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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여자탁구와 "허즈리(何智麗)"사건

by 중은우시 2007. 3. 6.

 

일반사람들은 미디어는 공기(公器)이고, 여론은 항상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공기는 사람에 의하여 좌우되고,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미디어도 사람들이 자주범하는, 저능, 충동, 편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뭐라고 생각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른다. 특히 예전에는 미디어가 사법심판을 대신하여 여론을 통하여 살인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예전의 "장금주사건(張金柱)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에서, <<남방주말>>도 상식적인 잘못을 범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체육계의 몇 가지 큰 사건들은 자세히 분석해보면, 시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허즈리사건을 말해보자, 1987년 제39회뉴델리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식준결승때, 중국탁구선수 허즈리와 관젠화(管建華)와의 사이에 '일부러 져주기'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장 유명하고 영향이 큰 "일부러 져주기"사건이다.

 

"일부러 져주기"는 중국탁구계의 "우량전통"이다. 여러번의 세계대회에서, 조직이 정한 엄밀한 숨은규칙에 의하여, 중국팀은 자주 금메달을 손에 넣곤 하였다. 그때 여자단식준결승에서 한국의 양영자가 이겨서 결승에 올라갔다. 다른 준결승은 중국선수인 허즈리와 관젠화의 사이에 벌어지게 되었다. 감독들은 이전에 허즈리가 양영자와의 경기성적이 반반이었는데, 관젠화의 깍는서브타법은 아마도 양영자에 대하여 장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즈리가 관젠화에게 일부러져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천징(陳靜)이 기자인터뷰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1987년당시 천징은 단식에서 손쉽게 8강까지 올라갔다. 당시 그녀는 19살이었고, 이미 금메달을 딸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8강전에서 그녀의 상대방은 같은 팀의 허즈리가 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같은 팀원끼리의 경기는 감독이 지휘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이상했던 것은 당시 그녀와 허즈리의 감독은 모두 자리에 나와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징이 가볍게 제1세트를 승리하고 나서 감독곁으로 돌아오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감독은 그녀를 불러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얘기했던 것을 잊지 마라. 오늘은 네가 허즈리에게 양보해라" 당시 천징은 상당히 놀랐지만, 금방 결정에 따랐고, 이후 3세트를 연속으로 지면서 승리를 허즈리에게 양보했다.

 

허즈리는 4강에 올랐고, 같은 팀의 관젠화를 만나게 되었다. 경기시작전에 감독은 이번에는 허즈리가 반드시 관젠화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통보했다. 두 사람도 모두 상부의 결정에 동의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가, 실력이 약간 강했던 허즈리는 아주 쉽게 첫 세트를 따버렸다. 이때 관젠화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이후의 2세트에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쳤다. 그리고 숨은 규칙을 지키지 않겠다고 결심한 허즈리가 이겼다.

 

허즈리가 말을 듣지 않고 승리하자, 중국감독들은 아주 골치아픈데다 분노해서, 여자단식결승에 허즈리가 양영자와 싸울 때, 아무도 허즈리를 위하여 지휘해주지 않았고, 아무 감독도 경기현장에 나와보지 않았다. 당시 눈이 붉어진 허즈리는 자신만에 의지해서 하나하나 게임을 진행했고, 결국 3대1로 양영자를 이기고 여자단식우승을 차지했다. 중국팀의 감독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가 만일 우승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감독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관젠화가 결승에 올라서 양영자에게 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허즈리가 공공연히 감독의 권위에 도전한 사건은 여러 사람의 분노를 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중국팀의 '일부러져주기'전통을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에 관젠화에게 양보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8강전에서는 같은 팀의 천징의 '일부러져주기'를 받아들였다. 앞뒤로 일치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허즈리가 욕을 먹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번 '일부러져주기'사건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팀내에서 많은 사람들은 만일 그녀가 당초에 양보해주길 원하지 않았다면, 감독들에게 그렇게 말했으면 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팀원을 속이고, 앞에서는 다른 팀원의 져주기를 받아들였으면서, 다음에는 자기가 억울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1년후의 1988년 서울올림픽, 마지막으로 올림픽 여자단식에 참가한 사람은 세 사람이다. 쟈오즈민(焦志民), 리휘펀(李惠芬) 그리고 천징이다. 1년전에 감독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세계선수권금메달을 딴 허즈리는 이번에 리스트에조차 아예 들지 못했다. 허즈리는 팀내에서 실력으로는 3위내에 분명히 들었지만,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가 1년전에 말을 듣지 않은데 대한 처벌이었다(말을 듣던, 듣지 않던, 최소한 허즈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금메달을 반드시 딸 수 있었을 것인가? 중국국가대표팀 지도자들의 편협함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허즈리는 화가나서 국가대표팀을 나가고 상해로 가서 혼자 훈련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탁구계의 지도층의 미움을 샀고, 그 권위에 도전하다보니, 국내에서 그녀는 더이상 있을 곳이 없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일본으로 가서 탁구인생을 새로 시작한다.

 

허즈리가 참가하지 않은 서울올림픽에서 중국탁구팀은 또 다시 두 번의 '일부러져주기' 스캔들이 나온다. 당시 준결승의 대진형세는 한팀은 중국팀의 쟈오즈민과 리휘펀간에 진행되고, 다른 한팀은 천징과 체코선수간에 진행되었다. 천징과 체코선수의 경기는 쟈오즈민과 리휘펀의 뒤에 진행된다. 그런데, 쟈오즈민은 이전의 경기에서 이 체코선수에게 진 바 있었다. 감독팀은 금메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먼저 쟈오즈민을 리휘펀에게 양보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천징은 뒤의 경기에서 3:0으로 체코선수를 눌러 중국팀은 이 금메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팀을 위하여 억울하게 희생한 쟈오즈민은 이때까지 이미 8년동안 5번이나 양보하였던 것이다. 한 운동선수의 일생에서, 몇 번이나 금메달을 딸 기회를 가지겠는가? 쟈오즈민은 이에 상심하여 탁구계를 떠났고, 멀리 한국으로 시집갔다.

 

당시 당사자의 하나인 천징은 이렇게 '일부러져주기'경기를 보고 있다. '일부러져주기'는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다. 우리 운동선수들은 평소에 아주 힘들게 훈련하는데, 아주 어렵게 국제대회에서 경기를 벌인다. 우리가 '일부러 져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일부러져주기'는 일종의 사기행위이고, 스포츠정신에도 반한다. 이것은 가수들이 립싱크로 노래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일부러져주기'사건으로 상처를 입고 국가대표를 떠난 허즈리도 그때가 첫번째 져주기는 아니었다. 1986년 9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제10회아시안게임 여자단식결승에서 22세생일을 맞이한 그녀는 그 경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쟈오즈민에게 양보했었다. 결승전을 하기도 전에 금메달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의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전이 심천에서 개막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마지막 여자결승에 오른 것은 바로 아시안게임에서 양보하고 양보받은 쟈오즈민과 허즈리였다.  '일부러져주기'의 총감독인 이부영(李富榮)은 허즈리에게 "한번 더 양보하라"고 통지한다.

 

허즈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감독 손매영(孫梅英)을 찾아간다. 그러자 손매영이 들고 일어나서 얘기했다. "저번에 서인생(徐寅生)이 말하지 않았었냐. 다음 번에는 허즈리에게 양보한다고" 서인생은 서울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 때 말한 다음 번은 이번은 아니다"라고.  그러나, 손매영이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따지자, 지도부는 다시 결정을 번복했다. "좋다. 이번에는 쟈오즈민이 허즈리에게 양보해라"

 

격렬한 결승전은 탁구대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기전에 막후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만일 손매영이라는 탁구계의 노장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이부영과 서인생은 아마도 결정을 뒤집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손매영이 허즈리를 위해서 얘기해주었기 때문에, 이부영, 서인생도 허즈리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손매영, 허즈리와 이부영, 서인생간에 일찌감치 첨예한 갈등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지시불복종사건과 이로 인하여 서울올림픽출전선수명단에서 제외된 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행동으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허즈리는 일본팀으로 참가한다. 그리고 마지막 탁구여자단식결승에서 당시 중천에 떠오른 해이던 등야핑(鄧亞萍)을 꺽고 금메달을 차지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자신들이 옳다고 고집하던 중국탁구팀의 감독들에게 수모를 안겨주었다.

 

요즘, 중국탁구선수들은 국가대표팀에서 나온 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민가서 다른 나라의 대표선수로 세계대회에 참가하여 운동선수로서의 생명을 연장한다. 그리고, 이 해외병단이 중국팀을 저격하거나 심지어 금메달을 빼앗아 가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오늘날 이미 익숙해진 사회심리와 공중여론에서는 별 일이 아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니까. 그러나, 당시에는 이렇게 관대하지 않았다. 허즈리의 행동은 합리적인 탁구체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중국사회의 일원적 가치관에대한 도전이었다. 발언권을 장악한 몇몇 사람들의 주도하에 여론은 쉽게 극단으로 치달았다. 당시 중국에는 한가지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허즈리는 불행하게도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다.

 

중국의 거국적인 스포츠체제를 알려면 매번 시상식에서 수상자의 말을 들어보면 된다.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지도자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말이고, 다음 번이 감독의 훈련방법, 지휘가 좋았다는 것이고, 그 다음이 운동선수의 노력인 것이다. 금메달을 누가 가져가느냐는 것도 모두 지도자가 결정한다. 이렇게 한 결과, 운동선수들의 적극성이 많이 감퇴되었다. 이런 사전안배가 불합리하다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하다. 그러나, 국가의 영예는 어떤 가치보다 높다. 아무도 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어떤 운동선수는 성격이 비교적 온화하여,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운동선수들은 여기에 반발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체제하에서, 지시를 듣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대표팀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했다. 허즈리는 말을 듣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국가대표팀에서 쫓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허즈리는 일본에서 탁구를 시작한 후 일본국적을 취득한다. 그리고 소산(小山, 고바야시)이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에게 시집간 후, 이름을 소산지려(小山智麗)로 고친다. 중일간의 감정은 중국여인이 일본인에게 시집간데 대하여도 말들이 많았다. 그녀는 여러해동안 일본에서 일하고, 일본어로 말하고 자신을 격려하는 습관이 붙어서인지, 경기장에서 매번 좋은 공을 칠때마다 "요시"라고 일본어를 말한 것이 중국인의 민족감정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스포츠는 쉽게 정치화한다. 국가민족간의 감정대결로 비화된다. 허즈리는 당시 탁구계에서 어떤 사람들은 매국노로 불리웠다. 중국에서 그녀를 배양하고 훈련시켰는데, 다시 그녀가 중국과 적이 된 나라를 돕는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당시 적지 않은 미디어들은 한술 더떴다. 그리하여, 허즈리를 매국노, 오삼계로 불리웠고, 심지어 여러해 후의 그녀의 혼인상의 불행(이혼)과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에 대하여도 고소하다는 태도로 보도했다. 이처럼 약자이면서 동족인 한 여인에 대하여 이렇게 악독한 말들로 공격하는데 대하여는 식은 땀이 흐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