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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조야나희(曹野那姬) : 당현종(唐玄宗)의 외국인 희첩(姬妾)

by 중은우시 2008. 2. 12.

작자: 미상

 

당현종에게 외국인 희첩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개원, 천보연간에 "후궁가려삼천인"중에는 중앙아시아 조국(曹國)에서 온 외국여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조야나희"였고, 당현종이 한때는 그녀에게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역사서적을 뒤적여보면 당현종에게는 모두 30명의 아들과 29명의 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있는 황후비빈은 모두 20여명인데, 그중 가장 신비막측한 인물이 바로 "조야나희"이다. <<신당서>>, <<서양잡조>> <<당어림>>등에는 모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현종의 딸 중에는 수안공주(壽安公主)가 있는데 바로 "조야나희"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다. 그런데, "조야나희"에 대하여는 아무런 소개가 없고, 심지어, "미인" "재인"등 저급의 봉호마저도 없다. 역사서에는 그저 조야나희가 9개월간 회임하여 딸을 낳았으며, 10개월이 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의 미신으로 당현종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딸의 이름을 "충낭(蟲娘)"으로 짓고, 그녀에게는 도교의 우의복을 입고 궁내의 도교사원에서 재앙을 �고 복을 부르도록 하는 일을 시켰다. 당현종이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었을 때, 충낭은 우여곡절 끝에 당대종 이예에 의하여 수안공주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황실의 공주신분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나중에 이 사연은 가지를 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가 민간의 기록과 관방의 사서에 남아 있게 된다.

 

천백년이래로 사람들은 "조야나희"라는 인물에 대하여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역사에 묻혀버리게 된다. 고고학적 문물자료가 속속 드러남에 따라, 옛날에 기록된 역사와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 사이에는 새롭게 해석해야하는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야나희"와 같은 여성에 대하여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홍콩의 나향림(羅香林) 선생은 먼저 "조야나희"라는 인물에 대하여 고증을 하였다. 그는 1966년에 출판된 <<당원이대지경교>>라는 글에서 자신이 광서 계림의 당나라때 서역인들이 남긴 마애석각에서 "안야나(安野那)"라는 이름을 발견했다고 한다. 경교(네스토리우스파)는 초기 기독교의 한 갈래였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서역지역에 포교되어 퍼졌었다. 그리하여, 나향림은 먼저 "안야나"와 "조야나희"의 연결관계를 비교했다. 외국이름의 음역측면에서 보자면 "야나"는 <<신약성서>> 누가복음의 여자 선지자 안나(Anna)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나(亞那)와 "야나(野那)"의 발음은 비슷하다. 이로써 그는 조야나희는 경교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했다. 아마도 계림에 살고 있던 경교신도들과 교우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향림의 이 연구추론은 학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최근 들어, 중산대학의 채홍생(蔡鴻生) 교수는 위 고증을 이어받아 보충하였다. 그는 당현종의 후궁인 그 "조야나희"는 비록 수안공주의 생모이지만, 내력을 알 수 없고, 보기에는 외국인의 이름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당시 장안에 와 있던 외국인 기녀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오늘날의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언제나 그 수수께끼가 풀릴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채홍생은 조야나희의 모계혈통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고찰해서 그 딸의 어릴때 이름인 "충낭"을 코가 높고 눈이 깊은(深目高鼻) "흑갑충(黑甲蟲)"이라는 뜻으로 보았다. 이를 볼 때 그녀가 외국인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이 설은 정설이 되지는 못했지만, 조야나희의 신세내력에 관한 수수께끼를 다시 한번 수면위로 끌어올렸다는 의미가 있다.

 

최근들어, 문물출판사 총편집이자 박사지도교수인 갈승옹(葛承雍) 교수는 제3대 중외관계사 연구자로서, 2007년 제4기 <<중국사연구>>에 <<조야나희고>>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야나"라는 두 글자에서 아주 핵심적인 단서를 찾아낼 수 있으며, 그것이 어느 나라 말이고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갈승옹은 이전의 두 학자들의 연구기초위에서 새로운 연구결과를 얻어냈다.

 

첫째, 투루판에서 출토된 문서를 보면 "조야나희"라는 이름은 소그드어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는 "조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나라사람들은 중국에 들어온 후에 주로 "조"씨성을 썼다. 조나라의 발원지는 지금의 즈라브산강이북(사마르칸드를 가로지름)이며, 지금의 타지크스탄과 우즈베스스탄지역이다. 조씨는 중국에 들어와서 거주한 중앙아시아 소그드인이 가장 많이 썼던 성씨이기도 하다. '조야나희'는 중국어로 쓴 것이지만, '야나'라는 두 글자는 소그드인에게서 가장 자주보는 이름이기도 하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문서에 의하면 조연나(曹延那), 조야나(曹野那)라는 사람이름이 나오는데, 계림의 서산 석실에서 볼 수 있는 당나라 경룡3년(709년)의 "안야나"와 일치한다. 소그드어의 원래 의미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자여자를 불문하고 이 이름을 썼다. 소그드인들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를 지금에 와서 고증할 수는 없지만, 돈황, 투루판문서에서 나타나는 "조야나"등의 소그드사람이름은 <<신당서>>에 나오는 "조야나희"에 대한 사료가 믿을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조야나희"라는 이름은 외국발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한화(漢化) 정도가 그다지 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중국에 들어와 살던 외국인의 후예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외래 소그드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한자이름으로 지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한화정도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그들이 소그드인인지 아닌지를 알기 어렵다. 만일, 발음이 이상하고 의미가 불명확한 한자를 썼다면, 이는 대체로 외국발음을 옮긴 것으로 보아도 좋다. 조야나희의 신분내력은 비록 궁중내의 일이지만, 사서에 몇 마디는 적혀 있다. 역사문헌의 단서나 소그드어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중국에 들어온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한문화를 숭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이미 중국에 정착한 외국인의 후예는 아니라고 본다.

 

셋째, 조야나희는 아마도 개원원년에 조나라에서 진상한 "호선녀(胡旋女)"일 것이다.

 

최근들어 외래문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국내외의 학술계는 중앙아시아의 서역여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온 경로를 대체로 3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1) 중앙아시아 소그드인들이 진상한 "호인여자(胡人女子)" 혹은 "호선녀". 중앙아시아각국의 호인은 당왕조와 정식으로 교류하면서 자주 "조공"과 "하사"를 수단으로 보물, 진품, 이품, 가축과 호선여자를 바쳤다.

 

(2) 비단길의 호비(胡婢) 거래이다. 당나라때 구차(龜玆)국과 우전(于)국에 모두 여사(女肆)를 두었다. 고창국에서 내려온 노비매매시장은 아주 흥성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호인노비매매가 아주 성행하였다. 투루판문서에도 매비시권(買婢市卷)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3) 장안의 소그드부락의 소그드여인이다. 중앙아시아의 호인들은 장안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비단길을 오가는 호상(胡商)들이 많았고, 이들은 장안을 무역중개지로 삼았다. 그들은 점포를 열고 돈을 벌었으며, 일반적으로 가족들을 장안에 정착시켰다. 이리하여 "토생호(土生胡)"인 조씨 오랑캐여인이 있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황가 이원(梨園)에도 조보보(曹保保), 조선재(曹善才), 조강(曹綱)등 3대에 전승되는 오랑캐 비파세가(琵琶世家)가 있었는데, 그 여자들도 아마 후궁으로 뽑혀서 들어갔을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경우를 분석해 보면, 갈승옹 교수는 조야나희는 아마도 개원연간에 조나라에서 진공으로 바친 호선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며, 자태가 아름다운 예쁜 여인만이 궁중에 들어갈 수 있고, 황제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당현종시기에는 후궁에도 오랑캐문화가 창궐하였는데, 조야나희도 "호선녀"라는 경로를 통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후궁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많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