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부국용(傅國涌)
일찌기 18,19세기에 러시아의 지식인은 이미 매우 강대한 지식인역량을 갖추었고, 독립적인 지식인전통을 형성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전통적인 선비에서 근대적 지식인으로 전환하는 것이 러시아에서는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중국의 이 전환은 시작도 늦었을 뿐아니라, 오랫동안 중단되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감히 전환이 이미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자주 생각한다. 중국의 지식인의 전환은 무술변법시기를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주로 이 몇 사람이 대표적이다.
첫째는 장건(張謇)이다. 그는 1894년 즉, 청일전쟁(갑오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과거에 장원(狀元) 급제한다. 나이는 이미 41살이었다. 민족의 위기상황하에서 그는 고향인 강소성 남통에서 실업구국(實業救國)의 길을 걷는다. 무술변법때, 이미 그가 대생사창(大生絲廠)을 시작한 지 4년째였다. 다음 해, 그는 많은 상상할 수 없는 곤란을 극복한 후, 마침내 제사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하였다. 모든 것이 하찬게 여겨지고, 글읽는 것만이 고귀하게 여겨질 때, 사농공상에서 '상'이 여전히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는 한림(翰林)의 신분을 버리고 사상유례없이 실업가의 길을 걷는다. 이것은 분명히 아주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채원배(蔡元培)이다. 1892년, 그는 2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그는 유신변법사상에 동의하였지만, 강유위의 성급한 방식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중국은 땅덩이가 크고, 누적된 병폐가 많으므로, 근본적으로 인재를 배양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저 황상의 몇 가지 조서로 해결되는 문제라고 보는 것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그는 연루되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해 9월에 한림원을 떠난다. 관직을 사임하고 남하하여, 교욕구국(敎育救國)의 길을 걷는다. 먼저 소흥에서 나중에는 상해로 가서 그의 근대학교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중국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교육가가 되었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셋째는 장원제(張元濟)이다. 그는 채원배와 마찬가지로 절강사람이고,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무술변법의 100일간, 그는 광서제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그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영원히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남하하여 다른 길을 찾는다. 그에게는 좋은 모친이 있었다. 그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아들아. 자식이 있으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관직을 갖지 않으면 일신이 가벼운 법이다" 몇년후 그는 상해에서 출판업을 시작하고,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을 중국출판업계의 항공모함으로 키운다. 출판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그는 호풍환우하고 새로운 천지를 개척한다.
이들 외에 또 한 사람을 추가할 수 있다. 넷째는 바로 신문을 만든 왕강년(汪康年)이다. 그는 채원배, 장원제와 함께 1989년에 함께 거인(擧人)이 되었고, 189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출신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신문인의 길을 걷는다. 1896년에 영향력이 컸던 <<시무보(時務報)>>를 창간하고, 나중에 <<중외일보(中外日報)>>, <<경보(京報)>>, <<추언보(芻言報)>>를 창간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공명을 얻었던 사람들이다. 즉, 구시대의 선비들인데, 마침내 이들은 "학문을 완성하면 제왕의 집에서 일한다"는 천년이상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실업, 교육, 출판, 신문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연다. 더이상 관직이라는 외다리길에서, 관료의 길을 유일한 목표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이들의 이러한 다원적인 선택에서 우리는 근대의 서광을 볼 수 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장건과 같은 인물이 어두운 깊은 밤에서 뛰쳐나와서, 머리는 여전히 변발을 한 채로, 입으로는 여전히 자왈(子曰) 시운(詩云)을 말하면서, 외국어도 모르고, 당시에 아직 더 넓은 외부세계를 보지도 못했지만, 그들은 말그대로 모던(Modern)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신인(新人)'이었다. 그들의 등장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사가 중국에서 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그들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비들(당시 그리고 이후)은 본받을만한 대상이 생긴 것이고, 점차 새로운 기풍을 형성했다. 사회진보는 기풍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기풍의 형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 시퍼렇게 살아움직이는 모던인물이 모범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100여년전에, 장건이라는 인물이 변발을 휘날리며 남통 땅에서 공장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고 사회사업을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든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향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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