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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무술변법운동의 핵심주력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08. 6. 20.

글: 진명원(陳明遠)

 

과거에 많이 알려진 내용은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가 무술변법의 지도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나중에 캉유웨이,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가 선전하고 조작하고 날조한 것이다. 실제로, 1898년 광서제가 '무술변법'을 시작할 때의 핵심, 주력은 광서제의 주위에 있던 1품인 황제의 스승 옹동화(翁同1830-1904), 어사인 양심수(楊深秀, 1849-1898), 2품인 시독학사 서치정(徐致靖), 진소(陳昭), 문정식(文廷式)등의 '제당(帝黨)' 인사들이었다. 당시에 하급인 6급에 불과했던 강유위, 양계초는 그저 참모, 비서역할에 그쳤던 것이다.

 

1. 양심수가 가장 먼저 조정에서 유신변법을 주장했다.

 

무술변법은 청나라조정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궁중개혁이다. 이 개혁의 발기자, 주재자는 광서에 충성을 다하는 '제당'의 상층관료집단이었다. 1897년 겨울, 독일이 교주만(청도)를 점열하였다. 광서23년 12월 초7일(1897년 12월 30일) 대신 양심수는 산동도감찰어사의 직을 받는다. 다음 날, 그는 광서황제에게 <<시세간위, 근공추의절>>이라는 글을 올려서, "시세가 위급하니, 옛것을 개혁하지 않으면 새것을 도모할 수 없고, 변법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밝힌다. 감찰어사 양심수의 첫번째 상소는 조정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교주만사건이후, 광서제가 유신파측에서 직접적으로 들은 최초의 변법주장이었다. 강유위의 <<청대서신공개제도신국절>>보다 2달이나 빨랐다. 바로 이 상소에서 제기한 조상부터 내려온 법을 개혁하자는 문제는 아주 중요했다. 금방 군기대신들은 관례에 따라, 서태후에게 보여준다. 청나라 군기처의 자료에 따르면, "오늘 어사 양심수가 글을 올렸다. 시세간위, 근공추의절이다. 명을 받아 보관한다. 양심수의 상소문을 서태후에게 올려 보게 했다" 이처럼 중요한 유신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문에 당시 겨우 6품의 공부주사인 하급관리 강유위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나중에 양계초는 <<무술육군자전. 양심수전>>에서 "강유위가 대신 초안했다"는 상소문은, 다른 것을 가리킨다. 제일역사당안관에서 소장한 궁중자료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양심수는 어사신분으로 강유위를 대신해서 올린 상소문은 <<청련영국,임제덕분, 익견아조절>>이다. 이것은 3일후인 1898년 1월 1일에야 올렸다. 강유위의 이 외교관련 상소는 무술변법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찌감차 조정에서 무술변법을 주장한 것은 양심수 대신이었고, 하급관리 강유위는 '무술변법을 지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2. <<명정국시조(明定國是詔)>>의 반포과정

 

무술변법의 정식개시는 광서제가 <<명정국시조>>를 반포하는 것이다.

 

1898년 1월 23일, 광서제는 왕공대신을 만나서, 시국이 어렵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변법사상을 얘기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옹동화는 사람들이 이처럼 마목불인(麻木不仁)한 것을 보고 아주 화가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나라가 잠식을 당하고 있다. 어제는 독일이 교주를 점령했고, 오늘은 러시아가 여순대련을 달라고 한다. 내일은 영국, 프랑스, 일본이 연이어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계속하면, 나라는 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황상은 위기국면을 만회하고자, 변법을 주장하시는데, 우리 조정대신들이 조금이라도 심성이 있다면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말은 청나라의 공친왕 혁흔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그날로 서태후에게 보고하고, 옹동화가 황상을 유혹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공격했다. 완고파 이익집단의 방해로, 광서제의 변법계획은 다시 좌절된다. 5월 31일, 공친왕 혁흔이 병사하고, 유신파는 걸림돌이 하나 제거된 셈이었다. 옹동화는 광서제에게 권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고 변법을 밀어부치자고 말한다. 6월 1일, 8일 어사 양심수, 시독학사 서치정은 각각 광서제에 '국시를 정하자'고 상소를 올린다.

 

광서24년 4월 23일(1898년 6월 1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면전에 이렇게 말한다: "전날 어사 양심수, 학사 서치정이 국시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좋은 말이다. 이제 서학을 얘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일 선포하라." 그리하여 광서제는 옹동화가 초안한 <<명정국시조>>를 선포하여, 서학을 배우고, 변법자강하는 것을 청나라의 국책으로 삼는다. 이때로부터 백일유신이 시작된다.

 

당시의 하급관리인 강유위는 상층의 이와 같은 의사결정에 참여한 바 없다. 그러므로, 그는 무술변법을 지도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3. 강유위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는 무술변법의 이론기초가 아니다.

 

일찌기 널리 알려진 것은 강유위의 저작인 <<신학위경고>>(1891년)와 <<공자개제고>>(1897년)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학자들이 새로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강유위의 이 두 개의 저작에 나오는 많은 자료는 장지동의 제자인 요평의 <<벽유편>>(1886년)과 <<지성편>>에 나오는 것이고, 심지어 표절이라고 할만한 점도 있다. 양계초도 "강유위는 확실히 이전에 요평의 원고를 보았다"고 말했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이 두권의 책에 대한 가치는 고의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는 것이다. 강유위의 소위 "탁고개제(托古改制)"의 학설은 많은 것이 주관억측, 견강부회이고 어떤 곳은 아주 엉망이었다. 무슨 과학적인 분석도 아니었다. 오늘날 보자면, 무슨 뛰어난 학술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 실제로 당시에도 무술변법의 이론기초나 지도사상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에 유신변법에 대한 실제작용과 이론의의를 찾는다면 정관응의 <<성세위언>>등의 책이 강유위의 <<공자개제고>>보다는 훨씬 영향이 컸다.

 

4. "공거상서(公車上書)"는 당시 각지 거인들의 공동의 애국행위였다.

 

소위 "강유위가 공거상서를 이끌었다"는 것은 강유위와 양계초가 날조한 역사신화이다.

 

모든 중국근대통사 저작에서는, 거의 모두 강유위가 1895년 5월 2일 "공거상서"를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찌기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지만 중요시 되지 않았었다. 사실상, 강유위는 당시 비록 황제에게 올리는 만언서를 초안하기는 했지만, 각성의 거인은 만언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도찰원에 보내지도 않았다. 더구나 광서제의 손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강유위의 소위 '상서'는 무술변법과정에서 확실히 과장된 것이다.

 

황창건의 <<무술변법사연구>>, 장건위의 <<온고무술년>>등의 저술에서 볼 수 있는 사료에 의하면 1895년 5월, 강유위는 소위 그 개인이 '18성 1200여 거인을 발동시켜 연명으로 공거상서'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허위이다. 사람수도 가공의 것이다. 이 수치는 그가 스스로 만든 연보에 따른 것인데, 이외에 그는 1895년에 시를 써서, "18개성 3천명이 연명으로 상서했다"고 적었었다.

 

실제로 강유위는 당시 진정으로 "상서"를 실행하지도 않았따. 그는 그저 송균암의 문앞에서 북경으로 오는 각지의 거인(3천명일리가 없다)에게 연락을 했을 뿐이고, 상서준비를 상의했다. 다만, 어쨌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원인은 강유위가 알고 있는 태감으로부터 그가 과거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앞장서서 상서를 올린다면, 손안에 들어온 '진사'가 취소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물러선 것이다. 사료의 증거는 바로 강유위의 충실한 제자인 서근의 <<남해선생사상서기>>에 부록으로 붙은 <<잡기>>에 나와 있다. 당시 송균암 모임에 참가한 "애시노인미환씨"의 <<공거상서기서>>, 장대천이 제공한 증의염, 이매암(두 사람 모두 송균암에 모였었다)의 회고기록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강유위는 앞장서서 "공거상서"를 하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그날 각지의 거인과 관리들이 올린 상서는 모두 15건이나 되었다. 호북, 강서, 절강, 하남, 산동, 사천등지으 거인들이 모두 이날 상서를 올렸다. 이것이 진정한 '공거상서'이다.

 

나중에 강유위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자랑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를 변조했다. 현재는 이미 모든 사실이 밝혀졌고, 그렇게 떠벌이고 다니던 '공거상서'는 실제로 당시 전국각지 거인들이 공동으로 한 애국행위였지, 강유위의 공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