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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의 황제피습사건

by 중은우시 2008. 6. 27.

 

 

글:유연(劉燕)

 

청나라가 입관한 후 260여년동안 순치제로부터 선통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그중 두 명의 황제가 피습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옹정제와 가경제이다. 옹정황제가 피습되었다는 설은 그저 시정의 소문일 뿐이고,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가경제의 피습사건은 기록이 남아있는 확실히 발생했던 사건이다.

 

청나라 가경8년(1803년) 윤2월 20일, 가경제는 원명원에서 자금성 황궁으로 돌아왔다. 관례에 따라, 가경제는 조정중신, 어전시위를 데리고, 원명원에서 마차가(馬車駕)를 타고, 신무문(神武門, 원래의 현무문, 자금성의 북문)으로 들어간 후 어교(御轎)로 바꿔탄 후에 궁안으로 들어간다. 최근들어 청나라군이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므로, 가경제는 며칠동안 연속으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원명원에서 먹고 마시며 연회를 베풀고, 시와 부를 짓고 읊었다. 며칠 전에는 친히 청동릉으로 가서 선황 건륭제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있다. 이때 가경제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분이 아주 좋았고, 연일 계속되는 경축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바로 가경제가 어교(御轎)로 갈아타기 위하여 신무문안의 순정문(順貞門)으로 들어서는데, 돌연 신무문안의 상방(廂房) 남쪽 벽에서 돌연 사내 하나가 뛰어나왔다. 손에는 단도를 들고 바로 어교로 달려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호군(護軍), 시위(侍衛)는 돌연한 사태에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모두 멍청하게 서 있으면서 어찌할 바를 볼랐다.

 

가마 곁에 서있던 어전대신 정친왕(定親王) 면은(綿恩)은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편이었고,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앞으로 나가서 사내를 막았다. 고륜액부(固倫額附) 라왕두르지(拉旺多爾濟), 건청문시위 단바두르지(丹巴多爾濟)등 몇 사람이 곧이어 뛰어나가 사내와 싸움을 벌였다. 이때 가경제는 돌발사건에 놀라 혼비백산했고, 황급히 순정문 안으로 도망쳤다. 조금 전에 즐거웠던 기분은 모조리 달라났다. 사내는 가경제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손에 든 단도를 좌충우돌 휘두르며, 황상이 도망치는 쪽으로 쫓아갔다. 격렬한 싸움 끝에, 몇 사람이 사내를 둘러쌌고, 마침내 사내를 붙잡았다. 시위 단바두르지는 칼에 세곳이나 찔렸고, 정친왕 면은의 소매도 싸우는 과정에 찔려서 구멍이 났다.

 

가경제가 하마터면 피습당할 뻔했다는 소식은 조야상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밝은 대낮에 신무문에서 황제를 피습한 사건은 가경제때의 유명한 큰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가경제는 즉시 성지를 내린다. "군기대신이 형부와 함께 엄격히 심문한 후에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도록 한다.

 

자객의 이름은 진덕(陳德)으로 47세이며 북경사람이다. 부모는 원래 관리집안의 가노(家奴)였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주인을 따라 산동으로 이사갔다가,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산동의 돈있는 집안에서 일해주면서 살았다. 진덕은 23살때 처를 얻어 아들을 낳는다. 31살때는 부모가 차례로 병사하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북경으로 와서 친척집에 의탁하고, 고관대작의 집안에서 이리저리 일을 해주면서 살아왔다.

 

사건발생전에, 진덕은 맹(孟)씨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한다. 그동안 그의 처가 불행히도 병사한다. 80세의 병석에 누워있는 장모와 미성년인 두 아들을 남겨두어, 살아가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해 2월, 진덕은 다시 맹씨집에서 쫓겨난다. 그는 할 수 없이 친척친구집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는다. 진덕의 진술에 의하면, "더 이상 살아갈 방법도 없고, 일가노소가 의탁할 데가 없어서, 실로 급한 와중에 죽을 길을 찾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20일에 신무문에서 가경제를 찌르려고 한 것인데, 만일 황상을 놀라게 하면 반드시 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통쾌한 일을 벌이고, 제대로 죽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진덕암살사건은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다. 대신들은 놀라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으며 인심이 황황했다. 어떤 조정의 중신은 이 사건의 배후에 분명히 막후에서 지시한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가경제는 명나라말기의 자객 장차가 자경궁을 난입하여 태자 주상락을 죽이려고 했던 유명한 "정격안"사건을 생각해내곤 마음 속으로 여러가지 의심을 품었다. 이어서 연달아 2개의 어지를 내려서, 만한대학사, 육부상서, 구경과도를 함께 심문에 참석하게 하고, 반드시 "누가 이 일을 지시했는지, 공모자는 누구인지, 당료가 있는지 없는지를 반드시 알아내도록 명령"하였다.

 

중국제일역사당안관에 현존되어 있는 가경조의 상유자료의 기록을 보면, 진덕의 진술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번 피습은 실로 혼자서 한 일이다. 누구의 지시도 받은 바 없다. 그리고 공모자도 없다. 확실히 생활이 힘들어서 한 짓이다. 진덕은 어려서부터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왔고, 출생 8개월후에 부모를 따라 관리의 집에서 일을 했으니 다른 사람의 노비이다. 그리하여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부모가 죽은 후, 산동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할 수없이 북경으로 돌아와서 사촌누나에게 의탁했다. 서성 능인사의 외조카 안육격의 집안에 머물렀다. 몇년동안 가족과 공부의 심원외의 집, 시위 붕무포의 집, 병부필첩식 경신의 집등 6집에서 일을 했다. 가경3년(1798년)에 진덕부부는 15조경전을 받고 성북쪽의 방가후통 맹명의 집에서 요리사로 전당잡혀져 일했다. 가경6년(1801년) 진덕의 처가 불행히 병사한다. 다음해 가을 그의 80세된 장모가 넘어져 다쳐서 병석에 누워버린다. 연말에는 그의 사촌누나도 병사한다. 계속되는 불행으로 진덕은 부채가 누적되었고, 할 수없이 당시 나이 겨우 13살인 큰아들도 나가서 일을 했다. 가경8년(1803년) 2월, 맹씨집안은 그가 식구는 많은데 일하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하였다. 맹씨집안의 아들 맹계기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진덕은 "자주 술을 마시고 집안에서 노래부르고 울면서 소란을 피웠다" 맹씨집안에서는 그가 소란을 피울까봐 겁이나서 그를 해고해 버린다.

 

맹씨집안에서 쫓겨난 후, 진덕일가의 유일한 활로가 끊겼다. 어쩔 수 없이, 집안식구들과 외조카 안육격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촌누나가 병사하였고, 외조카는 상중이었으며, 생활도 아주 곤궁하고 힘들었다. 도저히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2월 15일, 더이상 방법이 없어진 진덕은 집안식구들을 데리고 친구인 황오복의 집으로 간다. 동화문외 감수정에 거주한 것이다. 황오복의 진술에 따르면, 진덕은 그의 집으로 이사온 후, 매일 나가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오곤 했다. 진덕의 큰아들인 녹아(祿兒)의 진술에 따르면, 그이 부친은 "일거리없이 지내는 날이 길어지면서 옷도 다 전당잡혔고, 걱정이 아주 많았다"고 하였다. 그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남아있는 의복도 전당포에 모냈으니, 마음이 아주 우울했다. 그저 술로 풀었다. 황오복의 진술에 따르면,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데, 진덕이 모르는 사람과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는 칼을 뽑아서 상대방을 찔렀다. 그는 화가나서 말하기를 하나를 찔러죽이면 목숨으로 갚으면 된다. 두명을 찔러죽이면 하나 이익보는 것이고, 만일 너댓명 찔러죽이면 여럿 이익보는 거다라고 소리쳤다. 진덕도 진술에서 그때 술집에서 다른 사람과 싸운 후에, "생각하면 할 수록 화가 났다. 돌연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더라도 멋있게 죽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해버렸다" 그는 또한, 현재 항간에는 가경제가 20일에 궁에 돌아와서 재계(齋戒)를 한다고 모두 알고 있다. 자신은 예전에 포의통령(包衣統領)을 따라 내무부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므로, 자주 궁중에 출입하며 물건을 운송해주곤 해서, 궁내의 상황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입궁할 때 가경제를 찌를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덕의 진술을 심문에 참여한 대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진술한 상황이 "너무나 정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밤낮으로 돌아가면서 심문을 했고, 연일 혹형을 가하고, 뺨을 때리고, 꿇어앉히고, 주리를 트는 등등, 안해본 것이 없었다. 심문이 심해지자, 진덕은 다시 암살을 시도한 데는 "꿈"과 "점"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건륭57년부터 가경2년까지 모두 정양문내에서 5번 점괘를 뽑았는데, 매번 최고의 점괘가 나왔고 모두 좋은 말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가경2년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한 사람이 길을 안내해주었는데, 내 친구 왕복 같았다. 나를 이끌고 같 곳은 어떤 집이었는데, 내가 꿈속에서 동궁(東宮)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경3년에 "꿈에서 내가 무수교(無水橋)의 아래에서 누워 있는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끌어서 다리 위로 올리는 것같았다. 나는 다리 위에 서 있었는데, 보기에 지부대당(知府大堂)같았다. 내가 입은 옷도 정향형망포(程鄕螢?袍)였다" 진덕은 또한 나중에 <<문창서초>>라는 책을 보았는데, 이 두개의 꿈이 길몽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궁은 수궐(守厥)의 뜻이고, 지부대당은 황당(黃堂)이라는 뜻이며, 다리아래에 자는 것은 규룡(?龍)이라는 것이고, 사망포는 황룡포(黃龍袍)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니, "장래에 나에게 조정의 복이 있다"고 생각해서, "분수에 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몇년동안 계속 호사란상(胡思亂想)했다는 것이다"

 

진덕은 일생동안 노비로 지냈고, 그가 모신 사람은 모두 고관대작이었다. 특히 북경에서 포의통령 달상색(達常索)을 따라 내무부에서 일한 3년동안, 자주 궁중을 출입하면서, 황제후비의 사치스런 생활을 목격했다. 자기의 일생은 힘들게 지내고 있으므로 불공평한 운명에 대하여 불만이 일었다.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자기의 운명을 바꿔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낮에도 밤에도 생각했다. "조정복분"이 길몽은 바로 현상에 대한 불만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정양문에서 몇번 점을 쳤는데 모두 좋은 말이 나온 것도 미래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현실생활은 무정했고, 진덕으로 하여금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 위험을 무릎쓸 수밖에 없었다. 가경8년 윤2월 20일, 진덕은 점괘를 믿고, 몸에 단도를 숨기고, 큰아들 진녹아를 데리고 동안문의 술집에서 두 잔의 모과주와 소흥주를 들이킨 후,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가서, 동서패루(東西牌樓)를 지나, 서협도(西夾道)를 돌아 신무문에 이르는 불귀의 길을 걷는다.

 

가경8년 윤2월 24일, 가경제는 명을 내려 진덕을 능지처사(凌遲處死)에 처한다. 진덕의 두 어린아들도 교형(絞刑)에 처한다. 대청률에 따르면, 대역죄를 저질러 능지처사를 받은 자의 16살이 되지 아니한 아들은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어 노비를 삼게 되어 있었다. 진덕의 두 아들인 진녹아와 진대아(陳對兒)는 모두 16살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가경제는 참초제근(斬草除根)을 하기 위하여 두 아들마저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청조야사대관>>등의 책에 따르면,  진덕은 형을 받을 때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채시구(菜市口)의 형장에서 진덕은 나무기둥에 묶였고, 두 아들은 붙잡혀와서 그에게 절을 했다. 그는 눈을 감고 보지 않았다. 형이 시작되고, "진덕의 귀, 코 및 젖을 베어내고, 왼팔부터 물고기비늘처럼 잘게 베고, 다음에 오른팔로 가고, 다시 가슴과 등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피가 나왔으니, 계속되자 피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누런 물이 흐를 뿐이었다" 상체를 다 베어내자, 진덕은 돌연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질렀다: "통쾌하구나(快些!)" 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는 말했다: "황상의 명으로 네가 오랫동안 죄를 받게 하는 것이다" 진덕은 눈을 감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청나라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진덕의 피습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은 사람이 12명이었다. 진덕의 두 아들이 교살형에 처해진 것을 제외하고, 진덕의 친구인 왕사(王四), 황오복(黃五福)등은 모두 악독하게 심문을 받았다. 황오복은 여기에 더해서 장100대, 3년간 유배형을 받았다. 고궁의 신무문의 동서양쪽의 호군인 장경 현복(賢福), 서경(瑞慶), 호군통령 아합보(阿合保), 상청(常靑)과 호군교, 호군등 60여명이 직무소홀죄(失察罪)로 각각 열하유배, 삭탈관직, 강급, 감봉, 가시(枷示)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날 당직을 섰던 숙친왕 영석(永錫), 부독어사 만녕(萬寧), 부도통 살민(薩敏)등은 종인부 및 해당 부에 보내어져 처분받았다. 어전대신 정친왕 면은, 고윤액부 라왕두르지 두 사람을 황상을 구한 공로로 어용보괘(御用補?)를 받았다. 그들의 아들을 패자와 보국공에 봉했다. 건청문시위 단바두르지는 패륵에 어전행주를 삼았고, 자크타르등 몇 사람도 모두 상을 받았다.

 

진덕이 가경제를 피습한 사건으로 조정은 놀라고, 가경제는 원명원, 열하행궁, 목란위장등 금지의 경계를 강화다도록 명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