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만청(滿淸, 만주족의 청나라)정부말기부터, 많은 중국인들은 한 가지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어떻게 해야 낙후되고 얻어맞는 국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중체서용(中體西用)"이건, "전반서화(全盤西化)"이든 하나의 기본출발점은 서방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배울 것인가? 오랫동안 이에 대하여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논쟁하는 쌍방은 보수세력이건 급진세력이건 모두 기존의 사례를 중국현대화의 길에서 모방할 대상으로 삼았다. 이 모방대상은 왕왕 성급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중국이 현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환상은 바로 일본이었다.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은 얼마전까지는 자잘한 소국이었는데, 명치유신이후, 짧은 시간내에, 세계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비록, 중국과 일본간에 당시 이미 청일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본을 중국이 가장 참고할만한 발전모델로 생각했다. 여기에 서방민족주의사상이 들어오면서, 일본은 처음으로 서방식민통치를 벗어난 아시아국가였고, 강대한 러시아를 이겼으므로,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도 일본처럼 서방국가들의 괴롭힘속에서 가슴을 펴고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 대한 환상은 보수파건 급진파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왕정위는 일본의 민족주의를 왕도(王道)라고 했고, 일본도 점령기간동안 자주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구호를 선전하고 했다. 실제로, 서방민족주의를 패도(覇道)로 보고, 일본민족주의(군국주의)를 왕도로 보는 것은 왕정위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스스로 제출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북경대학의 극단적 수구파교수인 고홍명(辜鴻銘)이 처음으로 제안한 것일 것이다. 고홍명은 일본을 동방민족현대부흥의 성공적인 사례로 보았고, 일본에 대하여 극력 찬미했으며, 일본인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오랫동안 강연하기도 하였다. 고홍명은 일본이 바로 중국의 모델이라고 하였고, 중국은 일본과 긴밀하게 협력하여야 비로소 부흥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홍명의 이러한 관념은 그의 특유의 것은 아니었다. 손중산도 소위 "대아시아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손중산은 1924년에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일양국은 현재 세계대세로 보면, 근본적으로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 양국인민은 우호적으로 손잡고 함께 다른 나라의 침략정책을 막아야 한다" 손중산은 이렇게도 말한 적이 있다: "수천년의 역사와 지위를 보면, 중국이 형이고, 일본이 동생이다. 현재 형제가 만나고 일가가 화목하다고 말하려면, 너희 동생되는 사람들이 너희의 형이 이미 십여년간 노예로 지내고 있으며 계속 고통받았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으며, 이런 고통의 원동력은 바로 불평등조약이다. 너희 일본은 동생으로서 형을 위하여 걱정을 들어주어야 하고, 형을 도와 싸워야 하고, 불평등조약을 폐지시켜주어 노예지위를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후에야 중국은 일본과 다시 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손중산의 이 말은 한편으로는 그의 일본에 대한 천진한 생각을 드러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일친선'의 전제가 일본이 앞장서서 중국과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왕정위는 나중에 손중산의 "대아시아주의"를 가지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러나, 그는 손중산이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해야한다는 전제는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과 또 다시 일련의 새로운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사실,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많은 중국의 혁명가들은 모두 일본에 대하여 호감과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손중산, 왕정위, 장개석, 진독수등의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 유학했거나, 일본을 혁명기지로 삼았다. 그 시대에 일본유학은 중국인들이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이었고, 일본유학생들의 친일정서는 문학가 노신을 포함하여 모두 일본을 중국의 모델로 생각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일본은 서로 달랐다.
노신이 일본에 간 것은 신지식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는 일본교수가 노신을 불러 함께 공자에게 제사지내러 가자고 한다. 그때 노신을 깜짝 놀란다. 노신에게 있어서.중국을 떠나 동영(일본)으로 간 것은 일본이 바로 옛것들을 탈피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일본은 다시 옛날 길을 가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고홍명은 일본을 높이 찬양했다. 아마도 일본이 현대화의 과정에서 많은 전통을 남겨두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가 보기에 동방전통은 현대화과정에서의 부흥이었다. 손중산도 일본은 중국에서 돈후하고 이웃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고, 정말 중국인민을 향해서 칼을 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현대화의 길로 들어선 후, 평화애호의 동방전통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고, 동방전통중 가장 나쁜 내용(황권사상)과 서방전통중 가장 위험한 사상(민족주의, 인종주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결합해서, 전체 아시아인민에 재난을 불러왔다. 중국현대화과정에서의 일본에 대한 환상은 철처하게 파괴되었다. 사실은 증명한다. 일본이 중국에게 보여준 것은 중국인들이 바랐던 동방전통의 아름다움과 서방문명의 선진성이 아니라, 동방전통의 추악한 점과 서방문명중 가장 야만적인 성분의 결합이었다. 바로 서방제국주의의 패권과 인종주의적인 차별이다.
고홍명과 손중산은 모두 일본이 서방사조의 세례를 받아 악마로 변신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왕정위는 아마도 일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정치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환상이후에, 중국에서는 독일, 소련에 대한 환상이 나타났다. 이런 환상은 모두 하나하나 파괴되었다. 현재의 중국은 또 다시 미국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이것은 아마도 조급한 심리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중국의 현대화의 길에서 국외의 선진적인 경험을 배우는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자주독립을 지키는 일이다. 자신있는 사람이라야만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한 국가가 자신이 없다면, 희망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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