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숭배는 인류문명탄생이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역사현상이다. 그것은 영웅인물의 신성화이며, 자기의 희망, 감정, 경모를 모두 숭배대상에게 바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숭배주체의 "자아포기의 과정"이다. 개인숭배는 사회군중이 공동으로 참여하며, 때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참여하기도 한다. 숭배대상은 왕왕 일체의 수단을 사용하여 숭배자의 자신에 대한 경건과 신앙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며, 일종의 종교역량과 비슷한 자신의 카리스카를 형성한다.
홍수전 및 그의 추종자들은 태평천국의 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개인숭배를 진행했다. 이는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응집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운동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홍수전은 중국유교정통문화와 민간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은 전통적인 엘리트이고 농후한 제왕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과거를 열어 천하의 선비를 모으리라"는 권력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새로운 정권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홍수전과 추종자들은 상제교를 창립하는 외에, 개인적인 카리스카를 세우고 선전하는데도 주력했다.
첫째, 홍수전등은 진명천자의 신화를 만들었다. 태평천국운동초기에, 홍수전은 자신을 주원장 이후의 진명천자라고 비유했다. 그리고 황상제의 둘째아들이라고 했다.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구원한다고 했다. 양수청등은 현지의 무술을 이용하여 홍수전은 진명천자로 세상에 내려왔다고 선전했다. 광서민중들을 미신의 전통이 강해서, 홍수전을 신격화하는 전설은 그들이 있던 마을과 태평군내에서 매우 성행했다. 홍수전에 대한 신화는 모두 홍수전과 그의 추종자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신화를 만들고 전파한 목적은 홍수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받들고 숭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 의전(儀典)을 제정하고, 상징부호를 사용하여 홍수전의 권위를 세웠다. 인류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징부호와 의식은 사회인정과 사회동원방식의 하나이다. 그들은 족속, 단체와 지역의 동질감을 통합하고 공고히 하는 기능을 한다. 부호는 표현하는 것이면서 도구이다. 권위를 표현하는 동시에 권위를 재창조한다. 그래서 정치조작과정에서 부호와 의식의 사회기능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홍수전등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상징부호를 어떻게 이용하여 새로운 권위에 대한 숭배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알았다. 복식중에서의 상징부호는 사람들의 정치와 문화관념을 대표한다. 태평천국은 이 측면에서 옷을 다 바꾸어 버렸다. 다른 측면으로 전통제왕복식중에서 권위의 상징인 용은 승계했다. 이외에 태평천국은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부호를 사용했는데, "태양"을 이용한 숭배와 선전이다. 기독교는 태양숭배를 금지한다. 그러나, 태양은 중국전통문화에서 위력과 만물생장의 근원을 상징한다. 또한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수전은 기독교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태양신으로 봉하고, 용포에도 태양을 수놓았다. 자기가 거주하는 궁전을 "태양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징부호는 중국농민의 신앙관습과 맞아떨어졌고, 홍수전에 대한 개인권위를 나타내는데 유효하게 사용되었다.
홍수전등은 각종 의식을 통하여 권위의 인정과 숭배를 받았다. 문화인류학은 의식을 상징적이고, 연출적인 전체적인 행위방식으로 정의한다. 질서를 강화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운동 초기에 제왕의전을 이용하여 이미 '성가(聖駕)'등의 용어를 썼고, 등극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각종 번잡한 예의를 제정하였다: 대신들이 천왕을 배알할 때는 반드시 '만세'를 외쳐야 했고, 금룡전에서 군신은 같이 연회를 베풀지 않으며, 여러 왕들만이 천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매년 각종 기념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등극기념, 생일경축등이다. 홍수전은 특히 생일축하의식을 중시했는데, 그 중에는 천부에 감사하는 의식도 포함된다. 이로써 자기는 상제의 둘째아들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홍수전이 깊은 구중궁궐에 있으면서,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는데, 이 의식의 중요성과 신비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었다. 실제로 정치의식은 일종의 권력의 실천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원에 대하여 정치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 시간과 공간에서 홍수전에 대한 숭배를 조성한다. 1851년 3월 23일, 홍수전은 정식으로 천왕에 등극하였다. 3월 23일은 바로 기독교의 부활절이다. 홍수전은 고의로 등극일을 부활절로 정한 것이며, 천부가 정해주었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자기의 지위를 드높이고, 왕권신수의 신비적인 색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홍수전은 이 날을 '등극절'로 지정했고, 자기의 생일도 기념일로 지정했다. 홍수전은 스스로 명절을 만들어갔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명절인 부활절, 성탄절은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하게 기독교의 전통적인 명절을 몰랐던 것이라기보다는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목적은 자기가 제정한 시간의 부호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시간의 조성으로 자기를 신화하고 민중들이 자기를 숭배하도록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시간이 사회성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정치권력의 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홍수전은 웅장한 '천조궁전'을 만듬으로써, 자기의 권위와 권력의 공간을 과시했다. 천조궁전의 규모가 거대한데, 전체공간배치를 천왕의 의지와 권위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바깥은 태양성, 안은 금룡성" 궁궐의 경비는 삼엄했다. 이 규모가 거대하고, 기세가 웅장한 궁전건축물은 홍수전의 만세군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민중들을 천조궁전과 그가 전해주는 권위에 경탄하고 굴복했다. 홍수전에 대하여는 자연히 경외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넷째, 전통매체의 선전을 통하여 개인숭배를 진행했다. 홍수전은 조서, 포고, 공문, 회시문제등을 반포하는 형식으로 개인숭배를 선전했다. 조서중에서 홍수전은 여러차례 자기는 "천부상제진명천자"라고 하였고, "천하의 사람은 모두 짐을 먹고, 짐을 입으라"고 했다. 완전히 태평천국을 자기 일인의 가산으로 표현했다. 보통민중이 그를 숭배하게 하기 위하여, 홍수전은 <<삼자경>>과 <<유학시>>의 교재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이를 통하여 자기의 권위를 드높였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하였다. "사람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신하는 잘못을 저지르지만, 군주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외에, 홍수전은 전통제왕의 피휘제도를 활용하여 그와 관련있는 글자를 전용글자로 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성을 고쳐야 했다. 예를 들어 왕(王)씨는 왕(汪)이나 황(黃)씨로 고쳐야 했다. 이러한 자신을 신격화하는 방법은 이미 역대의 황제의 수준을 훨씬 초과하였다.
홍수전이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부하들의 공동노력이다. 풍운산, 양수청등은 홍수전의 초기개인숭배를 만들어갈 때 아주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 이로써 홍수전은 농민들에게서 금방 광범위한 지지와 숭배를 받게 되고, 민중들은 홍수전이 하늘로부터 권력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홍수전 개인숭배는 민중을 동원하고, 참여시키고 상제회의 응집력을 배가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태평군이 북상하는 과정에서, 남경에 수도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모두 사회심리적인 기초를 형성하였다. 다만, 바로 이러한 개인숭배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아와 주체를 포기하고 절대적으로 맹종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갈수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홍수전은 과도하게 개인숭배를 추진했다. 그러나, 권력욕망이 강했던 양수청등은 '천부하범'을 이용하여 종교상으로 홍수전보다 높은 권력과 지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개인숭배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배척하게 되는데 이것이 태평천국에서도 재현되었다. "천경사변"이라는 역사적인 비극은 바로 홍수전과 그의 추종자들이 개인숭배를 추진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이로써 볼 때, 태평천국운동의 최종실패원인을 검토할 때는 홍수전에 대한 개인숭배라는 요소는 반드시 고려해야할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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