다.
공안국은 사람을 보내어 무기를 찾아냈다. 장총과 권총이 10자루 나오는데, 그 중 2자루는 이미 녹이 슬어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총알이 수백발이 있었고, 일본도가 몇 자루 있었다.
당시는 반혁명진압운동이 고조되었을 때이므로, 황씨집안에 은낵해둔 무기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황금영 본인은 두려움을 느꼈고, 그는 정부에서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어 붙잡아갈까봐, 심지어 그를 총살에 처할까봐 겁을 냈다. 그는 방황하고 배회하며 여러날을 집안에 콕 틀어박혀서 속수무책으로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상해의 암흑가인물들에 대하여 어떻게 공작을 해서 공산당을 위하여 일하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당중앙에서 이미 상해해방전날에 방침이 서 있었다. 즉, 그들이 교란시키지만 않고 상해해방후의 사회치안을 방해하지만 않고, 착실히 개조를 받는다면,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황금영, 두월생과 같은 우두머리급 인물에 대하여는 '당분간 관찰한 후 다시 결정한다"(유소기의 말)는 입장이었다. 목적은 '상해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노력한다"(주은래의 말)는데 있었다.
진의 시장과 정법업무를 맡았던 반한년 부시장은 모두 이 방침을 그대로 집행했다. 반한년은 황금영의 상황을 분석한 후, 황금영이 반동통치시기에 제국주의의 주구노릇을 하였고, 장개석의 편이었고, 그와 그의 제자들이 상해에서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인식했다. 다만, 그는 상해해방때 도망치지도 않았고, 파괴하지도 않았으며 이는 최소한 공산당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현재 바깥 일에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 우리도 그를 반대자로 몰아서 처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그의 태도를 보고나서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상해해방후 바로 황금영에게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였다.
황금영의 상황에 관하여 관련부문에서는 3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이렇게 많은 혁명군중이 황금영의 죄행을 고발하고, 황금영에 대하여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군중의 각성이 있고, 정부를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황금영이라는 암흑가 우두머리의 처리는 책략에 따라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을 위주로 한다.
셋째, 황금영 본인에 대하여는 반성문을 쓰게 해서 공개하고, 인민에게 사죄시키며, 인민으로 하여금 재판하게 한다.
오래지 않아, 상해시인민정부는 성비화, 매달군, 만행삼을 대표로 파견하여 황금영을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기존의 방침이 변하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그에게 '반성문'을 쓰고 그것을 공개하여 잘못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1951년 5월 20일, 상해 <<신문보>>, <<문회보>>에는 <<황금영자백서>>를 실었다. 스스로, "자수하여 회개하였고, 공을 세워 속죄하겠으며, 정부와 인민의 용서를 빈다"는 내용으로 적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글은 오히려 민중의 반발을 불러 더욱 큰 풍파를 일으킨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황금영은 죽여야 하고 남겨둘 수 없다'는 소리가 높아갔다.
문사전문가인 심적에 따르면, 그는 당시 홍콩에 있었는데, 그 때 두월생의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마침 두월생이 홍콩 <<대공보>>에 실린 "황금영자백서"를 보고 있었다. 두월생은 몸이 쇠약해져서, 집사인 만묵림으로 하여금 그에게 읽어주게 하는 방식이었다.
황금영과 두월생은 같은 배를 탄 입장이었다. 두월생은 자연히 황금영의 자백서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지, 어떻게 언급되는지를 신경썼다. 그래서 홍콩 <<대공보>>에 실리자마자 바로 사람을 시켜 사오게 하고는 만묵림에게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두월생이 한번 듣고는 "묵림. 다시 한번만 읽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만묵림은 두번째로 읽었다. 자백서는 길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한 군데 "4.12"정변 전후의 일을 언급하는 것이 있었다. "국민당 북벌군이 상해에 도착했다. 하루는, 장소림이 나를 보러 왔다. 그들은 공진회를 조직하였는데, 당시 내가 프랑스조계 순포방의 독찰장을 맡고 있어서 나도 가입시키려고 한 것이다. 나는 가입했다..."
"잠깐!" 두월생은 이 부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이었다. 손을 흔들어 만묵림을 멈추게 한 후, 그에게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달라고 했고, 아주 귀를 기울여서 들었다.
다 듣고 난 후, 두월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알았다. 알았어"라고 작게 말했다.
두월생은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같았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초 그는 적극적으로 장개석이 "4.12"정변을 일으키는데 적극 협조했다. "중화공진회"가 성립될 때, 그가 바로 황금영, 장소림등과 함께 주도했다. 황금영의 자백서에는 그의 이름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단순히 빠트린 것이나 소홀히 한 것은 아니고,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공측면에서 무슨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두월생이 스스로 "알았다"고 한 것은 두월생이 정치적으로 아주 후각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황금영이 자백서를 쓸 때, 한번만 쓴 것이 아니다. 초고(初稿)와 이고(二稿)의 원본은 지금 상해시 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내용이 약간 다르다.
초고에는 두월생의 이름이 명확히 나와 있다. 원문은 이렇다: "나중에 북벌군이 상해에 와서 일을 할 때, 하루는 장소림, 두월생, 우흡경이 나를 보러 왔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진회를 발기조직하였고, 내가 프랑스조계포방의 독찰장이었으므로 나를 참가시키려 한 것이다" 당시 정법업무를 주관하던 부시장 반한년은 초고를 돌려보내면서 황금영에게 다시 쓰라고 시켰다. 결국 이고에서는 내용에 큰 변동은 없었지만, 두월생의 이름은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두월생은 중공측이 쟁취하려는 통일전선전술의 대상이었고, 이미 적지 않은 공작을 해놓았다.
이후, 두월생의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인다. 최소한 장개석의 대만으로 오라는 요청을 거절한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임종때, 여전히 상해포동의 고향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황금영이 그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죽기는 했어도, 그는 상해에서 죽었고, 고향에서 죽었다.
황금영은 자기의 자백서가 두월생에게 이런 작용을 할 줄은 아마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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