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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 고대의 축구

by 중은우시 2007. 2. 12.

 

 

축구는 현재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축구는 유럽에서 발생했으며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축구는 사실상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축구를 고대사회에서는 축국(蹴鞠)이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축국의 기원은 황제(黃帝)때부터이나, 그것은 전설이다.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한(漢)나라때 축국이 아주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한고조 유방의 부친은 축국을 매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 한무제 및 그의 대장인 위청, 곽거병도 모두 축국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축국을 군사훈련항목으로 넣었을 정도였다. 동한중엽에 이우(李尤)가 쓴 <<국성명(鞠城銘)>>이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서는 한나라때의 축국의 구장, 공, 대장, 심판, 경기규칙, 경기예의등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국성명>>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때의 축국은 장방형의 구장에서 진행했으며, 구장의 양쪽 끝에 달모양의 공이 들어나는 문을 만들었다. 경기쌍방은 6명씩의 대원을 출전시켰으며, 매 팀마다 대장, 후위, 중봉, 좌우익이 있었다. 쌍방은 공을 홥호하여 상대방의 골문으로 공을 차넣으며 많이 넣으면 이겼다. 이 때의 공은 가죽으로 안에 털과 머리카락을 넣어서 꿰메어 만든 것이다. 경기에는 규칙이 있고, 심판이 공정하게 집행했다.

 

한나라때 축국이 성행한 것은 문헌에 기재가 있지만, 사람들이 여전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의 정주 등봉의 숭산(嵩山)위에는 중악한삼궐(中岳漢三闕, 중악은 숭산을 가리키므로, 중악에 잇는 한나라때의 세 개의 궐이라는 뜻이다)의 석각조각에는 축구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일찌기 2000여년전에 이미 축구를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1993년, 중국은 올림픽을 신청할 때, 세계올림픽위원회에 중악한삼궐의 축구와 관련된 조각을 보여주고, 축구가 중국에서 기원했음을 밝혔다. 세상은 깜짝 놀랐다.

 

축구하는 모습을 조각한 중악한삼궐(삼궐은 태실궐(太室闕), 소실궐(少室闕), 계모궐(啓母闕)의 세개를 가리킨다)은 정주등봉의 숭산위에 있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보호된 묘궐(廟闕)이다. 그중 태실궐은 동한 안제 원초5년(118년)에 양성현장인 여상이 지은 것이다. 소실궐은 한대소실산묘의 묘궐이며, 개략 동한 안제 원초5년(118년) 내지 연광2년(123년) 사이에 지었다. 계모궐은 계모묘의 묘궐이며 동한 연광3년(124년)에 영천태수 주총이 지었다. 이중 소실궐과 계모궐에는 축국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소실궐의 동궐남쪽에 새겨진 축국도에는 머리를 높이 올리고 긴 소매를 펄럭이는 여자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공을 차고 있으며, 여자의 양쪽에는 각각 1사람씩 서서 북을 울리며 반주를 넣고 있다.

 

중악한삼궐은 축국을 하는 모습을 새긴 외에 많은 풍부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는 모습, 마희(馬戱), 잡기, 투계, 무검, 교룡(蛟龍), 호식귀(虎食鬼), 양두(羊頭), 견축토(犬逐兎), 용천벽(龍穿壁), 하우부친의 신상, 일욕희화, 계모화석, 하우화웅, 곽거매아, 쌍수쟁식, 현오생상등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것들은 고대의 조각, 미술사, 건축사와 동한사회를 아는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중악한삼궐은 지금까지 보존된 진귀한 한나라때의 석궐이다. 1961년 3월 4일, 중악한삼궐은 국무원에 의하여 국가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소위 궐(闕)이라는 것은 고대의 대문(大門)이다. 그런데, 두개의 문주(門柱)만 있어 마치 아름다운 럭비의 골문과 비슷하다. 당연히 이것은 보통문은 아니다. 이것은 성문, 궁문, 묘문과 귀족의 묘 앞에 세워지는 것으로 현재의 기념비와 유사하다. 한나라때의 궁전과 사묘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극소수의 한궐들만은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 그래서 한궐은 현재 중국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지면건축물이다. 그래서 돌로 만든 한서(漢書)라는 별명도 얻었다.

 

송나라때의 개봉(변경)은 고대축국의 성지였다. 당시의 축국은 이미 현대축구의 여러가지 특색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외형상 아주 가깝다. <<송조사실류원>>의 기재에 따르면, 축국은 이미 6조각 내지는 8조각을 기워서 만든 기구(氣球)를 사용했다. 이것은 현대축구와 비슷하다.

 

둘째, 구기가 늘어서 현대적인 의미를 가졌다. <<축국보>>의 기재에 따르면 송나라의 축국은 이미 견(肩), 배(背), 괴(拐), 탑(搭)등 10가지 공차는 법을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공차는 기술은 이미 현대축구에서의 기술과 유사해졌다.

 

셋째, 전문적인 축국조직이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축구클럽에 해당하는 것이다.

 

넷째, 축국이 이미 상업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축국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고,적지 않은 상인들이 이 기회에 광고를 했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변경성에는 이미 상당히 많은 축구찻집과 각구점이 있었다고 한다.

 

다섯째, 전문적인 축국을 노래하고 시를 짓는 작품이 나타났다.

 

송나라가 망한 후, 원, 명, 청의 삼대는 관부의 여러가지 금지명령으로 고대축구는 점차 사라졌다. 개방은 축국의 흥성지이면서, 축국의 쇠락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