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명(張鳴)
북양삼걸(北洋三杰)로 불리는 용(龍), 호(虎), 구(狗)는 각각 왕사진(王士珍), 단기서(段琪瑞), 풍국장(馮國璋)을 말한다.
왕사진을 용(龍)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그의 "신룡현수불현미(神龍見首不見尾, 신룡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다)" 혹은 "장두로미(藏頭露尾, 머리는 감추고 꼬리는 내민다)"한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양군벌에서 성벽의 깃발이 매번 바뀌는 상황하에서 그는 항상 누가 정권을 잡든지 계속 그의 일을 해왔고, 자신의 주장도 없고, 어느 한 곳에 섞이지도 않았다. 이처럼 용(龍)은 스스로를 국면의 바깥에 두었다.
그러나, 호(虎)와 구(狗)의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북양군벌내의 직계(直系)와 환계(皖系)의 다툼이 그것이다. 전반기에는 풍국장과 단기서가 명쟁암투를 벌였다. 다만, 호랑이와 개의 사이에는 실력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여, 진짜로 싸운다면 싸울 수가 없었고,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둘 간에 마음 속으로 못마땅한 점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면을 몰수하지는 않았었다.
풍국장을 북양삼걸중의 개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북양군벌이라는 글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은 무리중에서 문장으로 따지면 그는 수재이다. 그리고 군에 들어온 이후에도 북양무비학당에 있을 때 과거에 합격한 수재였다. 이홍장은 그를 가리켜 "무관학교에서 문사가 나다니..."라고 감탄한 바 있다. 청나라 말기에 무관자격시험이 있었는데, 단기서는 여러번 시험을 쳤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공인 원세개가 관계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풍국장은 그렇지 않았다. 북양군벌은 핵심부대이기는 했지만, 신해혁명이전까지 진정으로 전투를 벌여본 적은 없다. 겨우 의화단과 약간 싸워본 정도이다. 무창의거이구 실전의 기회가 왔고, 남하작전에서 제2군의 군통인 단기서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고, 풍국장으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출정하도록 했다. 주공인 원세개가 나서서 조정한 끝에 풍국장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서 한구와 한양을 연이어 접수했고, 무한삼진중에서 겨우 1개 진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원세개가 혁명당 사람들과 담판을 벌여서 총통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아주 견실한 기초를 놓아준 것이었다.
문, 무의 두 측면에 모두 재주가 있던 풍국장은 그러나 항상 단기서를 당하지 못했다. 문의 측면에서 시험을 통과못한 단기서는 그러나 독일에 유학을 갔고, 귀국한 이후에 북양계열의 모든 군사학교를 장악했으며, 북양군벌내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자랑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군관학교를 졸업한 모든 장교는 그의 학생인 셈이다. 옛사람들이 말하는 "오달존(五達尊)"인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 하늘, 땅, 임금, 부친, 스승)중에서 단기서는 하나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무의 측면에서 전공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싸움은 마친 것이다. 이전에 전공이 있기는 했지만, 나중에 공화국을 건립하게 되면서 혁명당사람들에게는 욕먹는 짓이 되었고, 북양군벌내에서도 꺼내기가 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가만히 있다가 전보를 보내서 승리를 알리고, 먼저 나서서 소리친 단기서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단기서의 공로로 세번 공화(共和)체제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건이다. 특히 풍국장은 전투를 마친 후 바로 전속되어 황제금군의 통령이 되었으며,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북양군벌내부에서 원세개를 총통으로 옹립하는데 그의 공은 크다고 할 수 없었다.
혁명후, 원씨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바빴다. 단기서와 왕사진은 가장 두터운 전리품을 받았다. 한 명은 육군총장, 다른 한명은 총참모장이 되었따. 그러나 이때 풍국장이 가장 신경썼던 것은 어떻게 자기 휘하의 원 황제금군을 배치하느냐는 점이었다. 어디에 두더라도 안심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해산은 원하지 않았다. 결국 기본적으로 팔기로 구성된 이 부대를 데리고 남경으로 갔다(이후 풍국장은 전투는 할 줄도 모르지만, 먹고 노는 것은 잘 하는 이 부대는 풍국장의 골치덩이가 되어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다). 말로는 그가 원세개를 위하여 동남을 지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중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이후 원세개조차 그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황제에 오르기를 준비하기 전에, 일부러 찾아와서 탐색하던 풍국장에게 원세개는 절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풍국장이 남경으로 돌아간 후 만나는 사람마다 황제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동안에, 북경에서는 이미 등극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세개가 죽은 후, 단기서는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장훈의 복벽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기서는 "재조공화"의 영웅이 되었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바로 이 때, 풍국장과 그의 옛친구인 단기서간에 마찰이 생긴다. 단기서는 일심으로 그의 주공이 완성하지 못한 대업을 완성하고자 하며, 남방의 비북양계의 군벌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무력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이때 이미 부총통의 신분으로 북경에 돌아와 대리총통직에 있던 풍국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단기서를 당할 수 없었던 풍국장은 자기의 의견을 적절히 발표할 수조차 없었다. 매번 단기서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남방을 토벌하는 명령에 총통도장을 찍어야만 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단기서의 병사들이었다. 바보짓을 하지 않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계책을 냈다. 자기가 친히 남정에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자기의 근위대를 데리고(즉, 예전의 황제금군), 기차를 타고 남하했다. 실제로 그는 금선탈각지계를 쓴 것이다. 이 기회에 자기의 근거지인 남경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단기서를 속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강소성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단기서는 밀명을 내려 안휘군벌인 예사충으로 하여금 기차를 멈추게 하였다. 풍국장은 수하를 데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들로는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경을 눈앞에 보고서도 풍국장은 조용히 북경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는 철저하게 단기서의 "포로"가 되었다.
총통의 위치에서 풍국장이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중남해의 물을 뽑아내서 안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팔라고 하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풍국장이 이 일을 벌인 것은 명청시대의 황제가 방생한 물고기는 금패를 걸고 있는데, 풍국장이 이런 금을 노린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러나, 금은 무게가 있는데, 어찌 물고기의 목에 걸려 있을 수 있겠는가? 금덩이를 목에 걸고 물고기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수백년 죽지 않을 수 있는 물고기가 있기나 하겠는가? 물고기가 죽은 후에 금덩이를 남긴다고 하더라도 진흙 속에 파묻혀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재물을 탐내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정상적인 연못정리작업이었을 것이다. 큰 일을 할 수 없으니 작은 일이라도 벌인 것일텐데, 일을 벌이자 마자 골치가 아팠다. 당시에는 정부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여론에서는 나쁘게 말하는 상황이었다.
불행한 일은 이번 물을 뽑고 물고기를 잡은 일에 대하여 여론이 비등했을 뿐아니라, 항간에는 한가지 요리까지 나왔다. 총통어(總統魚)라는 것인데, 동파육과 함께 올린다고 한다. 일시간에 북경의 식당에서는 식객들이 총통어를 먹으면서 총통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물고기를 잡은 후에 왠 일인지 북경에 가뭄이 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총통이 물고기를 잡아버리는 바람에 용왕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떠들었다. 풍국장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가뭄이 들었고, 백성들에게 욕은 얻어먹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가뭄이 들면, 황제가 사람을 흑룡담에 보내어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풍국장은 건의하는대로 사람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약간의 정부관리와 백운관의 늙은 도사들이 이렇게 한 후에 며칠이 지나자 비가 과연 내렸다. 비가 풍국장이 기원해서 내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인지 몰랐지만. 매체는 또 다시 봉건, 미신, 도사를 비웃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하여 외부인이 보기에는 북양의 개와 북양의 호랑이간의 다툼이다. 개가 짖은 것이다. 짖는 개를 호랑이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이어진 총통선거때 단기서는 안복구락부를 조직해서, 원세개의 예전 심복인 서세창을 내세웠다. 풍국장은 어쩔 수 없이 하북 하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은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지경이 되어서 서세창을 그에게 그래도 한번 잘 대해 주었다. 이전의 금군에서 개편된 육군 제15, 16사단을 전총통 풍국장의 휘하에 두도록 해준 것이다. 자기 근거지로 돌아갈 수 없는 풍국장에게 군대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 늙은 군인들을 데려가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세창이나 단기서의 취지는 하나였다. 이 늙은 군인들의 부대를 계속하여 풍국장에게 붙여둠으로써 그의 부담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난다. 1918년에 풍국장이 은퇴하고 다름 해에 이들 노병들의 급여문제로 북경과 천진을 뻔질나게 드나들다가 풍한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다. 향년 60세이며, 북양삼걸중에서 수명이 가장 짧은 사람이 되었다.
죽은 풍국장에 대하여, 여론은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만련을 한 개 만들었다.
남해어안재(南海魚安在) : 남해(중남해)의 물고기는 어디에 있는가
북양구이무(北洋狗已無) : 북양의 개(풍국장)은 이미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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