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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국학(國學)과 국수(國粹)

by 중은우시 2008. 6. 9.

글: 유몽계(劉夢溪)

 

국학(國學)이라는 단어는 다른 두 개의 비슷한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국학을 검토하려면, 반드시 또 다른 두 개의 단어를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고(國故)"와 "국수(國粹)"이다. 여기서는 국학과 국수의 관계를 논하기로 한다.

 

이분야의 전문연구를 정사거(鄭師渠) 선생이 그의 <<만청국수파(晩淸國粹派)>>라는 글에서 고증한 바에 의하면 "국수"라는 단어를 중국에서 가장 먼저 쓴 것은 양계초(梁啓超)가 <<중국사서론(中國史敍論)>>에서 가장 먼저 썼다고 한다. 즉, 1901년이다. 그런데, 미국 코넬대학의 Martin Bernal 교수가 1976년에 쓴 <<유사배와 국수운동>>이라는 장편의 논문에서 '국수'라는 단어는 1887년에서 1888년사이에 일본에서 유행하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풍부한 증빙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887년, 국수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메이지유신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었다. 그들은 서방세력을 일본이 이미 문명적으로(서구화되어) 다시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조계의 치외법권을 폐지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사실, 185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확대된 서구화풍주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각종 유럽식 풍습을 추진함으로써 정점에 달하게 된다(부락시 등 저 <<중국근대사상인물론. 보수주의>>, 대북시보출판공사,1985. 94쪽)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국수를 보호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단체가 형성되었다. 지식인 측면의 투사로는 먼저 삼택설령(三宅雪嶺)과 지하중앙(志賀重昻)을 들 수 있다. 1888년이후 새 간행물 <<일본인>>은 출판방침을 발표할 때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대화민족의 성장은 모두가 목도한 사실이다. 그의 현묘한 잉태로 우리의 독특한 국수(Nationality)가 배양되고, 이 국수는 일본본토에서 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서로 다른 환경에 따라 적응하였다. 잉태, 출세, 성장과 발양에서 계속 전성되고 탁마되었다. 그것은 이미 대화민족의 명맥인 전국지보가 되었다(상동)

 

그러나, 만일, "국수"라는 단어를 더욱 명백한 단어로 치환한다면 도대체 무슨 함의(涵義)일까? 지하중앙은 '국수'를 민족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Bernal은 '민족정수(民族精髓)"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일본의 국수파들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국수라는 것은 '하나의 국가의 특유한 자산으로 다른 국가가 모방할 수 없는 특색을 지닌 것'이라고 하였다.

 

Bernal은 아무런 의심없이 1898년에서 1905년까지의 기간동안 중국정치문화무대에서 활약한 지식인들, 예를 들면 양계초등은 분명히 일본 국수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그는 임공(任公) 선생이 1902년 황준헌(黃遵憲)에게 보낸 서신에서 직접적으로 '국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양계초의 관점은 황치량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류되어 있는데, 핵심단어는 "양성국민, 당이보존국수위주의(養成國民, 當以保存國粹爲主義, 국민을 양성하는 것은 마땅히 국수를 보존하는 것을 주의로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황준헌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이 있다. 그가 양계초에 보낸 서신에서도 일본에서 '국수가 일어난' 연유를 언급하고 있다. 장태염(章太炎)도 1906년 <<동경유학생환영회연설사>>에서 "국수로 종성(種性)을 자극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1905년 상해에서 창간된 <<국수학보(國粹學報)>>는 국수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발간 연구하는 것을 취지로 하였다. <<국수학보>>를 둘러싼 일련의 학자들은 장태염, 등실(鄧實), 유사배(劉師培)를 대표로 '국수파'라고 불리웠다. 또 다른 국수파의 대표인물인 황절(黃節)은 1902년에 쓴 <<국수보존주의>>라는 글에서 명확히 이 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유신때의 국수보본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국수라는 것은 국가의 특별한 정신이다. 옛날 일본유신, 서구화주의가 도도히 밀어닥찰때 그 흐름이 흘러넘칠 때, 돌연 하나의 반동력이 나타났으니, 바로 국수보존주의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국수"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다만, 하나의 사조가 널리 반응을 얻으려면, 외래영향만으로는 원동력을 가질 수 없다. 주로 만청시기에 중국자체의 문화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사조가 너무 맹렬하게 밀려오자, 중국인들은 이를 맞이할 시간은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자기문화전통에서 정신적인 지주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자각한 것은 장태염이다. 그는 스스로 "하늘은 국수를 부여했다"(절명서)고 하였다. 1903년 송서(宋恕)에게 보낸 서신에서, "국수가 날로 빛을 잃고, 서구화가 빛을 얻는다. 많은 중생들이 그 근본에서 점점 멀어져간다"고 썼다. 그리고 이전에 <<여이홍장>>이라는 글에서는 "천하에 변고가 많고 사방의 족속들이 쳐들어오니, 백성들의 피폐함을 생각해보니, 옛날의 도술로 이를 진흥시켜야겠다고 생각된다"는 말을 해서, 그런 뜻을 드러낸 적이 있다.

 

국수의 내함(內涵)에 대하여, 장태염은 주로 역사, 구체적으로는 언어문자, 전장제도와 인물사적의 세 가지를 꼽았다. 즉, 역사와 문화이다. 장태엄의 학문기본은 소학이어서, 계속하여 문자, 언어에 대한 연구에 주력했다. "고상(故常)을 잊지 않으면, 나라가 비록 영락해도 반드시 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장태염이 말한 '고상'은 청나라는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당나라 이전의 역사문화를 아주 중시했고, 그는 '문장의 우아함, 제도의 밝음, 인물의 고상함이 오늘날의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를 금치 못하게 한다"고 적었다. 장태염에게 있어서 역사문화와 학술사상이 국수의 주요내용으로 보았다.

 

<<국수학보>>의 또 다른 작자인 허수미(許守微)는 일찌기 국수를 명확히 정의하고자 했다: "국수라는 것은 한 나라의 정신이 의탁하는 것이다....실제로 나라의 근본 원천인 것이다" 장태염과 서로 다른 점이 거의 없다. 다만, 역사를 살펴보면,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언어문자, 전장제도, 인물사적이 많다. 설마 이런 것들을 모두 국수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소위 국수라는 것은 당연히 같은 사물들 중에서 뛰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즉 정화(精華)를 말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문명국가는 모두 자기의 언어문자, 전장제도와 인물사적이 있는데, 이것들을 모두 '국수'라고 일컬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허지산(許地山)은 1945년 <<대공보>>에 실은 한 편의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기했다. 그의 뜻은'수(粹)'라고 부르려면 기준을 너무 낮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기준은 당연히 높아야 한다. 특유한 사물이 되어야 할 뿐아니라, 오래전부터 내려온 풍숙이라고 하여 반드시 국수는 아니고, 한 민족이 아름다운 일로 여긴다고 하여 반드시 국수도 아니다. 그는 예를 들어 말하기를, 북경의 표준풍속에는 여섯가지가 빠질 수 없다: 즉, 천붕(天棚), 어항(魚缸), 석류(石榴), 조롱(鳥籠), 팔구(叭狗), 대아두(大?頭)가 그것이다. 만일 이것을 북경의 육수(六粹)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냥 속칭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그저 가정적으로 한 민족이 물질적, 정신적, 사상적으로 인류에게 혹은 최소한 본민족에게 중요한 공헌을 하고, 이런 공헌이 계속 공능이 있고, 계속 발전해야만 비로소 국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지산은 공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국수와 연결시켰다. 이는 물질화된 문명형태를 중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화, 조각, 비단, 종이, 젓가락, 두부, 그리고 정신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신(神)등등이다. 장태염이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수는 많은 진보된 국가에서 아주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 '국가의 계승물' 혹은 '국가의 유산'이라고 할 뿐이다"(이는 영문의 National Inheritance와 Legacy of the Nation을 번역한 것일 것이다). 문화학자들이 우수한 제도와 사상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그 목적이 보물찾기나 보물자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조상의 좋은 이야기와 유물을 얘기함으로써 민족의 과거성취를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노력하게 하는 데 있다"

 

허지산은 소설가 겸 비교종교학자였고, 연경대학 신학원을 졸업했다. 일찌기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종교, 철학과 민속학을 연구한 바 있다. 오랫동안 연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서거전에는 홍콩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1941년에 서거하였는데, 향년 49세였다. <<국수와 국학>>은 그가 서거하기 1년전에 지은 글이고, <<대공보>>에 연재되었다. 허지산의 국수문제에 대한 발언은 아마추어의 의견이 아니었다. 그는 '국수'라는 단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학리와 사실상으로 보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명확하다. 그는'수'와 '사(渣, 찌꺼기)'를 구분해야 하고, 다시 '수'와 '학(學)'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수'의 개념에 찬성을 해도 좋고, 찬성하지 않아도 좋다. 어떻게 '지꺼기'라는 우아하지 못한 단어를 가지고 와서 '수'와 대응시킨 것일까? 그리고 허지산 한 사람뿐아니라, 호적을 포함한 많은 문화적으로 혁혁한 신분을 가진 비평가들도,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호적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국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국수를 보존하자'고 소리높인다. 임금남 선생이 쓴글에서 고문(古文)은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나는 그 이치를 알지만 그것을 말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현재 많은 국수당이 이처럼 흐리멍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어찌 국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무엇이 국수이고 무엇이 국사(國渣)인지 알려면 반드시 평판의 태도를 가져야 하고, 과학적 정신을 가지고 국고(國故)를 정리할 실력을 가져야 한다."

 

관건은 "국수"라는 단어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의미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시기에 지하중앙을 대표로한 본국주의자는 '국수'를 민족성으로 해석했다. 아니면 그들은 일종의 무형의 정신으로 보았다. 만일 이런 해석을 중국으로 가져왓다면 필자의 생각으로 곤란한 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중국 혹은 중화민족의 정신을 가장 간결한 말로 개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땅은 넓고 물건은 많다. 사람은 많다"는 등의 말을 하고, "천행건, 군자자강불식"이라든지, "중용위대"라든지, "화이부동"이라든지, "천인합일"등등이 있는데, 당연히 모두 좋은 말들이다. 그러나, 이것을 중국의 무형 혹은 유형의 정신이라고 하고, 중국의 국수라고 한다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중국의 역사는 너무 길다. 그 동안 민족과 문화의 변천도 빈번하였다. 원래 한민족이 주체인 사회에서, 중간에 여러번 소수민족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당나라, 송나라의 정신과 원나라, 청나라의 정신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청나라때, 이미 민족정신을 가져야할 지식인들에게 정신이 없었다. 또 다른 말로 개괄하자면, 예를 들어 중국전통사회는 가족본위이고, 가족과 국가가 일체였으며, 유가사상이 중국전통사회의 핵심가치였고, 삼강오륜이 중국문화를 추상적으로 봤을 때 이상적인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이는 맞는 말이고 학술계에 이의도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우리가 '국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청말민초이래로,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현대사회가 건립되면서, '가국(家國)'은 일찌감치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  유가사상의 핵심가치도 이미 붕괴되었다. '삼강오륜'이 황제가 없는 사회에서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관자, 손자, 한비자는 확실히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다. 중국의 자랑이고, 민족의 영예이며, 중국문화의 경전이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학술사상은 학술사상인 것이다. 철학은 철학인 것처럼. '문명체'국가에서 사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슨 '수'를 따지겠는가?

 

그리하여, 장태염선생때부터, 중국에서 초기에 '국수'를 논한 사람들은 미이 '국수'의 의미를 중국전통에 부합하는 것들로 잡았다. 장태염의 언어문자, 전장제도, 인물사적이라는 국수삼항설에서, 이미 간단하게 민종겅신과 중국의 무형전신의 범위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국수'라기보다는 '국고'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장태염도 가장 좋아했던 말은 '국고'였지, '국수'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책도 <<국고논형>>이지, <<국수논형>>으로 이름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수'라는 말이 중국에 온 이후로 명나라이후의 유학처럼 하행노선을 걸었다. 그 정신가치의 측면은 점차 얇아지고, 물질화된 가치의 측면이 점점 강화되었다.

 

이는 바로 허지산이 '국수'로 거론한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와 ,조각, 비단, 종이, 젓가락, 두부등... 오치휘에 따르면, "이들 국고의 낡은 것들은, 첩이나 아편과 함께 명을 다할 것들이다"

 

지금은 경극(京劇), 중의(中醫), 국화(國畵)를 삼대국수(三大國粹)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당연히, 경극, 중의와 국화는 국수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서법(書法)과 쿵후를 빠트려서는 안된다.

 

이렇게 보자면, 허지산이 말한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살아있는지 여부'가 '국수'의 하나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 그저 유산으로 보존되는 것들이라면, 예를 들어 갑골문, 청동기, 진나라벽돌, 한간, 병마용, 송판서, 무측천묘는 아무도 '국수'라고 부르지 않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