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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근대 장기(象棋)의 오대고수

by 중은우시 2007. 4. 25.

중국에서 장기(象棋로 쓴다)의 역사가 매우 길다. 그러나, 장기는 1900년대초에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때는 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고수가 많았었다. 가히 중국장기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주덕유(周德裕) : 칠성기왕(七省棋王), 일대맹주(一代盟主)

 

주덕유는 1900년생이며, 양주(揚州) 사람이다. 그의 부친 주환문(周煥文)은 의사였는데, 역시 장기의 고수였고, 회양삼걸(淮陽三傑)중의 한 명으로 꼽혔다.

 

부친과 동생 덕광(德廣)이 모두 장기를 둘 줄 알았으므로, 주덕유의 장기공부는 아주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주덕유는 부친이 장기고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적지 않았다. 주덕유의 동생인 주덕광도 역시 장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사제(師弟)인 두국주(竇國柱)도 자주 주씨집에 와서 장기를 배웠다. 이러한 환경은 주덕유가 장기를 매일 연마하는데 아주 훌륭한 주변환경을 조성해주었다.

 

개략 1910년대말쯤, 주덕유의 기예는 명수의 수준에 도달했다. 부친 주환문은 그가 인근의 진강, 남경, 상주, 소주, 상해, 항주등지로 가서 장기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남경에서 명수인 만계유(萬啓有)와 기본적으로 비긴 것을 제외하고는 등춘림(鄧春林)등 다른 고수들과는 이긴 것이 조금 더 많았다. 항주에서는 풍미증(馮楣蒸), 오지겸(吳之謙)등의 고수들과 싸워서 역시 이긴 것이 좀 더 많았다. 단지 상해에서 여지영(勵志英), 임혁선(林奕仙)등의 일류급 고수들과의 싸움에서는 약간 손색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긴 경우가 진 경우보다 많았으므로, 주덕유의 명성은 이때부터 퍼져가기 시작했다.

 

주덕유의 '장기공부'단계가 끝난 후 그는 "만국수(慢國手)"로 불리던 장금영(張錦榮)에게 도전했다. 장금영은 중화민국초기 양주기단의 명수였다. 일찌기 두번이나 병풍마가만(屛風馬加慢)전법으로 주환문을 이긴 적이 있었고, 주환문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양주를 떠나버렸었다. 주덕유가 장성한 후에 부친을 위하여 복수를 한 것이다. 그는 여러번 장금영에 도전하였는데, 전체적으로 70번을 싸워서 14번을 더 이겼다. 이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름을 얻은 후, 주덕유는 주로 상해와 홍콩에서 활동했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은 화동과 화남의 두 지역의 최고수준의 장기고수들이 몰려있었기 때문이며, 경제가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되어 직업장기고수들이 생활할 수 있는 이상적인 땅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 2월, 화북장기대는 상해로 와서, 화동, 화북의 지역간 장기대회를 정식으로 개최했다. 주덕유는 먼저 조문선(趙文宣)과 대결하여 2승1패1무의 성적으로 조문선을 앞섰다. 다음에는 2승2무의 성적으로 장덕괴(張德魁)를 눌렀다. 이리하여 혼자서 12점을 얻어 2위인 조문선과 만계유(모두 9점)를 3점이나 앞서, 1위를 차지했다. 주덕유와 만계유는 강소와 절강의 두 성을 대표했고, 화북대의 조문선과 장덕괴는 길림, 흑룡강, 직예, 산동, 하북의 5개성을 대표했다. 그리하여 주덕유는 "7성기왕"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가장 넓은 지역을 대표하고 규모가 가장 컸던 대회였다. 이로써 주덕유는 장기역사에서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사협손(謝俠遜)을 장기계의 맹주로 불렀었는데, 주덕유가 화동기단에서 굴기한 후, 사협손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고, 주덕유가 기단의 새로운 세대의 맹주로 떠올랐다.

 

둘째, 이경전(李慶全): 천왕(天王)

 

이경전은 어릴 때 이름은 아만(阿萬)이다. 광동 번우 사람이며, 광서18년(1892년)에 태어났다. 이경전과 그의 형인 이귀(李貴)는 빗을 만들어파는 사업에 종사했다. 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각종 공업이 일ㅇ나고 여기에 남자들이 변발을 잘라버리게 되면서, 빗을 만드는 사업은 점차 쇠락했다.

 

약23세때, 이경전은 빗장사를 버리고 장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장기를 두었다. 1924년, 광주의 편편차실(翩翩茶室)을 열었고, 황송헌(黃松軒), 풍경여(馮敬如)와 같은 장기고수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이 때, 이경전의 명성도 황송헌, 풍경여에 버금갔으므로 편편차실로 옮기게 된다. 이들을 광주장기계에서는 "삼보불(三寶佛)"이라고 불렀다.

 

1930년초, 상해만국상기대의 사협손과 화남상기회가 연락하여 "화동, 화남지역대결장기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화동과 화남에서 각각 두 명의 팀을 내보내 경기를 했다. 화남의 가장 이상적인 고수는 황송헌이었고, 그 다음으로 종진(鍾珍), 풍택(馮澤, 즉, 풍경여), 아만(阿萬, 즉, 이경전) 그리고 후기지수인 노휘(盧輝)였다. 우연찮게도 황송헌이 모친상을 당해서 참석할 수 없게 되고, 종진은 멀리 안남(월남)에 가있으며, 노휘는 신진이지만, 경험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화남상기회의 주임인 증전홍(曾展鴻)은 널리 의견을 구한 후, 풍택과 아만을 화남대의 대표로 뽑는다.

 

이번 경기에서 이경전은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첫번째 경기에서 이경전은 먼저 주덕유를 맞이하였다. 주덕유는 당시 화동팀의 최고수였다. 이경전은 '불패'전략을 세웠는데, 사실상 결과도 이렇게 되었다. 이경전은 주덕유와의 두 판을 모두 비겨서, 예견했던 전과를 올렸다.

 

네번째 경기에서 이경전은 다시 주덕유를 만난다. 제일국은 이경선이 선공이었는데, 경솔하게 전진하지 않고 병사를 펼쳐서 격적을 치른 후에 비기는 전법을 썼다. 이어지는 경기는 이경선과 주덕유의 최종경기였다. 그는 전력을 다해서 두었다. 주덕유는 머리 포(砲)를 써서 시작했고, 이경전은 병풍마로 방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주덕유는 서둘러 공격하다가 이경전에게 공격기회를 넘기게 되고, 결국 이 경기는 이경전의 승리로 끝난다.

 

이 대국의 승리는 주덕유의 불패기록을 마감하는 것이어서, 화남팀을 아주 고무시켰다. 이경전은 한판도 지지 않았으므로 이때 "무적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광동성장기대회이후 이경전은 황송헌, 노휘, 풍경여와 함께 "사대천왕(四大天王)"으로 불리웠다.

 

셋째, 팽술성(彭述聖) : 기성(棋聖)

 

팽성술은 청나라 동치13년(1874년)에 태어났다.

 

15,6세쯤 팽성술은 난주(蘭州) 일대의 고수인 유번(劉番), 손당(孫唐), 진팔(陳八), 백목장(白木匠)등과 장기를 두었는데, 여전히 말(馬) 하나를 양보받고 두었다. 한번은 "팔대왕(八大王)"으로 불리우던 진팔은 소년 팽성술에게 마(馬) 하나를 떼고 장기를 두었는데, 팽성술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진팔은 팽성술을 "취기(臭棋, 냄새나는 형편없는 장기)"라고 욕했다. 또 한번은 사월초파일의 목분불회(沐盆佛會)때, 진팔이 팽성술을 만나서 또 한번 "취기"라고 욕을 했다. 이 두번의 욕은 팽성술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갖은 방법을 써서 옛날의 장기책인 <<적청아취(適淸雅趣)>>, <<귤중비(橘中秘)>>, <<매화변(梅花變)>>등을 구해서, 3달을 두문불출하고 장기책을 연구했다. 그리고서 비로소 장기라는 것이 진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기력이 크게 성장했으며, 서북지방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931년 봄여름이 바뀌는 계절에, 58세의 팽술성은 친구인 왕화생(王和生)등의 격려에 함입어, 동쪽으로 갔다. 서북제일고수의 신분으로 북경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팽술성이 북경에 도착한 후, 처음 며칠은 먼저 천교(天橋) 일대를 돌아다니며, 손가(孫家)와 서가(舒家)의 장기두는 곳에서 관전을 했다. 이렇게 해서 북경의 장기수준을 파악했다. 몇번의 중요한 장기를 구경한 후, 팽술성은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팽술성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주인인 서삼(舒三)은 그를 초청했다. 팽술성은 이우헌차사(二友軒茶社)로 가서 장기를 두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장기고수들은 모두 물리쳤다. 또 하루는, 팽이 수선정기사(水仙亭棋社)를 갔는데, 문앞에 "북국기왕나건정수담후교(北國棋王那健庭手淡候敎)"라고 쓴 팻말을 보고는 바로 차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건평과 장기를 두기를 청했다. 나건정은 장기에서 밀리자 그를 경외하고 감히 다시 두자고 말하지 못했다.

 

북경의 유명한 고수인 장덕괴도 팽술성의 상황을 듣고는 그를 청하여 장기를 두었다. 7,8 판을 두었는데, 역시 밀렸다. 동북의 고수인 서사해(徐詞海), 조문선(趙文宣)과 천진고수 전몽오(錢夢吾)도 역시 북경으로 왔다. 심양고수인 서사해는 한 관재점에서 팽술성과 삼일을 두었는데, 6판을 더 지고, 한판을 비겼다. 다시 계신차사(啓新茶社), 취현차관(聚賢茶館)등지에서 팽술성과 대국했는데, 비록 서로 이기고 졌지만 전체를 계산하면 서사회가 여전히 6,7국을 더 많이 졌다. 팽술성은 금주의 조문선과의 장기대국에서도 2승 1패 1무로 우세했다. 그러나 조문선은 천진시정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직무가 감인이므로 겨우 3일간 휴가를 냈었기 때문에 총총 이 대국을 거두어야 했다. 팽술성은 다시 전몽오, 조송관(趙松寬), 이동헌(李同軒)등과도 대국하였는데, 아무도 팽술성의 날카로움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번 대국으로 팽술성은 기성의 칭호를 얻었다.

 

넷째, 조문선(趙文宣) : 조자룡(趙子龍), 맹상군(孟嘗君)

 

조문선은 청나라 광서33년(1907년)에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조문선은 장기를 좋아했고, 8살때부터 장기에 접했으며, 10살전후에 조문선의 부친은 고수인 석환신(石煥宸)을 초청하여 조문선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실력이 급격히 늘었다. 20세대, 다시 심양제일고수인 서사해가 그의 재주를 아껴, 자주 그와 대국하며 가르쳐 주었다. 이로써 단련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조문선의 장기수준은 날로 높아졌고, 얼마되지 않아, 서사해와 나란히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들 둘은 동북의 두 초일류고수가 되었다.

 

1930년대의 "화동 및 화북의 지역간장기대회"에서 조문선과 장덕괴의 두 사람은 화북팀의 대표로 뽑혔다. 화동팀은 화북팀의 실력을 '정찰'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장기고수들의 교류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역대상해대회 우승자였던 심칙감(沈則勘), 영파제일고수인 서막강(徐幕强) 및 화중고수인 나천양(羅天揚)등을 보내어 조문선과 대결하에 하였다. 그러나 조문선은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조문선은 동북, 화북의 고수들과의 대결에서도 아주 비범한 기력을 보여주었다.

 

조문선은 8살때 장기를 배우기 시작하여 북방의 장기계를 30여년간 호령했다. 그는 주로 심양에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업이 이 곳에 있었던 것과도 관계된다. 동시에 그는 생활이 곤란한 장기고수들을 돌보아주기도 하였는데, 역시 이곳에서였다. 현지에서는 조문선의 이름만 들으면 모두 그를 '맹상군'으로 존경했다. 조문선은 특히 생활이 곤란한 장기고수들의 생활을 많이 돌보아주었는데, 나이든 장기고수들에 대하여 더욱 그러했다. 그에게 요청만 하면 기본적으로 모두 도움을 받았다.

 

1920년대초와 1930년대의 항일전쟁때, 심양시의 장기고수들은 대부분 그의 도움을 받았다. 황고둔사건이후 얼마되지 않아 심양의 기원은 아주 썰렁했었는데, 이때도 그는 장기고수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만일 정말 먹는 것도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찾아오라고 해라"고 말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문선에게 도움받은 장기고수가 근 100명은 될 거라고 하였다. 한번은 유씨성의 나이든 장기고수가 자녀가 아무도 없이 죽어서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조문선이 이를 듣고는 즉시 돈을 내서 사람을 시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주어, 주변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다섯째, 이무상(李武尙) : 백련교주(白蓮敎主)

 

1930년대 상해의 장기계를 평정한 인물로 사람들이 "백련교주"라 칭했다.

 

이부상의 자는 갱상(更上)이고, 호는 충걸(忠傑)이다. 1904년에 태어났으며 원적은 절강성 정해였다. 상해에서 일하고, 생활하여 상해 사람이 되었다. 이무상은 체격이 크고 일처리가 호탕하였으며 기우들을 잘 돌보아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장기에서는 그는 장기를 세심하게 두고, 변화가 많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소년시절, 이무상은 상해에서 전기공이었다. 시간이 남으면, 홍구의 장치로(長治路)에 있는 장춘차루(長春茶樓)에 가서 장기를 구경하다가 흥미가 일었다. 처음에 장기를 배울 때에는 홍구기왕(虹口棋王)이라는 별명이 있던 비춘생(費春生)에게 사사받았고, 마(馬)를 두개 떼어내고도 이무상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장기친구들이 그의 장기를 "취기"라고 놀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아주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읍묘의 사미헌차원(四美軒茶苑)에 고수가 많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사협손, 연학정(連學正), 임혁선(林奕仙), 주환문등의 전대고수들로부터 장기를 배웠다. 그리하여 '2마(馬)'에서 시작하여, '단마(單馬)', "이선(二先)", "일선(一先)"으로 기력이 성장했다. 20여세때는 그가 창국차실(暢國茶室)에 가서 대국을 하였는데 당시의 고수인 나천양, 오송정(吳淞亭), 장금영등과 대국을 하면서 처음에는 "이선"으로 대국해도 그들에게 패했다. 나중에는 "분선(分先)"으로 바뀌고, 마침내 서로 이기고 지고 하게 되면서 마침내 일류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무상의 이름은 상해에서 기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무상의 "백련교주"라는 별명은 한편으로는 이무상의 장기품격이 비교적 가볍고 영민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번은 그가 주로 말을 떼어주고 장기를 두는데, 주로 쌍마를 떼어주고 하는데 능했다. 1930년대초기에 이무상은 상해로 장기를 배우러온 가흥의 고기(高琪)등 청년고수들에게 쌍마를 떼어주고 20국을 두었는데, 그의 포가 한번 날아다니면, 오가면서 말들을 잡아서 고기등에게 쓴맛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실력이 뛰어난 것이외에도, "백련교주"라는 별명은 그의 협기(俠氣)와도 관계있다. 1931년 여름 안휘북부에 수재가 발생하자, 이무상은 나천양, 연학정등 장기고수들과 함께 상해 신신공사의 옥상화원에서 장기토너먼트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한달동안 계속되었고, 수입은 모두 이재민을 도우는데 썼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36년, 온주의 심태혁(沈態奕)이 처음으로 상해에 와서 장기를 두었다. 노서문의 차관에서 먼저 반민강(潘敏剛)이라는 적수를 만났다. 스스로 쌍마를 심태혁에게 떼어주겠다고 말하고 세 판을 두었는데, 쌍방이 분쟁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심태혁이 이치에 맞았지만, 그는 낯설고 물설은 곳이어서 손해볼 것을 두려워했다. 또 다른 측면으로 반민강도 장기를 지자 아주 화가나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우기게 된 것이다. 이무상은 그 사정을 들은 후 먼저 싸운 두 사람에게 각각 50대를 치고, 그 후에 스스로 반민강을 대신하여 장기를 두어 이 장기를 비기게 만들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