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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우리는 북양군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by 중은우시 2007. 12. 11.

글: 조세룡(趙世龍)

 

이오(李敖)가 북경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양(군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의아해 했을 것이다.

 

이 말의 표면적으로는 오늘날 너와 내가 서 있는 이 북경대학이라는 곳이 북양시기에 건립된 것이고, 백년북경대학의 역사중에서 가장 휘황한 때가 채원배가 교장을 맡고 있던 그 겸용병포의 시대가 아니냐. 백년동안 언론자유가 그때만 한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층적으로는 근현대역사의 더 많은 진면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수십년간 계속 정치적인 세뇌를 당해온 대륙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소위 북양(北洋)이라는 것은 청나라말기에 상군(湘軍)에서 시작하여 이후 회군(淮軍)의 독자세력을 갖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장악하고 있던 해군육군의 체계를 말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국군대의 절반을 장악했다. 그래서 진정한 북양군인이라 함은 중국의 1840년아편전쟁이래로 치욕을 받아온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국가존망과 민족대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굴욕을 맛보면서 피와 총탄을 친히 겪어온 사람들이다.

 

그 후에 특히 청일전쟁(갑오전쟁)을 시작으로 팔국연합군(일본포함)이 북경을 점령하고, 나중에 일본이 한걸음한걸음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북양군인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며, 온몸으로 일반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 집단은 이후의 정치군사집단중에서 민족기개가 가장 높고, 매국노를 가장 적게 배출한 군정집단이 된다.

 

19세기말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일본은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본떠 "이화제화(以華制華)"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리하여 북양군벌의 대표적인 인물은 그들이 포섭하고자 하는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도 못하게 역사에 명성도 그다지 좋지 않은 이들 "거친 중국군인"들은 일본인들의 포섭에 응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홍장이후 북양의 우두머리는 원세개(袁世凱)이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초기의 원세개는 진정한 항일영웅이었다. 그는 1882년, 오장경(吳長慶)의 경군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이 암중조종한 반란을 평정했다. 이후 청정부에서 조선에 파견한 감국으로 지내던 12년동안 일찌기 신군을 훈련시켜 일본군사력의 진입을 막았고, 과감하게 일본인들이 조종한 2차례의 반란을 평정했으며, 중국의 국가주권과 정치이익을 지켜냈다. 이로 인하여 원세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의 국세는 원세개가 없이는 안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 항거하는 최전선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원세개의 역사적인 죄악은 "유신을 배반하고" "21조"와 "복벽하여 황제를 칭한" 데 있다. 무슨 목적에 의한 것이든 영국식 입헌군주제였던, 일본식 실질군주제였던, 복벽하여 황제를 칭한 것은 역사의 반동이다. 이는 혁명당 사람들로부터 격렬하게 공격받고 심지어 원세개토벌운동이 일어나고, 결국 그의 세력이 신속히 와해된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한다면, 중국은 봉건시대 수천년을 지냈는데 한꺼번에 현대사회로 들어선다면 너무 급진적이지 않은가. 원세개의 군주입헌(홍헌제제)의 점진적인 사회변혁은 격렬한 유혈혁명보다 못한 방식인가? 원세개가 "유신을 배반"하였다는 학설은 사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중이다. "21조"를 체결한 것은 약소국으로서 외교력이 약했던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 "21조"를 연구한 사람들에 의하면 아무런 방법이 없는 상황하에서 그래도 온갖 힘을 다해서 국가주권을 다소간 지켜낸 것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당시 아무 방법이 없었던 원세개의 북양은 그저 몰래 조병균을 서양대사관으로 들여보내, 일본이 강제로 체결하게 하려던 "21조"의 내용을 공개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각자의 이익에 기하여 간여하도록 만들었으며, 국내외의 여론을 일으켜서, 중국이 적지 않는 국가이익을 지켜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 죽기 전까지도 그 치욕을 잊지 않고 국가의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국부인 손중산은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아 혁명을 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일본과 "21조"보다 더 심하게 국권을 훼손시키는 "손씨21조"를 체결해서, 동북삼성의 이익을 팔아먹었다. 이는 나중에 일본이 "9.18"사변때 동북이 함락되었지만, 국민당정부가 감히 공개적으로 응전하지 못한 이유가 된다.

 

3년8개월동안 중화민국대총통의 지위에 있던 서세창(徐世昌)은 퇴임후 집안에 은거중이었다. "7.7사변"이후 매국노인 왕극민은 사제간의 연분을 들어 방문했다. 그는 일본의 지시를 받고 서세창을 회유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서세창은 그가 온 뜻을 확실히 알았었고, "나는 이런 제자가 없다"고 선포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매국노 조여림도 마찬가지로 설득하려 하였고, 만일 서세창이 나서서 일본과 친선조약을 체결하면, 일본은 즉시 퇴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세창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한다. 조여림이 떠난 후 서세창은 집안 사람들에게 "다음에 조여림이 오면, 나는 집에 없다고 말해라"고 한다.

 

1938년, 일본군 사단장 판원(板垣)과 특무기관장인 토비원(土肥原)이 서세창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서세창은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일본측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서세창의 두 제자를 보내어 설득하고자 하였다. 김(金)씨성을 가진 제자가 스승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회유하자, 서세창은 처음에는 나이가 많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넌 너무 멍청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 김씨성의 제자는 "스승님이 멍청한 겁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서세창은 제자의 불손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또 이런 경우를 당하는구나"하고는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윗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단기서(段祺瑞)에 대하여도 일본군에서는 그를 협력자명단에 넣고, 그에게 화북친일정권의 우두머리를 맡기려 하였다. 중국에 영향력있는 전임국가지도자가 일본에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개석은 친필서신을 써서 단기서에게 남하를 간청했다.

 

69세의 단기서가 남경포구에 도착한 후 당시 남경에 있던 소장이상의 장군들이 모두 강으로 나가 그를 영접했다. 장개석도 친히 부두에 나가 그를 맞이했다. 단기서는 즉석에서 기자들에게 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지금은 함께 국난을 극복해야 할 때이다. 정부는 이미 이를 방어할 전체적인 방침과 방법을 마련했으니, 조야를 막론하고 다 함께 도와주자. 본인은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국민의 뒤를 따르겠다" 단기서는 남경에서 상해로 이주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횡포한 행위는 이미 도저히 이치로 생각할 수 있는 지경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상하가 일심동체가 되어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구하라'는 말이 있듯이 전국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하여 합심하여 대응한다면, 비록 열개의 일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뭐가 무섭겠는가?"

 

조곤(曹)은 북양의 역사에서 원세개를 제외하고는 명성이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22년 6월 부하인 오패부(吳佩浮)와 함께, 환계(係)의 총통 서세창을 몰아냈다. 다음 해에 다시 여원홍(黎元洪)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1350만위안의 뇌물을 들여 총통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리하여 뇌물총통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1937년 노구교사변이후 화북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조곤의 부하들은 줄줄이 일본편에 섰고, 친일정권의 요직을 맡았다. 일본침략자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조곤으로 하여금 화북친일정권의 수령에 오르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곤은 차라리 멀건 죽을 먹을 지언정 일본인을 위하여 일하지는 않겠다고 맹서를 하게 된다.

 

일본인은 그가 거절하자, 당시 친일 "화북치안군"의 총사령관인 제섭원(齊燮元)을 보냈다. 그러나 조곤부부는 그를 문밖에 두고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하북성 성장인 고릉울(高凌蔚)이 일본군의 종용하에 그를 방문했다. 조곤은 그를 보자, 얼굴색이 변해서 소리쳤다: "당장 꺼져라. 이후 다시는 조씨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고릉울은 할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다른 북양인물인 오패부는 "2.7참변"에서 공산당인 시양, 임상겸을 살해했다. 이로부터 1949년이후의 대륙공식역사서에서 그는 악명을 떨친 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교과서에서도 일률적으로 그를 반동군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동군벌도, 소련이 비밀해제한 기록에 따르면, 소련이 손중산과 국민당공산당의 양당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사람이 바로 그였다고 나온다. 일찌기 측량을 배워 사관학교를 졸업한 오패부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이 조종하는 허수아비정부를 그로 하여금 구성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인들을 미워했다. "2.7참안"이 발생하자 그는 정치사상과 노선에서 길을 달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표시했다. 나중에 북양정부가 소련대사관을 수색하여 이대쇠(李大釗)를 체포하였고, 러시아가 심어놓은 방대한 친소련계세력과 중국당시정권을 전복하려는 계획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오패부에게서 볼 수 있는 민족독립과 외족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의식은 나중에 모택동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중소관계악화와 국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1938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화북, 화중, 화남을 석권했다. 일본인들은 당시 항일영수인 장개석과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꼽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국민당의 제2인자였던 왕정위이고, 다른 한 사람이 일찌기 100만대군을 이끌었던 오패부였다. 일본인들은 괴뢰정권을 세우고자 하였고, 남북에 일문일무(一文一武)의 "왕오합작(汪吳合作)"을 이루고자 하였다. 최종적으로 왕정위는 일본의 권유에 넘어가서, 중경에서 하노이로 도망쳐서 중경정부와 결렬을 선언하고, 나중에 남경에 왕정위괴뢰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오패부는 여전히 일본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일본이 동북을 포함한 모든 중국영토에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파견한 사람은 대백통정(大伯通貞)이었다. 그는 명을 받고 북경으로 가서 오패부를 만났다. 오패부에게 "흥아(興亞)"의 대임을 맡아달라고 했다. 오패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동방의 로렌스'라고 불리우던 일본특무대장 토비원(土肥原)을 보냈다. 토비원은 세번이나 오패부를 만나서 설득하려 했지만, 모두 오패부의 교묘한 언번에 휘말려 거절당한다.

 

일본인들과 겉으로 교섭하는 와중에 그는 일찌기 옛부하들에게 명하여 하남개봉일대에 모이도록 하였고, 산동경내에서도 병사를 모아서, 소위 "황협군"을 개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부대는 나중에 전체 부대가 사라져서 부대편제 그대로 중경정부에 흡수되었다.

 

분노가 교차하는 일본군은 결국 손을 썼다. 오패부가 사소한 치통을 치료하는 틈을 타서, 손을 썼는데, 오패부는 아주 의문스럽게 "치료"를 받은지 10일만에 사망한다. 사람들은 이때에 비로소 오패부의 고충을 이해했다. 국민정부는 오패부를 1급상장에 추존했고, 당시의 신문들도 "중국군인의 모범"이라고 칭송했다.

 

동북지방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노린 사람은 동북왕 장작림(張作霖)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장작림이 일본인과의 술자리에 참석했을 때, 한 일본의 명사가 녹림출신이고 글을 잘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장작림에게 글을 한 자 써달라고 고의로 부탁했다. 장작림은 붓을 들어 크게 "호(虎)"자를 쓴 후 옆에 "장작림수흑(張作霖手黑)"이라고 적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이 장작림에게 귓말로 "대원수께서 쓰셨으니 '수묵(手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흙토(土)자가 빠졌습니다" 그러자, 장작림이 그 기회를 붙잡아 욕을 했다. "멍청한 놈! 어르신이 묵(墨)자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느냐? 이것은 '촌토불양(寸土不讓, 조그만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는다)'이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 동북을 점령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손을 약간 더럽혀도(黑) 되지 않겠는가?"

 

대원수부의 전보처 처장인 주대문(周大文)은 나중에 이렇게 글을 쓴 바 있다: 1928년 5월 17일, 일본 주중국공사 방택겸길(芳澤謙吉)이 장작림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장작림은 그를 객청에서 기다리게 하면서, 다른 방에서 큰 소리로 "일본인은 기회만 잡으면 빼앗아내려고 한다...나도 나라를 팔아먹을 권리가 엇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할 것이다. 후손들도 모두 욕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짓은 할 수가 없다"

 

일본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황고돈에서 폭약으로 죽여버리게 된다. 그의 멍청한 아들 장학량도 몸에 약간은 북양군인의 피가 남았는지, 나중에 수하를 이끌고 국민정부에 가담한다.

 

북양의 구식군인은 하나하나 혈기방장한 사람들이면서, 행동으로 중국인들과 역사에 답안을 제공했다. 북양시기는 중국백년에서 유일한 짧은 공화헌정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