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축구운동의 기원이 중국이라는 점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사실이고, 아무런 이견이 없다. <<전국책>>과 <<사기>>에는 인류역사상 축국활동이 가장 먼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아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임치(臨淄)에는 7만호가 있었다...임치는 아주 부유하고 튼튼했다. 백성들 중에서 취우(吹竽), 고슬(鼓瑟), 탄금(彈琴)....육박(六博), 답국(蹋鞠)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답국"은 바로 "축국"이다. "축(蹴)"이라는 것은 발을 이용하여 찬다는 뜻이고, "국(鞠)"은 가죽으로 만든 공이라는 뜻이다. "축국"은 바로 발로 공을 찬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송태조축국도]
축국운동의 기원은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이며, 양한(서한, 동한), 남북조에 발전하여, 수, 당, 양송(북송,남송)때 번성했다. 이후 일본, 고려, 프랑스, 영국등 세계각국에 전파된다. 그때의 중국은 의문의 여지없는 축구대국이었다. 당시 세계각국이 주목하고 배우던 축구강국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중국에서 천여년간을 풍미하던 문화체육운동은 영국처럼 축국을 현대적 의미의 축구운동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고, 오히려 봉건사회의 쇠락과 더불어 점차 쇠퇴했다. 특히 원, 명, 청 시대에는 적막한 상태가 되었다.
여하한 스포츠도 형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사람의 사상을 통하여 완성해가는 것이다. 축국도 예외는 아니다. 봉건사회 중후기에 받들어지던 유가사상은 축국을 쇠퇴하게 만드는 사상적 기반이었다. 격렬하고, 모험적이며, 죽어라 싸우며, 경쟁하고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현대축구정신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유가사상은 "인"과 "예"를 강조하고, 겸허, 온순, 선량, 위계질서와 중용을 강조한다. 유가의 "군자가 용기만 있고 의리가 없으면 어지럽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고대의 축국의 형식은 갈수록 대항성이 약화되고, 오락성이 강화되었다. 사회성은 갈수록 감소하고, 축국은 더 이상 격렬한 경쟁을 강조하지 않게 되었고, 점차 예의와 수양을 강조하는 우아하고 온건한 건강운동으로 변모하였다. 한나라때의 격렬한 직접충돌식의 대항전에서 당송시대에는 중간에 구문(球門)을 둔 간접적인 대항으로 변모하였고, 다시 각양각색의 공차기를 하는 것을 재주로 하는 "백타(白打)"로 되었다. 중국고대의 축국은 혜성처럼 기원, 발전과 번영후에 점차 암락(暗落), 적막의 과정을 겪었다.
[민간축국도]
축국운동의 흥망성쇠는 통치자의 정책, 제창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었다. 당송황제는 대부분 축국운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이것을 군사훈련수단으로 삼았다. 경기가 있을 때면 친히 관람했다.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더욱 심하게 했다. 그리하여 풍속으로 굳어졌고, 널리 퍼졌다. 이것이 당송시대 충국운동 흥망성쇠의 중요한 요소이다. 원나라는 생활적으로 말위에서 자란 몽골족이 건립했으므로, 생활습관과 민족차이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들은 한족의 유희유형과 체육항목에 적응하지 못했고, 장려하지 않았다. 축국운동은 관방운동에서 민간운동으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점차 민간의 순수한 오락성문화활동이 되어 버린다. 주원장이 등극한 후, 군인의 축국을 엄금한다. 그리고, "축국을 하는 자는 발을 자른다"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축국운동 자체는 매력이 있어서, 민간에서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청나라가 정권을 차지한 후, 사냥을 좋아하는 만주족 통치자들은 한족의 축국에 대하여 금지정책을 취한다. 순치제는 공차는 것을 금지하는 구두지시를 내려서, 축국에 대하여는 '즉시 엄금하라"고 한다. 나중에 건륭제는 아예 법으로 축국활동을 금지한다. 민간의 축국운동은 이때부터 크게 제한을 받는다.
전통문화는 개성을 억누른다. 그리하여, 중국축국은 약화, 적막으로 향한다. 그리고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중요한 계기가 없었다. 봉건사회중후기에 지배적인 지위에 있던 유가사상의 영향으로 중국봉건의 종법체제, 윤리문화, 예의금기등 역사문화전통은 중국인에게 침중한 심리적인 퇴적물을 남기고, 개인의 생명충동은 거의 말살되어 질식사하게 된다. 사람들이 정신적인 평형을 이루고자 노력했고, 자기를 온순하고 근신하여 장중하고 돈후한 군자가 되려고 애썼다. 차라리 중용의 도를 지킬 지언정 적나라하게 자아를 드러내거나 개성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한 등급이 삼엄하고, 존비가 분명한 체제영향하에 축국은 규칙이 통일되고, 공정하게 경쟁하며, 개성을 숭상하는 경기체육운동으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의 현대 스포츠정신은 형성될 수 없었다. 당송이래로, 축국은 그저 '범체육'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지속되었다. 거기에서 '공정'과 '경쟁'이라는 핵심사상의 체육관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전통체제와 문화속박이 직접적으로 관계될 것이다.
여하한 체육활동도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가며, 세계와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앞길이 막힐 것이다. 축국은 바로 살아있는 예이다. 당송시대에 창조한 단구문(單球門)의 간접대항은 전인민에게 보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의 공연이라는 길로 발전해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중기반을 상실했고, 일방적으로 축국기교의 방식만 강조했다. 당시의 불량한 사회기풍을 이용하다보니, 축국은 정확한 발전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명나라의 장수인 장사신이 "노래하는 기생을 두고, 황음을 자행하며, 군사를 돌보지 않고, 부녀자를 끌어않고 주연과 축국을 즐긴다"는 말이나, <<금병매>>에서 서문경이 여춘원에서 기녀들의 축국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기풍하에, 축국은 원래의 강개, 기개, 영무(英武)한 풍모와 특징을 잃어버리개 되며, 방탕함과 연결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직접 축국에 참여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축국을 구경하는 것으로 되었다가 다시 여자들이 축국하는 자태를 즐기게 되었다. 축국운동은 군사훈련의 힘쓰는 형태에서 기교를 겨루는 형태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관상적인 것으로 되었다가 결국 경박한 것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모두 축국의 쇠약과 침묵후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게 만든 고리였다.
[기녀축국도]
군사적인 낙후는 얻어맞는 것으로 돌아오고, 체육에서의 낙후는 마찬가지로 패배로 돌아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한국을 만나면 이기지 못하고, 영국을 만나면 참패한다. 이것이 최근 수십년동안 중국축구를 둘러싼 괴이한 고리이다. 우리는 축국운동의 기원이 중국이라는 것에 즐거워하는 동시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중국의 '국수', 그리고 일찌기 세계최고수준이었던 축구대국이 왜 이렇게 낙오되고, 이렇게 한주먹감도 안되게 되었는지를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상의 화려한 광환은 벗어버리고, 맹목적으로 잘난 척하며 폼잡는 것도 버리고, 중국축국의 천년간의 찬란한 문화에 의존하여, 현재 중국축구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중국축구의 발전방향을 탐색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를 파악하며, 분기하여 쫓아가서, 다시금 휘황을 창조해야만 고인의 뛰어나고 위대한 창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중화민족이 체육계에서 자랑스럽게 눈썹을 휘날리며 목에 힘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중화민족부흥과 문화체육부흥은 절대 빈말이 아니고, 더구나 그저 구호가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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