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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인들은 왜 아직도 소산지려(小山智麗)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by 중은우시 2008. 6. 17.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고바야시(허즈리)-덩야핑

 

글: 김산(金汕)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인들이 외국의 '용병'이 되는 경우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국제탁구연맹회장인 사라라(Adam Sharara)는 여러번 얘기한 바 있다: "2007년 여자월드컴에서, 16명의 선수들 중에 13명이 중국인이다. 이는 경기의 재미를 많이 감소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인들에게는 이미 낯익은 것이 되었다. 중국관중은 더이상 예전처럼 이들 '용병'을 조국에 불충하는 반역행위로 보지 않는다. 특히 신문에서 탕나(唐娜, 당예서)가 네덜란드에 연속 두번지고 흘린 눈물을 열렬히 보도했던 일이나, 일부 선수가 나이 40이 넘어서도 전투의지가 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심지어 동정심마저 보이게 된다.

 

다만, 딱 한명의 '해외군단'은 중국관중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바로 소산지려(小山智麗)이다.

 

소산지려(당시 그녀는 허즈리 - 何智麗- 로 불리웠다)의 논쟁은 "양구(讓球, 게임을 고의로 양보하여 져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양구"는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상당히 복잡한 역사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몰아서 '양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몰아서 '양구'를 찬양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일이든 그 역사를 일도양단으로 잘라서 말하기 힘든 것이다.

 

'양구'의 목적은 '일치대외(一致對外, 외부에 하나로 대응하는 것)'였다. 이는 계획경제시대에는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후반에 들어서면서, '양구'는 더 이상 불변의 원칙이 아니게 되었다. 일부 따르지 않는 거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선수들은 '양보의 양'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고, 불만의 언동을 드러냈다. 어떤 선수들은 양보를 하면서도 고의로 져준다는 것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선수는 불만을 가득 품고 외부에 까발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7년의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마침내 사상유례없는 '허즈리사건'이 벌어진다. 허즈리는 먼저 천징(陳靜)의 양보를 받는다. 그리고는 다음 경기에서 관젠화(管建華)에게 져주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허즈리는 경기를 시작하자 온 힘을 다해서 공을 치고, 관젠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경기장밖에 있던 자오즈민(焦志敏)도 소리쳤다: "관젠화. 너도 진짜로 쳐라. 져주지 않을 모양이다" 대표단의 한 책임자는 허즈리가 공을 집을 때, '허즈리, 잠깐 이리와 봐라!'라고 말했다. 허즈리도 이 말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공 10개를 연속으로 놓친다. 그러다가 갑자기, "난 져줄 수 없다. 반드시 이기겠다"라고 소리치고는 결국 허즈리가 이겨버린다. 경기가 끝난 후, 그녀가 관젠화와 악수할 때, 관젠화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관젠화는 울면서, 코치에게 말했다: "져준다더니, 이게 무슨 져주는 거예요!" 나중에 허즈리는 한국의 양영자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녀는 첫번째로 탁구에서 '양구'전통에 반역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허즈리가 너무 이기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일 '양구'의 전통을 따르지 않을 거면 천징으로부터 양보받을 때 미리 그것을 얘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물고 들어가 그녀가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사실, 경기전에 얘기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하려면, 경기에 참가하기 전에 미리 '나는 져주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여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는 아예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허즈리사건에 대한 평판은 반반이었다.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적지 안았다. 다음 해, 허즈리는 올림픽대표팀에서 탈락되었다. 허즈리의 스승인 손매영(孫梅英)은 체육신문에 성적표를 싣는데, 그 성적표에 따르면, 허즈리는 1987년 3월 부터 1988년 7월까지 국내외경기에서 모두 4번 졌고, 다이리리(戴麗麗)는 8번을 졌다. 그리고, 팀내 모의시합에서는 허즈리는 9승1패를 거두었고, 다이리리는 5승4패1기권의 성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다이리리는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고, 허즈리는 탈락한 것이다. 이는 허즈리에게 일종의 반항심리를 낳게 했다. 심지어, '복수'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국가대표팀을 떠나는데, 떠나기 전에 체육위원회 주임 이몽화(李夢華)에게 서신을 남긴다:

 

이몽화 주임님:

 

국가체육위원회가 여러해 동안 저를 길러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모두 알고 있는 이유로 인하여, 저는 국가대표팀은 스스로 떠나고자 합니다......

 

사실, 이 집단에 남아 있으려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개인이 항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허즈리보다 더욱 뛰어났던 또 하나의 선수인 자오즈민이 국가대표팀을 떠난다. 그녀는 준결승에서 리후이펀(李惠芬)에게 져주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녀의 실력은 당시 우승감이었다. 만일 진짜로 시합을 한다면 리후이펀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승에서는 천징을 만날텐데, 그녀도 자오즈민보다 실력이 아래였다. 그러나, 자오즈민은 그냥 손을 놓고 져준다. 그녀는 제2의 허즈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대표팀을 떠날 때 했던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나는 아주 이 집단에 감사한다. 이 집단은 나를 길러주었다....'양구'에 대하여는 더 이상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이렇게만 말하겠다. 나는 4번 양보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의 '양구'는 내가 사전에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원래 2,3년 더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이제 더 이상 탁구를 하고 싶지 않다."

 

자오즈민은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대표팀의 옷을 입고 중국팀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한국대표팀에 들어갔더라면, 지금의 탕나보다 훨신 강했을 것이고, 당시의 허즈리보다 강했을 것이며, 어떤 중국선수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허즈리는 일본으로 시집을 갔다. 그녀는 '요시!'라고 일본말로 고함을 치면서 정말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천징, 세계선수권자 차오홍(喬紅) 그리고 당시 세계랭킹1위인 덩야핑(鄧亞萍)을 모조리 꺽어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탁구스타로서의 풍모가 없었다. 듣기 거북한 말로 패배자들을 모욕했고, 특히 동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녀는 말끝마다, '우리 일본팀은...'이라고 하였고, '중국팀을 이겨서 아주 기쁘다', '내가 다른 어떤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욱 기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허즈리가 기술, 전술에서 실력이 향상된 것에는 국가대표탁구팀이라는 집단이외에도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은사인 손매영과 탁구계에서 가장 실력자인 장칙동(庄則棟)이 있다. 허즈리는 손매영을 모친처럼 생각했다. 1988년말, 나는 젊은 기자인 국연과 손매영의 집에 갔다. 내가 쓰려는 책인 <<서울에서 눈물을 흘리다 -- 올림픽반성록>>을 위한 인터뷰였다. 책이 출판된 후, 손매영은 허즈리를 데리고 나와서 함께 판매행사에서 책에 서명까지 해주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아주 고마움을 느꼈다. 당시 손매영은 이렇게 말했다: "허즈리는 두뇌가 있는 애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공만 쳤다. 문화교육을 받은 것도 아주 적다. 말하는데 그다지 주의하지도 않고, 잘못해서 아주 손해를 보곤 한다" 나중에 허즈리는 일본으로 가고, 소산지려가 된다. 손매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지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감정상 경기장에는 도저히 나갈 수 없다" 아쉽게도 손매영은 1993년 뇌일혈로 돌연 세상을 떠난다. 손매영이 살아있었더라면, 아마도 소산지려가 과분한 언사를 하는 것을 막아주었을지도 모른다.

 

소산지려의 말은 너무 심했고, 이는 경기장에서 하는 말의 수준을 벗어났다. 그리하여 중국관중은 지금까지도 그녀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허즈리가 일본에 잘보이고, 중국을 모욕하는 말을 했지만, 그래도 중국선수들은 대범했다. 1995년, 허즈리는 천진의 탁구월드컵대회에 참석했다. 덩야핑에 따르면 그녀에게 평상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일본인이고 거기서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허즈리가 일본에서 탁구를 하는 조건은 중국에 훨씬 못미쳤다. 당시 30여세의 나이에도 그녀는 열심히 탁구를 했다. 이는 탁구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생활때문에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녀의 탁구수준은 어떤 중국선수라도 쉽게 이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중국대표팀을 피해 다녔다. 1999년 월드컵에서 왕난(王楠)과 대결할 때, 사람들은 휴식시간에 물마시는 것도 그녀가 직접 가서 가져오는 것을 발견했다. 시드니올림픽때는 그녀에게 코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국의 대규모 탁구대표팀과 비교하면 너무나 외롭고 초라한 몰골이었다. 허즈리의 일본생활도 행복하지는 못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전해진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시간의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비록 그녀가 오사카법원에서 650만엔의 배상금을 받기는 했지만, 그녀가 받은 정신적인 고통은 쉽게 없앨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그런 환경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충동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까지 하였다.

 

세계탁구는 중국이 중심이고, 소산지려가 당시에 한 말은 그녀가 이후 생활을 계속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비록 그녀가 여러번 당시의 행위를 변명했지만, 그 말들이 중국의 탁구팬들에게 남긴 이미지는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때 투지를 북돋우기 위하여 했던 몇 마디 말이 그녀에게 초래한 나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