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화유산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후궁은 그저 황제의 후손을 잇기 위한 도구이며, 전례를 행할 때 곁에서 서 있는 역할을 할 뿐이었고, 자신의 의지나 개성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감히 봉건예절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고, 세속에 대하여 도전을 한, 강렬한 반항심리를 지닌 비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광서제의 진비인 타타라씨(他他拉氏)이다.
진비는 광서2년(1876년) 2월 초삼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흠이 없었으며, 오관이 단정하고 예뻤으며, 총명하고 영리했고, 성격도 밝았으며, 활발하고 움직이기를 좋아했으며, 호기심도 아주 강하였다. 광서14년(1888년), 13세인 진비는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입궁한 후, 진비는 황궁의 번잡한 예절과 똑같은 생활에 질렸고, 특히 궁중내의 암투와 모략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다. 이런 성격은 규칙도 많고 예절도 삼엄한 황군내에서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진비의 여러 행위는 중궁예법이나 후궁에 대한 요구조건에 부합하지 아니하였다.
광서제는 원래 몸이 허약했고, 병이 많았다. 오랫동은 유정병(遺精病)을 앓아와서, 기본적으로 성적 능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광서제는 혼인후, 1후2빈(一后二嬪)이 있었지만, 그녀들고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서태후의 질녀인 예허나라황후와는 잠자리를 피해왔다. 여러번의 궁중행사에서 그는 진비의 용모가 뛰어날 뿐아니라, 아주 영리하고 활발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광서제의 생부인 순친왕과 생모인 예허나라씨에 대하여 그녀는 아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번 단독으로 만난 후 그는 그녀가 취미범위도 넓을 뿐아니라, 행동거지도 속되지 않고, 성격도 명랑하며,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광서제는 진비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를 불러서 잠자리를 함께 하는 횟수가 증가하였다. 진비는 점차 광서제에게 있어서 지음(知音)이자 감정의 의지처가 되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진실한 사랑이 싹텄고, 백열화의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진비가 광서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궁황후는 광서황제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오히려 싫어하고 귀찮아하게 되었다. 수쳔년동안, 봉건사회의 황실에서 받들어온 것은 황후가 황제의 정처이고, 후궁을 주관하며, 비빈은 반드시 황후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비는 이를 무시했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했으며, 일부러 황후에게 잘보이려고 하거나 그녀의 말을 따르지도 않았다. 원래 황후는 진비가 매일 황제와 가까이 지내고 있고, 자신은 매일 독수공방하므로 원래 질투를 느끼고 있었는데, 진비의 이런 태도는 황후의 질투에 불을 부었다. 그리하여, 황후와 진비는 황궁내에서 점차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융후황후는 총애를 잃음으로써 질투가 생기고 질투는 다시 원한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분을 풀기 위하여, 그녀는 육궁을 통할하는 지위와 고모인 서태후의 신분을 활용했다. 자주 서태후에게 진비의 나쁜 점을 고했다.
진비의 반항과 특이함은 서태후와 황후가 모두 싫어하는 것이었고, 매번 진비를 괴롭혔다.
나이 겨우 십여세인 진비는 사진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진기를 사서는 자기의 침궁인 경인궁을 찍을 뿐아니라, 황제의 양심전과 그녀가 자주 가는 다른 곳도 찍었다. "자세를 신경쓰지 아니하고, 아무렇게나 입고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찍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찍게 했다. 동시에 그녀는 환관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찍게도 했다. 그녀는 사진찍는 것을 생활에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아쉽게도 진비가 찍은 사진은 한장도 남아 있지 않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비는 대(戴)씨성을 지닌 환관으로 하여금 동화문밖에 사진관을 열도록 하였고, 이 일이 황후에게 알려진 후, 다시 서태후에게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대씨성의 환관은 맞아죽고, 사진관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비는 8인교(八人轎)를 탈 수 없고, 4인교만 탈 수 있었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광서제는 특별히 진비에게 팔인교를 선물했다고 한다. 한번은 진비가 가마를 타는데, 서태후에게 발견되었고, 대로하여 가마를 부숴버리게 했다고 한다.
광서20년(1894년) 10월 10일, 서태후의 60회생신에, 관례에 따라 비빈들을 승급시켰다. 그리하여 이해 정월 초하루에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진빈(珍嬪)을 진비(珍妃)로 승급시켰다. 이번 승급은 분명히 서태후가 진비를 아껴서가 아니라, 자신의 60회생일을 기해서 모두 승진시키는데 따라서 승진한 것이었다.
광서21년(1895년) 진비는 책봉을 받는다. 각부원아문은 비빈의 승진책봉에 대한 의지를 받은 후, 책봉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한다. 당년10월이 되어, 준비사항은 기본적으로 마무리되고, 길일을 잡아, 책봉예식을 거행한다. 10월 29일, 서태후는 돌연 다른 사람들이 생각도 못한 의지를 반포한다: 진비를 귀인(貴人)으로 강등한다.
이일로 끝나지도 않았다. 다음 날, 서태후는 다시 두 건의 의지를 반포한다: 광서20년정월초하루, 서태후는 진비를 귀인으로 강급시키면서, 그에게 "개과자신(改過自新)"의 금패(禁牌)를 하도록 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진비를 귀인으로 강급시키기 전날,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때, 서태후는 얼굴을 굳이고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서제는 2시간을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결국 서태후는 아주 차갑고 무섭게 말하였다고 한다: "진비의 일을 네가 단속하지 않으면, 내가 관여하겠다. 그녀가 가법을 무너뜨리게 할 수 없고, 조정에 간여하게 할 수 없다. 가봐라!" 광서제는 무슨 일인지 몰랐고, 그저 알았다고 할 뿐이며, 예를 마치고 돌아와서 양심전에 왔다. 광서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태감이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새벽에 황태후가 총관태감 이연영에게 명을 내려, 진비에게 장(杖)을 때려 처벌했다고 합니다. 진비는 태감 고만지에게 서태후의 명을 받아 형을 받았습니다. 진비의 오빠인 지예(志銳)는 삭탈관직되고, 오리야수타이로 귀양갔습니다. 이 사건에서 먼저 관련된 진비의 수하인 태감이 수십명인데, 어떤 사람은 군에 끌려가고 어떤 사람은 죽임을 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진비를 모시던 궁녀도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서태후가 이번에 진비를 징벌한 것은 그저 경고를 위한 것이었다. 중대한 결과는 그 뒤에 나타난다. 사정의 경과는 역시 광서제의 유신변법에서 시작한다.
광서제와 한동안 같이 있다가, 진비는 광서제가 더 이상 허수아비로 남아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도 자신이 정사를 돌봐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단지 서태후로부터 장기간 압박을 받아 손 안에 권력이 없어서 큰 뜻을 펴지 못할 뿐이었다. 갑오청일전쟁에 패하고,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광서제는 강유위, 양계초등의 영향을 받아 유신정치를 하고자 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한다. 진비는 황제의 유신변법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그녀는 "황제당"의 주요한 구성원이었고, 황제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계책을 내놓았다. 특히 정신적으로 광서제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이 점은 서태후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결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광서24년(1898년) 8월, 서태후는 광서제를 중남해의 영대(瀛臺)에 감금한다. 동시에 변법을 지지했던 진비도 냉궁(冷宮)에 갇힌다.
광서26년(1900년) 7월 21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서태후는 광세제를 데리고 황급히 도망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떠나기 전에 태감 최옥귀(崔玉貴)에게 명하여, 진비를 녕수궁의 바깥에 있는 우물로 끌고 와서 우물에 그녀를 떨어뜨려 죽게 했다고 한다. 이 일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진비는 확실히 그 때 죽었다. 그 이후 청나라 황궁자료에는 진비에 관한 기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중에 어떤 태감의 회고에서 서태후가 진비를 죽인 광경을 기술했다. 진비의 죽음은 광서제에게 커다란 정신적 타격이었고, 커다란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광서제는 "수제(囚帝, 갇혀있는 황제)"로 지내는 동안 심정이 우울하고, 병이 더욱 심해져서 결국 서원(西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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