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카석주의 머릿부분
글: 진명원(陳明遠)
비교문명학의 연구를 함에 있어서, 필자가 특히 주의한 것은 전세계에서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의 사건과 인물을 횡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다. 그중 기원전3세기 양대제국의 군주인 중국의 진시황과 인도의 아쇼카왕은 아주 흥미있는 인물들이다.
기원전221년에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기원전261년에 처음으로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왕조(Maurya, 중국과 불교서적에서는 '孔雀王朝'로 번역함)는 거의 동시대에, 모두 잔혹한 무력정복을 통하여 제국의 통일대업을 완수한다. 그리고 둘 다 단명왕조였다(진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멸망하고, 마우리아왕조는 기원전 187년에 멸망한다). 비교할 내용이 재미있고도 풍부하며 의미도 깊다. 아래에서는 그저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진시황은 중국의 천고일제(千古一帝)이지만, 아쇼카왕도 인도의 '천고일제'이다. 진시황에 대하여는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 간략히 소개하고,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에 대하여 중점을 두어 적기로 한다.
진시황(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
그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며, 어떤 사람은 그를 '천고일제'로 부른다. 이름은 정(政)이고,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며, 조(趙)나라에서 태어난다. 기원전 246년, 나이 13세의 진왕 영정이 즉위한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정은 태후와 상국(相國)인 여불위(呂不韋) 및 환관 노애(??)가 장악하게 된다. 기원전 238년(진왕정 9년), 22세때 수도인 옹성에서 성인의식을 진행하고 정식으로 등극하며 조정을 친히 관장하게 된다. 진왕정은 여불위와 환관 노애를 물리치고, 이사(李斯), 위료(尉?)를 중용하여, 육국을 합병하는 전략에 착수한다.
기원전230년, 진나라는 내사등(內史騰)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한(韓)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한왕안(韓王安)을 포로로 잡으니, 한나라가 멸망한다. 기원전229년, 진나라는 장군 왕전(王?)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조(趙)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군대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진입하고, 조왕은 지도를 바치며 투항하니, 조나라가 멸망한다. 기원전225년, 진왕운 왕분(王賁)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위(魏)를 공격하게 한다. 하수(河水)와 구수(溝水)를 위나라 수도 대량으로 끌어들이니 위왕이 투항하여, 위나라가 멸망한다. 기원전223년, 진왕은 왕전으로 하여금 병사 60만을 이끌고 초(楚)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초왕 부추(負芻)가 포로로 잡히니, 초나라가 멸망한다. 일찌기 227년에 연(燕)나라태자는 형가를 보내어 진왕을 암살하고자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진나라는 이 틈을 타서 연나라의 수도 계성(?城)을 공격하니, 연왕희(燕王喜)는 요동으로 달아난다. 기원전 222년에 진나라가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희를 포로로 잡으니 연나라가 망한다. 기원전221년(진왕정26년)에 진왕은 왕분을 보내어 북에서 남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제왕건(齊王建)을 포로로 잡으니, 제나라가 망한다. 기원전230년부터 기원전221년까지 10년간, 6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진시황의 39세때 통일대업을 완수한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첫번째 중앙집권전제황조인 진황조를 건립한다. 동주의 여러 제후들이 할거하여 다툰 550여년의 춘추전국시대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치는 가혹하면서 포악했다. 진시황의 12년 통치기간동안, 문제점들이 이미 드러났고, 2세에 이르러 인민의 반란으로 붕괴되고 만다.
진시황은 전무후무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큰 줄거리만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행정통일; 봉건제폐지, 군현제확립, 이로써 이후 2천년 중국황제제도의 표준모델이 형성됨.
둘째, 문자통일; 한자를 중국문화의 기초로 확립
셋째, 화폐와 도량형 통일; 국민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공상업을 발달시키는 기초가 됨
넷째, 교통통일; 차동궤(車同軌), 도동거(道同距), 진직도(秦直道)의 건설
다섯째, 사상,학술통일; 언론자유엄금, 관학강화, 분서갱유
여섯째, 장성축성; 국가경계가 됨,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분계선이 됨
일곱째, 흉노토벌; 하투지역을 되찾음.
여덟째, 영거(靈渠) 축조; 주강유역의 통제를 강화함
아홉째, 호화궁전(아방궁)과 진시황릉의 건설
.....
인도 마우리아왕조 아쇼카(Asoka)왕
(재위기간: 기원전273-기원전236년;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268년-기원전232년)
아쇼카왕의 지명도는 인도에서 비길 자가 없다. 그의 인도역사에 대한 영향력은 모든 황제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업적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생은 '흑아쇼카왕'시대이다. 이때는 왕위를 안정시킨 다음, 무력으로 북인도를 통일한다; 후반생은 '백아쇼카왕' 시대이다. 불교를 전체 인도와 중국바깥으로 전파하고 세계적인 종교의 번성을 가져온다.
아쇼카왕은 한자로 아육왕(阿育王) 혹은 아수가왕(阿輸迦王)이라고 한다. 의미는 '무우(無憂, 근심걱정이 없음)'라는 뜻이며, 마우리아왕조의 세번째 국왕이다. 조부인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17년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군대의 침입을 막아낸다. 이후 마가다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중국과 불교에서는 華氏城이라 한다)로 진격해서 난다왕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우리아왕조를 세운다. 찬드라 굽타가 재위할 때에는 3만의 기병, 60만의 보병, 900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가지고 있어, 군사력이 아주 강대했다. 기원전298년, 조부인 찬드라 굽타가 서거한다. 부왕인 빈두사라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 남으로 개척해서 16개나라를 멸망시킨다. 아쇼카왕은 조부와 부친의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찬란한 업적을 남긴다.
불가경전에서는 아쇼카왕이 어릴 때부터 불심이 강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는 피바람 속에서 성장한다. 18세때 아반티성의 총독에 임명되는데, 단차시라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다. 기원전273년, 부왕인 빈두사라가 병사하자, 아쇼카는 파탈리푸트라로 와서 왕위를 놓고 다툰다. 전설에 따르면 99명의 형제를 죽이고서야 비로소 보좌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과장일 것이다. 다만, 왕위쟁탈전이 잔혹하고 치열했음은 알 수 있다. 4년간의 투쟁끝에 아쇼카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다.
아쇼카가 등극한 후, 여전히 그는 잔혹하고 살인을 좋아했다. 그는 일련의 전쟁을 일으켜, 시바국등을 정복한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아쇼카등극9년째인 기원전261년 방글라데시 해안의 가릉가국을 원정한 것이다. 이 전쟁은 마우리아왕조로 하여금 최남단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인도의 통일을 완성하게 한다. 다만 10만명이 피살되고 15만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는 참극이었다. 이 전투는 아쇼카왕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인도역사에서도 전환점이다. 아쇼카는 시산혈해의 장면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후회한다. 어려서부터 심성 깊이 묻혀 있던 불성이 권력욕에 덮여 있다가 이때 그의 측은지심을 자극한다. 그는 불교고승처럼 우바탄다와 길게 얘기를 나눈 후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불교에 귀의하며 철저히 회개한다.
당시는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립한지 이미 300여년이 지난 때였고, 그 동안 7명의 지법자(持法者)가 있었고, 2차에 걸친 대결집(大結集)이 있었다. 불교의 사체(四諦), 오온(五蘊), 팔고(八苦), 중생평등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었다. 다만, 같은 시기의 자이나교, 브라만교, 아기곤가교등 인도의 주요한 종교와 비교하면 아직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불교의 전파범위는 인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불교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교파로 분화되어있었다.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한 후, 불교는 급격히 발전한다. 아쇼카왕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살상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하였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그의 조칙과 정법(正法)의 정신을 절벽이나 석주(石柱)에 새겨 두었다. 이것이 유명한 "아육왕마애법칙(阿育王摩崖法勅)"과 "아육왕석주법칙(阿育王石柱法勅)"이다. 지금도 인도서북부와 아프가니스탄 및 동남해안의 각지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다.
그가 주창한 "정법"은 다음 내용이 포함된다: 다른 사람에게 인애자비할 것, 부모에 효도할 것, 친척친구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대할 것, 동물에 대하여도 생명을 중시할 것, 이것은 모두 중생은 평등하다는 것의 일부분이다; 선행을 행할 것, 다리를 놓고, 길을 닦고,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드는 것등이다; 다른 종교에 관용적일 것, 자이나교, 바라문교, 아기곤가교에게도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교파간에 공격을 금지하였다. 이들 "정법"은 불교의 기본정신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쇼카왕도 당시 이러한 필요가 있었다. '정법'을 실현하고,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아쇼카왕은 도로를 닦고, 역을 만들며, 자주 '정법달마'를 각지에 보내어 순시하게 하였고, 공익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병원과 보호구역을 만들었다. 간선도로의 교차점에는 국가식량창고를 두어 긴급할 때 쓸 수 있게 하였다. 도로의 양측에는 나무를 심었고, 3리마다 우물 하나를 팠으며, 여행객휴게소도 만들었다. 농업생산량을 제고하기 위하여, 각지에 운하를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완비된 관개시스템을 구축했다.
아쇼카왕은 불교승려들에게 많은 재산과 토지를 기부했고, 인도의 각지에 불교건축물을 만들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모두 84000개의 부처사리탑을 만들었다. 남방불교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아쇼카왕이 불교승려를 잘 봉양하였으므로, 6만의 사마외도가 불교에 섞여들어왔고, 그리하여 수도의 계원사(鷄園寺)에서 비구들이 7년동안 한번도 보살계(布薩戒, 매월 2회 개최하는 참회의식)를 행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승려의 혼란과 불교교파간의 분쟁을 막기 위하여, 아쇼카왕은 저명한 고승인 목갈리풋다 팃사 장로를 초청하여 1000명의 비구를 소집했다. 파탈리푸트라에서 불교사상 제3차 대결집을 거행한다. 여기서 사마외도를 몰아내고, 경전을 정리하여, <<논장>>이 편찬된다. 결집후, 아쇼카왕은 변방과 주변국가에 왕자와 공주를 포함한 불교포교단을 보내어 불교를 전파한다. 이것이 불교가 인도본토를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되는 시작이다. 인도공주가 스리랑카로 가서 불교를 전파할 때, 승려와 불교경전을 가져갔을 뿐아니라, 신성한 보리수가지를 친히 가지고 가서 심었다. 이 보리수는 스리랑카에서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불교는 스리랑카뿐아니라 세계각지로 전파되었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인내, 순종, 개인욕망의 소멸은 통치에 확실히 유리하였다. 아쇼카왕이 통치하던 마우리아왕조는 군주전제체제였고, 아쇼카왕은 행정, 군사, 사법등 측면에서 모두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전인도를 행성(行省)으로 나누고, 총독은 통상적으로 왕자가 담당했다. 그러나, 행성내부에는 여전히 자치 혹은 반독립의 부락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우리아왕조는 고도의 중앙집권을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36년(일설에는 기원전 232년), 아쇼카왕은 '호법명왕'이라는 존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다. 마우리아왕조의 운명도 그다지 길지는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반세기간 지속하다가 사라져 버린다. 인도는 다시 분할국면에 들어선다. 인도의 역사는 분할의 시기가 길고 통일의 시기는 짧았다. 통일시기라고 하더라도, 대량의반독립의 지방왕공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우리아왕조의 첫번째 인도통일의 공로는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아쇼카왕의 노력으로 민간조직으로부터 인도최대의 종교로 발전한다(근 천년후에 브라만교에 의하여 대체된다). 아쇼카왕은 이웃나라에 불교를 널리 퍼트리고,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가 되도록 하는데 공헌을 세운다. 남아시아외에 아시아각지는 모두 일찌기 불교의 세력범위였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1세기경 불교가 전래된 이후, 바로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기 시작한다.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종교이고, 몽고, 한국, 일본등지에도 불교는 널리 퍼지게 된다. 인도차이나의 태국, 버마에서는 불교가 아직도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역사상, 아쇼카왕은 석가모니에 이은 두번째로 중요한 인물이 된다.
아쇼카왕을 기독교를 창도한 콘스탄티노플황제와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쇼카왕은 불교에, 콘스탄티노플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처음에는 모두 반대편에 섰다가 결국 그 종교에 귀의하고, 극력 전파하게 된다. 이리하여 불교와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한다. 불교가 창립된 때로부터 아쇼카왕때까지가 300년이고, 기독교가 창립된 때로부터 콘스탄티노플황제때까지가 300년이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운명적인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한다. 아쇼카왕과 콘스탄티노플황제는 모두 종교대집회를 개최하여 서로다른 교파간의 분쟁을 조정하였고, 각각 불교와 기독교의 교의를 만드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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