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psz4838
정여창(丁汝昌)은 청나라말기 북양수사(北洋水師)의 제독(提督, 총사령관)이었으며, 청일전쟁때 해전의 핵심인물이다. 이전의 논문에서는 그를 용감하게 작전을 벌이고, 차분하게 지휘했으며, 마지막에 적군의 투항유혹을 물리치고 불굴의 태도로 음독자살하였다고 하여, 그를 역대명장 혹은 역대애국장수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관련사료를 찾아보니 사실은 전혀 달랐다.
1. 정여창은 태평군을 배신한 후, 그에 의거하여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다.
정여창은 1853년 태평군에 참가하여, 안칭(安慶)에 주둔한다. 1861년 정학계(丁學啓)가 배반함에 따라 함께 상군(湘軍)에 들어가서, 천총(千總)이 된다. 1862년, 회군(淮軍) 유명전(劉明傳)의 부대로 배속되며, 곧이어 영관(營官)으로 승진하여 기마대를 이끈다. 나중에 전투과정에서 마대의 참장(參將), 부장(副將)이 된다. 1868년, 염군(捻軍)작전에 공을 세워 총병(總兵)이 된다. 제독의 직함을 받고, 협용바투루의 칭호를 받는다.
1874년, 조정에서는 군대를 줄이고 물자를 삭감하게 됨에 따라 정여창은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어 글을 올려 항의한다. 유명전이 그를 불러서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정여창은 소현 왕랑중촌으로 도망가서 수년간 숨어살았다.
1877년, 광서제가 불러서 명을 받고 감숙으로 간다. 오래지 않아, 병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1879년, 이홍장을 만나서 북양수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 1880년에는 영국으로 가서 초용호, 양위호의 두척의 쾌속선을 구매한다. 1883년, 천진진총병이 되고, 황포마괘를 하사받는다.1888년, 북양수사의 제독이 된다.
이상이 정여창의 성공기이다. 이런 내용을 일반교과서, 논문이나 사전에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정여창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2. 문외한으로 해군을 지휘하여, 청일전쟁 패배의 화근이 되다
정여창이 북양수사의 제독을 맡게 된 것은 완전히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을 기용한다'는 방침에 따른 결과이다. 정여창은 육전경험은 있지만 해전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처럼 문외한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게 하는 전법은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죄를 면하게 해주기 위하여, 이는 "군관들중 복주선정학당출신의 민남사람들이 많음에 따라, 그가 회군의 육군장군으로 혼자이므로, 명령이 집행되지 않아서, 훈련이 느슨해졌다"고 적어주고 있다.
다만,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열심히 노력하고, 사병들을 훈련시켰다면, 해군을 지휘한 경험이나 재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충분히 보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에게는 이런 장군의 '덕'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1) 생활이 문란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정여창은 성격이 가볍고 아무런 책략이 없다. 비록 해군총사령관이지만, 평소에 기녀와 자고 모여서 도박을 했으며, 군영내에 거주하지 않았다...."
(2) 하급군관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 당시 "좌우익총병 임태증, 유보섬은 그의 사람됨을 가볍게 여기고, 말을 듣지 않았다"
(3) 부대의 관리와 훈련을 내버려두어, 군기가 느슨해졌다. "군사들이 배를 가지고 놀았다" "매번 북양에 얼음이 얼면, 해군은 남양으로 내려가서 홍콩, 상해에서 매음과 도박을 즐겼다"
(4) 군함설비의 보호와 유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군함으로 정기적으로 승객들을 운송하여 돈을 벌었다" 이러다 보니 훈련에 영향을 주고 전력이 약화되었다.
(5) 허위보고로 상사를 기망했다. 이홍장이 검열을 할 때면, 모든 선박과 대포는 모두 '기름칠을 하여 새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바깥은 금옥이나 그 안은 엉망이었다.
3. 적을 두려워하고 지휘를 실패한 것이 갑오해전 패배의 직접원인이다
이전에 일부학자는 황해해전의 패배를 언급할 때마다, 모두 청나라통치자의 부패로 책임을 돌리곤 했다: 북양함대의 전멸을 얘기하면 이홍장이 전쟁을 회피하고 군함을 보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추론은 간단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겉만 보는 것이다. 같은 청나라관리이지만 풍자재, 유명전은 중국보다 수배나 무장이 잘된 프랑스 침략군을 물리친 적도 있지 않은가? 좌종당은 신강을 수복하는 휘황한 승리를 거두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여창은 왜 북양수사를 잘 지휘하여 장비가 약간 나은 정도에 불과한 일본에 승리하지 못했는가?
1894년 7월 22일, 이홍장은 정여창에게 전보를 보낸다: "오오시마(大島, 일본공사)는 한국을 핍박하여 섭군(葉軍, 葉志超의 군대)를 축출하라고 한다. 섭군이 위기에 처할 수 있는데, 부대를 추가로 상륙시키기는 힘드니, 너는 함대를 이끌고 아산일대로 가서 해면을 보호하라. 만일 왜선이 대포를 쏘면, 우리도 부득이 응사할 수밖에 없다.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처리하라" 이 의미는 정여창은 섭지초의 병사운반선을 도와서 항해를 보호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계산해보면, 만일 당시에 바로 풍도에서 일본함대와 싸우는 광을호등 병사운송선을 따라잡아 보호해주었더라면, 일본연합함대의 예기를 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여창은 겁이 많고 적을 두려워했다. 회신을 보냈는데, "아산은 한강의 내항이어서 배로 순유할 수가 없습니다. 함대가 그곳에 가면 왜군은 반드시 싸움을 걸 것입니다. 낮이라면 죽어라 싸워볼 수도 있지만, 밤이라면 방어할 방법이 없이 그저 하늘의 뜻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아산은 아산만의 끝에 있으므로, 정여창이 말한 것처럼 한강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여창은 아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그러다보니 아산으로 항행하는 시간계산도 제대로 못한 것이고, 일본함대를 포위섬멸할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오히려 병력운송선이 우세한 일본함대의 습격을 받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여 광을호등 여러척의 선박을 잃고 700여명이 순국했다. 광서제는 이 행위에 아주 불만이 컸다. 그리하여 특별히 8월 3일 이홍장에게 조서를 내려,정여창이 적을 두려워하여 일을 그르친 사실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라고 시킨다.
8월 중순, 이홍장은 여러번 전보를 보내어 정여창에게 "너는 정신을 차려 장병과 병사를 훈련시키고 대담하게 싸워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해군장병이 죽어라 싸워야 할 날이 왔다. 일본선박을 따라잡고, 온 힘을 다하여 섬멸하여야 하고 게으르고 적을 두려워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고 질책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이홍장은 어떤 사람이 얘기하는 것처럼 극력 배를 보존하는데만 신경쓴 것이 아니라, 전투기회를 노린 것이다. 그는 중일전쟁의 관건은 해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17일, 황해해전이 발발한다. 북양수사의 많은 관병은 용감하게 싸웠다. 송도, 길야, 비예, 적성, 서경환등 다섯척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그리고 300여명의 일본군 관병을 사상시킨다. 그리고 일본함대가 스스로 물러나도록 만든다. 다만, 북양수사도 큰 손실을 입는다. 이번 전투의 실패는 정여창에게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이번 전투는 직접 조우한 전투이므로 이홍장에 그에게 무슨 제약을 가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유리한 진법을 펼치지 못했으므로 청나라함선은 거대하고, 함포구경이 큰 이점을 살리지 못했고, 청나라전함의 노령화 및 속도가 느리다는 결점을 커버하지 못했다. 여기에 정여창은 대규모로 이런 전술훈련을 시킨 바가 없으므로 전투가 벌어지자 처음부터 지휘는 혼란했다. 그리고 다른 장군들과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정신없는 가운데 안행진법으로 일본함대의 단종진을 맞이했다. 이리하여 북양수사의 우세는 전혀 발휘되지 못했고, 오히려 여러가지로 제약을 받게 되어, 전함은 각자 알아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함대의 진법은 북양함대를 가상적으로 하여 여러번의 모의훈련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동력이 있고, 적절하게 대응했다. 이외에, 정여창은 치원, 경원, 정원, 내원의 4척의 고속함을 별도편제하였, 단독의 유격함선으로 삼았다. 그런데, 다른 전함과 섞여 있다보니, 순양함의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각종 실책과 잘못으로 북양수사는 전투중에 5척의 전함을 잃고, 독자적인 군대로서의 면모를 상실했다. 일본군이 두려움을 느낀 정원, 진원의 두 전함은 아직 철갑이 무사했다. 만일 다시 깃발을 내걸고 싸워서 전기를 잡으면 여전히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여창은 다시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배를 몰고 항구로 들어가서 웅크리고 말았다.
9월말, 광서제는 다시 한번 이홍장에게 해군을 내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10월 중순, 이홍장은 전보명령을 통하여 정여창으로 하여금 정원, 진원등을 이끌고 위해여순일대로 나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정여창에게 "현재 배들을 모두 꼭꼭 숨기고 있는데, 뭐하자는 짓이냐?"고 질책한다.
10월 17일에서 27일까지, 일본군은 요동반도의 화원구로 상륙한다. 그리고 금주, 여순을 압박한다. 정여창은 이홍장에 내놓은 방식대로 일본군의 병력운송선을 습격하지 아니하고, 군함을 이끌고 위해위와 여순을 오가기만 한다. 이리하여 전방에서는 큰 압력을 받게 된다.
11월 12일, 일본군이 여순으로 진격한다. 정여창은 명을 받아 6척을 몰고 여순 항구로 간다. 그러나 그는 그저 전함을 여순항구의 바깥에서 9시간동안 관망만 했을 뿐, 수비장병들에 대하여 여하한 도움도 주지 않고 여순을 버리고 떠난다. 그리하여 여순을 지키던 병사들이 실망하게 되고, 결국 여순은 함락된다. 11월 16일, 조정은 진노한다. 정여창의 직무를 박탈하고, 경성을 붙잡아와서 죄를 묻고자 한다.
1895년 1월 22일, 일본군은 북양수사를 포위섬멸하는 발걸음의 첫단계를 시작한다. 산동으로 상륙하여, 영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위해위의 군항에있던 전함은 이미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지경이 된다. 1월 23일, 이홍장은 전통을 보내어 정여창에게 '만일 수사가 견디기 힘들다면, 아예 바다로 나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 혹시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철함을 연태로 물러나게 할 수는 있다'고 보낸다. 이는 아주 좋은 작전방안이다. 그러나, 정여창은 바다를 봉쇄한 일본함대와 정면으로 붙을 생각이 없었다. "해군이 패한다면, 연태로 물러날 수도 없다. 오로지 군함이 없다면 사람도 없는 것이다. 바다로 나가서 싸우라고 독촉을 하나, 바다로 나간다면 육군장병들이 더욱 실망할 것이니, 국면이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집행하지 않는다.
2월 17일, 이홍장은 다시 한번 정여창에게 "배를 이끌고 밤에 밀고나가서 남쪽 오송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정여창은 여전히 지휘를 듣지 않고, 그저 육군의 지원을 기다린다. 위해위 포대가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북양수사는 일본군의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정여창은 더이상 전기가 마련될 수 없다고 보고, 마유록(馬裕祿)과 협의한 후 일본군에 '협상'통지를 보낸다. 그리고 중국이 여러해동안 참담하게 경영해온 당시 세계 최첨단의 함대는 전멸하고 만다.
이상의 전쟁전개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여창은 해군을 지휘하거나 해상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고 적을 이길 담략이나 용기가 없었다. 그가 시종 전투를 회피하는 전략을 썼고, 적이 두려워 출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끔 적군과 부닥치더라도 지휘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그는 정확한 지시와 의견을 묵살했고, 전투시기를 계속 놓쳤으므로 결국 북양함대는 훼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정여창이 바로 청일전쟁해전 패배의 원흉이라고 할 것이다.
4. 북양수사전멸후, 정여창은 먼저 투항하고, 나중에 자진한다
이전에 정여창에게는 '애국장령' 혹은 '역대명장'의 칭호가 붙여졌는데, 이것은 바로 두 가지 소위 '사실' 때문이다.
첫째, 북양함대가 위급하 ㄹ때, 함상의 영미군관이 부하들을 책동하여 정여창에게 투항하도록 협박했으나, 정여창은 늠름하게 거절했다.
둘째, 정여창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민족기개'를 보존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자살순국'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의 부하와 영미군관은 제독의 이름으로 가짜 항서를 만들어서 북양수사를 일본에 넘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실제로, 정여창은 북양수사가 투항한 후에 죽었다. 그의 투항서는 테일러가 얘기한 것처럼 "제독의 이름을 빌려 항서를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정여창이 친히 만들었다. 그리고 음독시간도 투항전날(18일밤)이 아니라, 그가 제2차 투항서를 보낸 후(19일 여명전)이다.
정여창은 이토(伊東)이 투항에 동의하는 회신을 보낸 후, 다시 서신을 보내어, 투항일자를 늦춰주도록 요청한다. '광병'관가 정경광이 투항서를 가지고 떠나도록 한 후에 비로소 독약을 먹고 자진한 것이다. 여기에 무슨 '늠름하게 거절'했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항서를 조작했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이외에, 당시 정여창은 이미 조정에 의하여 삭탈관직된 상태에서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다시 일본군과 투항을 협의한다면, 죄가 가중되어, 죽음으로 책임을 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야 가족들의 연루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무슨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애국시인 황준헌이 '항장군가'에서 말한 것처럼, "이미 항복하고 다시 죽다니, 누구를 위하여 죽은 것인가?(已降復死死爲誰)"
실제로 광서제의 재위기간동안, 정여창은 비록 죽었지만, 계속 죄를 짊어진 상태였다. 광서제가 죽은 후에 원세개는 비로소 그의 죄책을 교묘하게 풀어준다. 이로써 볼 때, 정여창의 머리에 얹혀진 "애국장령"의 광환은 후세인들이 덧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정여창을 변호하기 위하여, 당시 진원함의 양방판이었던 미국인 McGiffin이 쓴 <<압록강밖의 해전>>을 든다:
"제독 정여창, 나는 그에게 깊고 침동한 애도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용감한 무사이며, 온화한 신사이다. 그는 잘못된 명에 따라 강적과 싸우다가 일패도지했다"
McGiffin은 글에서 정여창을 높이 평가했다. 비록 원숭이가 원숭이를 아쉬워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정여창이 먼저 투항한 후에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세가 기울자, 필생의 최후의 직책을 다하여, 휘하장수의 생명을 위하여 적과 약정을 체결했다. 이는 그 자신의 결정이다. 그는 일찌기 살고자 하였지만, 그는 조국이 불인(不仁)한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대한 냉혹한 대우는 불공대천의 적국보다 심할 것이다. 야밤에 외로운 등아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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