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야사(野史) 속의 이연영(李蓮英)

중은우시 2008. 6. 19. 12:54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정사(正史)를 읽는 틈틈이 야사(野史)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청나라말기의 역사를 읽다보면 대태감(大太監) 이연영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그는 세력을 부리고 권력을 농단했으나, 신분은 미천해서 정사에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반대로 야사에서는 각종 에피소드와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오화팔문(五花八門)으로 전해진다. 이연영이라는 사람은 그러다보니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연영에 관하여, 야사중에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은 3가지이다: 하나는 신세(身世), 하나는 원활(圓滑, 원만하고 매끄러운 처세), 하나는 사망(死亡)이다.

 

먼저 출신을 얘기해보자.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연영은 직예 하간(지금의 하북성 낭방시 대성현) 이가촌의 사람이다. 자는 영걸(靈杰)이고, 도호는 낙원(樂元)이다. 1848년(도광28년)에 태어났다. 이연영의 본명은 이영태(李英泰)로 가정배경을 보면 보통농민집안이다. 그의 묘지명과 청나라궁중자료를 보면, 이연영은 어려서부터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의 집에서 태감을 지냈다. 그 후에 단화의 집에서 궁중으로 옮긴다. 입궁전에는 이진희(李進喜)라고 불리웠는데, 나중에 서태후가 그의 이름을 이연영으로 바꾼다. 소문에 의하면, 이연영이라는 이름은 서태후가 동치원년의 여름에 친히 지어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이렇게 해석했다. "연(蓮)"은 연꽃이고, "영(英)"은 꽃부리이다. 그녀 자신은 노불야(老佛爺)로 살아있는 부처이니, 당연히 연화꽃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 의미는 이연영은 그녀를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 것이다.

 

이연영은 어려서부터 입궁하여 태감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묘지명에도 언급되어 있다. 당연히 묘지명도 좋은 말만 적고 껄끄로운 내용은 적지 않을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연영은 일찌기 입궁하는데는, 점쟁이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점쟁이는 "공문(空門. 절)에 들어가지 말고 황문(皇門)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전혀 다르게 얘기한다. <<만청외사>>에 따르면, "이연영은 직예 하간부 사람이다. 원래 무뢰한었고, 사사로이 유황을 거래하다가 감옥에 갇히었는데 나중에 빠져나왔다. 그 후에 직업을 바꾸어 가죽신발을 만들어 팔았는데, 지방사람들은 '피혁유황리(皮硝李)'라고 불렀다. 같은 고향사람으로 심옥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먼저 내시가 되었고, 나라씨(서태후)가 머리를 빗는 일을 맡길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연영을 불러서 심옥란은 그에게 머리빗는 법을 배우게 하였고, 기술을 익히자, 심옥란은 그를 나라씨에게 추천했고,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연영이 입궁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 <<노재소전>>은 더욱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간이라는 곳은 원래 태감을 많이 배출하는 곳이고, 이연영의 입궁은 바로 심옥란이라는 고향사람이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태후는 북경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머리양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궁중에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연영은 심옥란에게 그 말을 듣고는 바로 돈을 마련해서 기원에 가서 배웠고, 열심히 익혀서 며칠만에 완성했다. 그 후에 심옥란의 도움을 요청했고, 심옥란이 추천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태후의 머리빗는 태감이 되었으며, 이때투터 총애를 받게 된다. 

 

이런 내용은 널리 퍼져있지만, 의문을 품는 사람도 많다. 의문의 하나는 바로 이연영의 입궁연령에 있어서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그가 입궁하기 전에, 그 어린 나이로 어떻게 유황거래를 하다가 감옥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시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 되겠는가? 그러나, 야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간의 꺼리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합리적인 해석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 유황판매를 하고, 가죽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연영이 아니라 그의 부친일 것이다. 당시에 하간부에는 수공업이 발달했다. 그의 가정은 아마도 반농반수공업의 가정이었을 것이다. '피혁유황리(皮硝李)'라는 칭호는 그의 가정배경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해가 된다. 필자가 소학교에 다닐 때 우리 반에 있는 친구는 우리가 '소피장(小皮匠)'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그의 부친이 신발수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둘째, 새로운 머리모양을 배운 것에 대하여는 아마도 이연영이 궁에 들어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야사에서 나오는 문구를 주의해보면, "옥란이 달달방(房)에서 말해 주었다"는 것이 있는데, '달달방'은 바로 내시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다. 이연영이 무뢰한이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경비가 삼엄한 궁중으로 도망가려고 생각했겠는가?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바로 이연영이 궁안에서 그 소식을 들었고, 몰래 궁중을 빠져나가(이것은 가능하다) 머리빗는 기술을 익혔다고 보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중에 어떤 대신이 이연영을 탄핵하는데, 정식의 상소문에서까지 이연영을 "소비리(小李, 비는 참빗이라는 뜻임)"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우연이지는 않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원활'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이연영은 소두방(梳頭房, 머리빗는 내시들 부서)에서 총관으로 승진한 후, '권력이 조정을 뒤흔 들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수십년간 끄덕없었다. 여기에도 이유는 있다. 야사에 따르면, 이연영이 기민하고 원만하며 매끄러웠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술암비록>>에서는 "이연영은 사람됨이 기민하여 미리 서태후의 뜻을 알아차렸다." 서태후가 뭘 생각하는지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라면, 당연히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함풍제말년에, 어린 나이의 이연영이 서태후와 공친왕 혁흔 사이의 말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야사에는 여러가지 얘기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의 기민함과 업무처리능력을 알아볼 수 있다. 함풍제가 죽은 후, 서태후는 이연영이 물길러간 틈을 이용하여 승덕에서 북경까지 공친왕 혁흔에게 달려가서 말을 전해서, 정치동맹을 결성하게 하고 정변을 일으키며, 숙순을 우두머리로 한 '고명팔대신'을 무너뜨린다. 이 이야기는 기연해 선생이 CCTV의 백가강단에서 재미있게 얘기한 바 있다.

 

야사에는 또 이런 말도 전해진다. 이연영이 어떻게 서태후와 광서황제 사이를 잘 처리했는지. 어떻게 양쪽에 모두 잘 보이고, 양쪽의 환심을 샀는지. 예를 들면, <<덕종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를 보자. 서태후가 광서와 문무백관을 데리고 북경에서 도망쳐나온 후에 보정까지 가서 머물게 되었다. 서태후가 머무는 곳은 화려하고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이연영이 있는 곳이 그 다음으로 좋았다. 광서황제가 머무는 곳은 아주 엉망이었다. '황제의 침전은 아주 낡고 추웠다' 이연영은 서태후를 모시면서도 이 실권을 잃은 광서제를 보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황제의 침전으로 갔다' 그리고 광서제가 등앞에 고목나무처럼 앉아있고, 어린 태감 하나 곁에서 보살펴주고 있지 않았다. 물어보니 광서제에게는 덮을 이불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엄동설한이라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연영은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광서제의 발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저희들의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즉시 자기의 방에 준비되어 있던 요와 이불을 광서제에게 보내드렸다. 광서제는 북경으로 되돌아간 후 자주 서쪽으로 도망칠 때의 고난을 얘기했는데, 그 때마다 "이엄달(엄달은 유모란 뜻인데, 이연영을 가리킴)이 없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일을 보면, 이연영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의 퇴로를 하나 꼭 마련해두는 것이다. 그는 서태후의 신임을 깊게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황상은 황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만일 장래에 '황상이 친정'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한 줄기 퇴로를 마련해 둔 것이다. 야사는 또한 이연영이 정치에 많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의 생명과 집안을 보전하기 위한 기본원칙이었다. 서태후가 50년간 정권을 행사하면서도 그에 대한 은총은 바뀌지를 않았다.

 

이연영의 죽음에 대하여는 야사에 상세히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병사했다' 혹은 '그리하여 죽었다'는 정도의 말만 전해진다. 1908년 10월, 서태후가 죽었다. <<이씨가보>>에 의하면 '백일간의 장례기간이 끝나자, 궁을 나와서 노년을 보냈다" 이연영은 북경 면화후통에 있는 집에서 종일 채식을 하고 독경을 했으며,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3년후, 이연영이 죽는다. 이씨의 후손들에 의하면, 이연영은 병사한 것이다. 병인은 이질이 들어서 고치질 못했고, 결국 병이 난 후 3,4일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다만, 청사자료와 묘지명에서는 그냥 "운(殞, 죽다)"이라고만 적어서, 애매하게 표시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그의 죽음은 사람의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연유는 이렇다. 1966년 여름, 북경 '육일(六一)'학교의 조광지등 선생들은 혁명조반파의 감독하에 원래 청나라 은제장 태감의 묘소(은제장 태감묘소는 옹정제가 이름을 붙여준 것이며, 당시 황제는 은 만냥을 내서 만들어주었다. 이 곳에는 태감 2700여명이 묻혀 있다고 전해진다)의 이연영 묘를 파헤친다. 놀라운 일은 이연영의 관 안에 두개골만 있을 뿐, 다른 뼈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연영의 몸뚱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는 왜 머리와 몸이 따로 묻혔을까? 이 일에 대하여, CCTV의 탐색발견 프로그램에서는 상하 2편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여기서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두개골만 있고 시신은 없는 이연영이라면 절대 병사는 아니다. 유일한 해석이라면, 그는 타살된 것이라고 하여야 한다. 민간의 전설에서, 이연영이 피살되었다는 얘기도 많았다. 1985년, 퉁순(洵) 여사가 발표한 <<이연영사인의 수수께끼>>, 1990년, 북경문사연구관의 연구원인 안의민(顔儀民)이 <<종횡>>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이연영신수이처의 수수께끼>>가 나오면서 학술계의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연영은 도대체 누구에게 피살당한 것일까? 개괄하면 세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혁명당 사람이 죽였다는 것이다. 그가 서태후와 광서제의 투쟁과정에서 서태후를 지지했고, 황제당에 타격을 가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까지 얘기되고 있다. 다만, 반대하는 학자도 있다. 이연영은 조정내의 당파투쟁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당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궁에서 나간 지가 3년이 지났고, 정치에 영향력도 없는데, 그를 죽여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강조종(江朝宗)과 소덕장(小德張)이 죽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주로 안의민의 관점이다. 그는 심지어 글에서, 강조종의 아들이 제공한 '세부정황'까지도 공개했다. 당시 '구문제독'을 역임했던 강조종은 이연영을 식사에 초대하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어 북경의 후해(後海)에서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측은 강조종이 원세개의 심복이고, 소덕장은 이연영의 후임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목적에서 이연영을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연영은 이전에 원세개의 미움을 받았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심복에게 암시를 주어 죽였을 수는 있다. 그리고 소덕장은 그의 유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살인동기가 생겨났을 수가 있다. 다만, 이 설에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나타났다. 어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강조종은 선통2년(1910년)에 섬서 한중진의 총병으로 부임했고, 1912년(민국2년)에야 북경으로 되돌아와 북양정부의 북경위수사령관을 맡았다. 강조종이 수천리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이연영을 죽인다는 말인가? 동시에 어떤 사람은 소덕장과 이연영은 함께 무슨 사업을 한 것도 없고, 이해충돌이 있을 일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살인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또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살인을 한다면 당연히 수급(머리)를 가지고 갈 것인데, 왜 머리를 놔두고 몸뚱이를 들고 갔겠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산동으로 가서 채무를 받아내려다가 비적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도 여러 전문가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이연영의 재산이나 지위로 볼 때, 그가 친히 집을 나서서 돈달라고 할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새로운 설을 내세운다. 그들은 이연영에게 조카손녀가 있었는데, 산동성 무체현(無縣)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는 일찌기 산동으로 조카손녀를 만나러 갔는데, 가는 길에 태산을 구경하고자 한다. 산동과 하북의 경계지점을 지나다가 비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그를 따르든 두 시종은 놀라서 이연영의 머리만 둘둘 말아가지고 북경으로 돌아간다. 이 주장과 비슷한 주장도 있다. 이연영이 출궁하여 은거한 후에도 집을 나설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서태후에 대하여는 은혜를 잊지 못하여, 매년 동릉에 가서 서태후의 능을 참배했다. 그런데 도중에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그의 수급은 누군가가 이연영의 집앞에 던져 놓았다.

 

이들 전설과 주장들을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연영이 타살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병사하였다는 것은 그냥 가족들의 말일 뿐이어서 믿기 어렵다. 둘째, 이연영은 원한을 가진 자에 의하여 죽었다. 이연영이 원만하고 매끄러웠으며 기민했지만, 그래도 원수는 적지 않았다. 권력이

조정을 뒤흔들 사람이면 분명히 다른 사람의 시신을 밟고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할 것이다. 즉,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이 당시에 감국으로 섭정을 했는데,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게도 살해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바로 이연영이 광서제를 독살하였다고 말했고, 형의 원수를 갚는 것은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비적이 죽였다는 설은 조금은 억지로 보인다. 셋째, 이연영이 피살된 지점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살인자가 이연영의 수급을 집에 돌려주었을 것이다. 이씨집안 사람들은 시신은 찾지 못하고 그저 수급만을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연영은 생전에 영화부귀를 누렸고, 죽은 후에도 잘 매장되었다. 묘앞에는 "대중지정공고천추(大中至正鞏固千秋)"라는 대련도 있고, "식종지전등어원훈(飾終之典等於元勳)"이라는 비문도 있다. 다만, 그의 두개골은 파내어진 후에 학생들이 축구공처럼 차고 놀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교의 똥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후 어느 날, 이연영의 묘를 파헤쳤던 바로 그 사람, 북경육일학교 선생인 조광지는 똥구덩이에서 두개골을 건져내서 산자락에 묻어준다. 이후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른다. 조광지가 이렇게 한 것은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불공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