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외탄화보
홍콩의 카두리산은 시끄러운 도시에서 조용함을 맛볼 수 있는 고급주택지이다. 풍수가 아주 좋아서, 유덕화, 진가신, 허지안을 포함한 홍콩, 대만의 연예인들이 이곳에 고급주택을 구입했다. 길가에 나무로 가려지지 않는 넓고 구불구불한 도로가 있고, 몇 그루의 이파리가 가는 용수와 소나무가 5층짜리높이의 옅은 황색건물을 감싸고 있다. 작은 건물의 테라스에는 꽃이 막 피어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송이랑의(宋以朗) 집은 이 황색작은 건물안에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파트에서 송이랑은 근 50년을 살았다. 장애령은 이 아파트에서 반년을 거주한 바 있다. 그 때는 1961년의 여름이었다. 장애령은 자신의 미국남편 라이아를 위하여 의료비를 모으는 중이었고, 홍콩에 돌아와서 두 개의 극본을 썼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남북화>>의 속편인 <<남북일가친>>이었다. 그 때의 그녀는 친구인 송기(宋淇)와 광문미(鄺文美) 부부의 집에 거주했다. 당시 12살이던 송이랑은 방을 장애령에게 내주고 자신은 거실에서 잤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의 장애령은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머리를 박고 글을 썼다.
50년이 지났다. 1995년 9월 8일, 장애령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서 사망했다. 1992년 2월 14일에 쓴 유서에서 그녀는 "일단 세상을 떠나면, 모든 재산은 송기 부부에게 증여한다"고 쓰고 이 유언을 임식동으로 하여금 집행하도록 지정했다. 장애령의 장례식을 치른 후, 임식동은 14개의 상자를 가득채운 장애령의 유물상자를 송기부부에게 부쳐왔다. 유물을 받은 후, 송기부부는 정리를 거쳐 11개의 상자는 장애령과 수십년 출판협력관계를 유지했던 타이페이 황관출판사로 보내어 보관하도록 넘겨주었다. 그리고 수백통의 그들과 장애령의 서신과 합계 3상자는 집안에 보관했다.
1997년, 미국에 있는 학자 장착이 미국 서던캘리포티아대학에 "장애령문문특별소장센터"를 만들었다. 당시 송기는 막 세상을 떠났다. 광문미는 두 상자에 이르는 장애령의 유고를 보냈는데, 그 중에는 <<해상화>>의 영역초고도 있었다. 그것은 장애령이 생전에 계속 번역하고 싶어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1985년에 장애령은 경찰에 신고해서 그가 거의 18년간 번역한 <<해상화>>의 영문번역원고를 도둑맞았다고 한 바 있다. 현재 찾은 것은 비록 초고이지만, 그래도 아주 가치있는 문헌이었다.
이전에, 장애령이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을 때, 그녀를 주목한 사람은 적었다. 더구나 그녀의 유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장애령이 인기를 끌자, 장애령과 관련된 모든 것은 문화요 비지니스가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출판사들이 여러 명의로 장애령의 작품을 출판했다. 최근에 발견한 <<동기소년은 모두 천박하지 않다>>는 글, <<천지인>>이라는 미발표글은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잘 알지 못하는 장애령의 작품이나 이야기가 상자속에 숨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자와 관련한 인물인 임식동은 200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86세된 광문미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당사자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면서 장애령의 유물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가 관심거리였다
4년전에 송기부부의 아들인 송이랑은 근 40년의 미국생활을 접고, 홍콩으로 돌아와서 모친을 돌보게되었다. 동시에 부모를 이을 책임도 물려받았고, 장애령의 유물을 지켜야 했다. 국외의 중국주재 미디어인사들에게 56세의 송이랑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통계학 박사이고, 전세계 두번째로 큰 통계회사인 KMR의 고문이다. 그리고 FBI에서 법정통역을 맡은 바도 있으며 FBI에서 도청한 범죄조직의 밀수, 마약판매, 협박의 녹음자료를 영어로 번역하였었다.
지금까지 송이랑은 매일 79세된 집사, 필리핀가정부와 함께 모친을 돌보고 있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심지어 말을 잘 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블로그의 번역도 모두 원문에 아주 충실하게 한다. 개인적인 의견을 추가한 적이 없다. 이렇게 3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지금 집안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가구도 50년전과 똑같다. 그저 장애령이 일찌기 머물렀던 그 방만 광문미를 돌보기 위한 화장실로 바뀌었다.
송이랑이 부모를 따라 상해에서 홍콩으로 온 것은 1949년이었다. 그 때 송이랑은 태어난지 4주째였다. 송이랑의 부친인 송기는 연경대학의 비교문학과를 졸업했다. 주여창, 조강등과 함께 7대 홍루몽전문가로 불리웠다. 송이랑의 모친인 광문미는 상해세인트존스대학 문학과를 졸업했다. 일찌기 방형이라는 필명으로 세계명작인 The Legend of Sleepy Hollow를 번역한 바 있다. 상해에 있을 때, 송기와 광문미는 모두 문화계의 명인이었다. 프랑스조계에 있는 가든식 서양집에서 부뢰와 이웃집에 살았다.
탁자위에는 오래된 소가죽 종이상자가 있었다.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센티미터와 15센티미터이다. 이처럼 겉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종이상자의 안에 담겨있는 것은 모두 장애령의 유물이다. 이것이 바로 14개의 상자중 3개의 상자이다. 그 중에 장애령의 증명서, 편지, 원고를 제외하고 의복,루즈등의 일상용품도 있고, 심지어 장애령의 가발, 안경, 시계, 만년필, 화장품 및 6쌍의 신지 않은 실내화(나중에 버렸음)도 있었다.
장애령의 팬이라면 종이상자의 모든 물건은 장애령의 세계로 들어가는 더없이 고귀한 보물일 것이다. 그 중의 어느 것이라도 손에 넣는다면 그들은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송이랑에게 있어서, 이 3개의 상자는 그저 부모의 한 친구가 그들 송씨집안에 남긴 유물이다. 송이랑은 장애령의 팬도 아니다. 그리고 장애령의 모든 작품을 본 적도 없다. 그는 장애령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이 크지는 않지만, 송기부부의 아들이므로 그는 부모의 책임을 물려받아 다해야 하고 장애령의 유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58세된 송이랑은 여전히 독신이다. 홍콩과 대만의 매체들이 "그가 장애령과 동거한다"라고 제목을 붙였을 때도 우습다고 생각은 했지만 몇 권을 사서 집에 놔두었다. 말하자면 그도 장애령처럼 구속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송이랑은 웃으면서 기자들을 맞이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장애령의 유물을 꺼내놓았다. 그는 일찌기 장애령의 팬이 자기집을 찾아와서 이 물건들을 만지면서 아주 즐거워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웃으면서 격자무늬가 있는 작은 노트를 꺼낸다. 40페이지 정도인데, 장애령의 아무도 모르는 중문소설 <<이향기>>였다. 남흑색의 만년필로 장애령필체로 써내려갔다. 그러나 이는 끝을 맺지 못한 잔고였다. 페이지마다 고쳐쓴 곳이 많았다. 작가가 글을 쓸 때 어떻게 말들을 골랐는지를 알 수 있는 흔적이다. 송이랑에 의하면 상자안에는 장애령의 영문소설원고인 "The Book of Change" "The Fall of the Pagoda" 및 단편 "The Long River"가 있다고 한다. 장애령은 자기의 작품을 송기에게 보내서 먼저 읽어봐달라고 했었다.
곧, 송이랑은 상자안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이것은 장애령의 개인 필기였다. 빽빽하게 쓰여 있는데, 중문과 영문이 섞여 있고, 글자는 작으면서도 날려썼다. 자세히 보아야 할 수있었다. 긴 글은 아니고, 짤막한 글들이었다. 약간은 생활메모같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쓴 잡기같기도 했다. 송이랑은 아무렇게나 펼쳐보였는데 곳곳에 보배가 있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것에 익숙한 것같았다. <<이술기>>는 황관출판사에 보내서 출판할 것인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발표하겠습니까.
최근에 송이랑은 장애령의 유물을 정리했다. 그리고 홍콩대학 신문및미디어연구센터의 "공공문화계획"에 넘겨주었다. 홍콩대학은 "장애령의 홍콩전기(1939-1941)"이라는 공개전람회를 개최하여 장애령의 "<색.계>를 논한다"의 초고를 전시했다. 발표한 적이 없는 홍콩대학학생기록, 미발표의 개인필기 및 서로 다른 버전의 개인 저작, 사진, 개인증명서, 장애령이 홍콩을 배경으로 하여 쓴 드물게 보는 영문소설로 원판은 미국잡지에 발표한 Stale Mates(중국어로 번역될 때는 <<오사유사(五四遺事)>>로 하였음) 및 산문의 중문원고등이 전시되어 홍콩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9일동안 관람인원이 약 5000명에 달하였고, 전람기간을 다시 2주간 연기할 정도였다.
"나는 이번 전람을 통하여, 장애령의 진귀한 자료, 문학가치와 분투정신이 전승되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영원히 이 유물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한 송이랑은 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깊이 생각해본 후에 이 유물들을 정규적인 학술단체에 기증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송기의 부인인 광문미는 일찌기 장애령이 소설에서 "8시의 신데렐라"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당시 장애령이 처음 홍콩에 왔을 때, 생활을 위하여, 미국신문처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로렌스의 "작은 사슴" 오웬의 "머리없는 기사"등을 번역했다. 바로 그 미국신문처에서 광문미와 장애령은 동료였다.
장애령은 홍콩에서 상해의 옛친구 광문미와 송기를 만난 것이다. 송기와 광문미는 장애령의 재주를 아꼈고, 이해하고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장애령은 이들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겼다. 1955년 가을, 장애령은 클리블랜드 프레지전트호를 차고 홍콩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부두에서 마중나온 사람은 송기부부 뿐이었다. 선박이 일본에 닿자 그녀는 6페이지의 서신을 보내어 송기부부에게 이렇게 썼다: "헤어진 후 계속하여 방에서 울었다. 저번에 상해를 떠날 때 기뻤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여기까지 쓰다보니 또 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이후 송기부부와 장애령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후 장애령을 도와 출판업무들을 처리하기도 했다. 이들 부분은 장애령의 문학고문, 브로커, 대외연락담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번역가이자 저명한 홍루몽평론가인 송기는 자주 장애령의 작품에 대하여 가치있는 코멘트를 해주었다. 당호 하지청이 소설사를 쓰겠다고 할 때, 바로 송기가 그에게 장애령을 추천했었따. 하지청은 읽어본 후 장애령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금쇄기>>는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중편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이로써 장애령의 문학적인 지위는 확실해 졌다.
라이야가 죽은 후, 장애령은 세상을 피해서 고독하게 살았다. 친구도 없었다. 오로지 송기부부와 연락하고 지냈다. 송이랑은 장애령과 부모간에 오고간 서신에서 그녀는 항상 몇마디 글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곤 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신분증을 잃어버렸다. 병이 났다. 이사를 갔다는 등이다. 장애령이 송기부부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페이지마다 자신의 서명을 하고, 첫머리에 "To Mac and Stephen"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송이랑의 영문이름인 Roland가 듣기 좋다고 말하곤 했다.
모친인 광문미가 병에 든 후, 세개의 상자는 집안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송이랑은 우연히 꺼내서 열어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을까 해서 였다.
1992년 2월 14일, 장애령은 유서를 작성했다. 같은 해 3월 12일, 송기부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장애령은 "KD(이개제로서 장애령의 고모부)에게 대륙의 판권을 부탁하기 위하여, 나는 문구점에서 위임장 양식을 구했다. 가는 김에 유서 양식도 샀다. 공증을 하기만 하면 변호사를 찾지 않아도 된다" 누가 알았으랴. 십여년후, 이 일 때문에 다시 변호사를 찾아야 하고 법정에 서게 될 줄은.
지금 장애령의 작품은 인터넷에서 무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많다. 송이랑은 스스로 인터넷을 잘 다루는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인터넷에서 무상으로 읽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장편을 읽으려면 힘들고, 적지 않은 오탈자가 있어 말이 연결되지 않아서, 후세에는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소설이라면 역시 책을 사서 자세히 읽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정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장애령 작품의 원래 모습을 유지시키고 싶다"
다만, 송이랑이 처음으로 북경에 갔을 때, 왕부정서점에서 한 벽을 다 차지한 서가에서 한 권도 정식으로 수권받은 출판사가 출판한 것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했다: "나는 장애령의 작품을 완전하게 유지시킬 책임이 있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좋은 친구였다. 모든 사후의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였는데, 나는 부모의 자식으로서, 이것이 내 의무라고 본다. 언젠가 누가 장애령의 작품이 완전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과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출판시장에서 송이랑이 더욱 격렬한 방식으로 자기의 직책을 이행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대만황관출판사는 광문미의 이름으로 대륙에서 장애령의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에 대하여 법률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소송은 2년여를 끌었고, 승소했다. 송이랑은 40만인민폐를 배상금으로 받았다. 인터뷰에서 그는 마침 황관출판사의 전화를 받아쓴데, 대륙의 은행에 구좌를 개설해서 이 돈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배상금은 그저 잔돈푼만 남게 된다.
중국희극출판사, 문회출판사, 절강문예출판사등 6개의 출판사를 상대로 한 소송은 진행중이다. 이 6개의 출판사는 공동성명을 발표해서, 장애령의 유언과 송씨집안이 저작권을 보유하는 것이 합법적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송이랑에게 만일 패소하면 어쩔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나는 패소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손해보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황관출판사는 지금까지 무상으로 그를 대신하여 장애령의 판권에 관한 일들을 처리해주었따. 황관은 15%의 인세를 송이랑에게 주었다. 그는 2007년 1월 부터 6월까지의 출판목록을 보여주었다. 반년동안 225,218위안신대만화폐였다. 20%의 소득세를 제외하고, 평균 매월 겨우 3000홍콩달러 정도이다. 외부엣는 장애령의 인세수입이 천문학적 숫자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송이랑이 받는 것은 이 정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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