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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민국초기 부잣집 딸과 종의 슬픈 사랑이야기

by 중은우시 2009. 1. 4.

 

 

 

글: 곽덕영(郭德榮)

 

1920년대말, 상해중상연공사에서는 "황혜여(黃慧如)"라는 상표의 담배를 내놓은 적이 있다. 이 회사는 황혜여사건이 난 후 상해상표국에 재빨리 등록하여, "황혜여"를 자기 회사의 전용상표로 삼았다. 이 담배는 상해에 나오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을 몰고왔고, 판매가 아주 잘되었다. 그때의 상해탄에서는 고관귀족이건 평민백성이건 아니면 판부주졸(販夫走卒)이건 앞다투어 "황혜여"표 담배를 사서 피웠다. 자주 피우는 사람도 사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도 샀다. 남자도 사고 여자도 샀다. 일시에 공급이 달리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원래 "황혜여"표 담배의 배후에는 남다른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민국시대에 유명한 여배우 호접(蝴蝶)이 <<혈루황화(血淚黃花)>>라는 영화에 주연을 맡은 바 있는데, 이 영화는 남경, 상해, 항주 일대를 풍미했고, 아주 높은 입장료수입을 올렸다. 항간에서 의론이 분분했던 이유는, 영화 자체가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이 있었다. 바로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제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부잣집 딸인 황혜여는 자신의 신분을 무시하고 집안의 종인 육근영(陸根榮)과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세상을 놀라고 안타깝게 하였다.

 

원래, 황혜여는 명문집안출신의 대갓집 규수였다. 상해계명(啓明)여자중학을 졸업했다. 부친은 일찌기 북경전화국국장을 지낸 바 있었고, 집안 재산이 상당히 많았다. 부친이 병사한 후, 황씨집안은 남쪽으로 옮겨와서 상해의 춘평방(春平坊)에 거주한다.

 

1927년, 황혜여는 이미 21살이 되어서 집안에서 시집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용모도 예쁘고 기품도 고아하여 활짝 핀 복숭아꽃과 같았다. 불행한 것은 그녀의 혼인이 오빠의 반대로 마음에 두었던 남자와 결혼에 이르지 못해다는 점이다. 이후, 황혜여는 희망을 잃고, 곡기도 끊고, 하루종일 방안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 모양을 보고 모친과 오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어, 집안의 종인 육근영을 보내서 설득하게 한다. 육근영은 원래 황혜여와 나이도 가고, 용모도 단정하고, 사람도 부지런하고 후덕했다. 그리하여 황씨집안에서 아주 신임했다. 황혜여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황혜여와 육근영은 애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몸을 허락하여, 황혜여가 임신하기에 이른다. 다음 해 봄이 되어 두 사람의 밀애를 황씨집안사람들이 발견한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소주로 보내어 잠시 거주하게 한다.

 

1928년의 여름, 아침의 이슬은 약간 서늘했고, 소주항주의 부자들은 게으름을 피우는 계절이었다. 6월 13일,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모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위층으로 가서 식사하도록 황혜여를 부르러 갔다. 그런데, 올라가보니 문이 닫혀 있지 않았다. 들어가보니, 집안은 이미 어지러워져 있었고, 집안에 돈되는 돈과 금붙이등은 딸과 함께 사라졌다. 황혜여의 모친은 금방 깨달았다. 딸은 분명 집안의 남자 종과 도망간 것이라고. 딸을 하루빨리 찾아내기 위하여, 황혜여의 가족은 즉시 경찰에 신고한다: "남자종 육근영이 집안 재물을 훔치고, 황혜여를 유괴했다"고.

 

신고후 팔일째 되는 날 경찰은 신고를 받아 행적이 수상한 두 명의 동거자를 붙잡는다. 이 자가 바로 육근영이었다. 강소고등법원은 신속히 사건을 처리하는데, 사실내용을 깊이 확인하지도 않고, "간음유괴죄"로 그를 감옥에 가둔다. 황혜여는 할 수 없이 임신6개월의 몸을 이끌고, 갈 곳이 없어, 육근영의 오현에 있는 고향집으로 간다. 육근영의 집에서 황혜여는 고생을 많이 겪지만, 그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육근영이 돌아와서 함께 살 그 날을 기다렸다.

 

1929년 3월 8일, 황혜여는 병원에서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후, 배를 타고 양징호를 거쳐 상해로 돌아온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그녀는 몸이 허약해져서 3월 19일, 그만 배 안에서 병사한다. 며칠 후, 강소고등법원은 육근영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유감인 것은 황혜여가 이 날까지 기다려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혜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사람들은 속속 황씨집안으로 몰려들어 추궁했다. 춘평방은 물샐틈없이 사람들로 포위된다. 많았을 때는 5,6천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감히 봉건예속을 타파하고 자유혼인과 행복을 추구한 여인을 동정하고 추도했다. 홍안박명(紅顔薄命), 향소옥운(香消玉殞)이후 비록 역사에 묻혀버렸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한 한줄기 그리움은 완전히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버전에서는 황혜여가 당시에 죽지 않고, 육근영과 다시 만난 후 비밀리에 숨어버렸다고 한다. 지금, 상해의 노인은 "황혜여표" 담배를 얘기할 때마다 애통한 심정으로 이 사랑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그들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결말을 오히려 좋아하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