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6국을 통일한 후,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는데, 그 중, 정신적으로 통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분서갱유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중 "분서(焚書)"에 대하여는 상세한 기록이 되어 있으나, "갱유"에 대하여는 아주 개괄적인 기록만 남아 있어, 그 진실을 둘러싸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기원전213년, 진시황은 함양궁에서 유생들을 모아서 주연을 베풀었다. 주연에서 여러 유생들은 분봉제(分封制)와 군현제(郡縣制)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왕관(王?), 순우월(淳于越)등은 분봉제의 실행을 주장했고, 승상인 이사(李斯)등은 군현제를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진시황은 이사의 입장에 찬동했고, 이사의 주장에 따라, "분서"를 시행했다. 진기(秦紀, 진나라 사서), 의약, 점복, 농서 및 국가박사가 소장한 <<시경>>, <<서경>>, 백가서이외에 열국의 사적, 개인소장의 유가작품, 제자백가저작 및 기타 전적은 모조리 불살랐다.
그리고, 장생불사를 위하여 진시황은 서복, 후생, 노생등을 보내어 선약을 구하게 하였는데, 후생, 노생등은 원래 진시황의 곁에 있던 방사(方士)로 오랫동안 장생불사약을 구해왔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진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이들은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후생, 노생은 멀리 도망친다. 이에 진시황은 대로하였고, 함양에 있던 모든 방사를 붙잡아 조사하여, 후생과 노생을 붙잡고자 한다. 결국 그는 460명을 모조리 함양에 갱을 파서 산채로 묻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의 "분서갱유"이다. 역사서적에는 이에 대하여 여러 군데 기록이 있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도 계속되었다. 분서에 대하여는 기록도 비교적 상세하고 이견이 드물지만, 갱유에 대하여는 여러 이견이 나타난다. 갱유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갱유의 횟수가 1번이라는 사람도 있고, 2번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하여 간략히 논쟁의 촛점을 살펴보자.
이슈 1 : 진새황은 갱유를 한 적이 있는가?
'분서갱유'는 지금까지 진시황이 법가를 채택하고 유가를 말살한 중요한 증거로 삼아왔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소위 진시황의 '갱유'라는 것은 실제로는 '갱방사(坑方士)'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이 주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서적에 이 사건에 관련하여 언급되는 인물은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두 명과, 한중(韓衆), 서불(徐?)등 4사람이다. <<사기>>에 따르면 이들의 활동은 신선을 찾고 장생불사약을 찾는데 국한되며, 4명은 모두 신선학파의 방사(方士)들이다. 그들이 진시황을 위하여 신선을 찾아나서고, 장생불사약을 찾아나선 것은 순수히 방사의 활동이고, 결국 성공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진시황에 속았다고 느끼고 이들에게 대노한 것이었다. 이는 그저 후세 군주들이 화가나서 많은 사람을 임의로 죽인 것과 성격이 동일하며, 단지 연좌된 사람이 많았을 뿐이고, 그러다보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았을 뿐이며, 그것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후생, 노생 두 사람이 진시황에게 무도하다고 말한 바 있어, 약간은 유가적인 관점에 흡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유가적인 정치주장이나 학술관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사마천이 "분서갱유"사건을 기록하였는데, 이때 산채로 묻었다는 사람은 "방사" 혹은 "방술사(方術士)"였으며, 명확하게 상대가 신선학파의 사람들임을 명시했다. 한나라초의 대유학자인 가의, 동중서도 진나라의 정치에 대하여 여러번 논평을 했는데, '분서'는 언급했지만, '갱유'를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다. 한나라는 진나라와 시기적으로 가깝고, 가의와 동중서는 박학하였으므로, '분서갱유'에 대하여도 잘 알았을 것이다. 만일 진시황이 묻은 것이 확실히 유생들이었다면, 유학을 존중한 가의나 동중서가 이를 빠트렸을 리가 없다. 이로써 보면, '갱방사"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진실에 좀더 가까운 것일 것이다. 나중에 동한시대이후, 시간이 진나라에서 멀어질 수록, 진나라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나빠지고, 유가의 지위가 공고히 되고, '금문학파'의 학자들이 허황된 주장이나 심지어 허위를 조작하는 등의 기풍이 성행하여, 진시황을 공격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반고는 '술사(術士)'라고만 표현하여, 그 범위를 넓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그는 <<한서. 유림전>>에서 "진시황에 천하를 합치고, 시경, 서경을 불태우고, 술사를 죽였다. 육학은 이때부터 없어진다"라고 하여 '술사'에 마치 '유행'인 것처럼 표현했다.
둘째, 피살자들의 죄명은 "황제비방"이었고, 그들의 믿음이나 유가학설의 전파가 아니었다. 즉, 진시황을 분노하게 한 것은 어떤 일파의 정치적인 주장이나 학술적인 견해가 아니라, 방사들이 그를 속여 엄청난 하사금을 받아가고서도, 장생불사약을 구하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방하고, 도망쳐 버렸다는데 있었다. 황제가 기만당했으므로 그들을 처벌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갱방사'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다. 함께 죽이면서, '문학, 방술사' 460여명을 산채로 죽였고, 이 460여명중에는 유가학파의 인물이 있을 수는 있으나, 진시황은 이들이 유가학파이거나 유가학설을 전파했기 때문에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갱유"라고 칭해서는 곤란하다. (뿐만아니라,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34년의 분서에서도 불태운 것은 민간이 사사로이 소장한 백가의 책이어서, 유가의 책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피살된 460여명이 모두 방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대표인물인 후생, 노생으로 추정하면 피살자의 주요한 인물들은 방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살원인도 유가의 정치주장이나 학술견해와는 무관하였다. 그러므로, 진시황이 '갱유'를 하였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갱방사'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학술계에서는 '분서갱유'에 대하여 전통적인 견해(즉, 분서도 있었고, 갱유도 있었다)가 우세하다. 다만, 갱유의 횟수에 대하여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슈 2: 갱유는 몇번 발생했는가?
진시황의 갱유횟수와 관련하여, <<사기>>, <<자치통감>>, <<장서>> 및 현대의 <<중국통사간편>>에서는 모두 진시황의 갱유는 1회라고 한다. 즉, 기원전212년의 한번이 그것이라고 한다. 전백찬이 주편한 <<중국사강요>>에서도 이 관점을 택했다: "제2년(212년)에 갱유사건이 발생한다. 원인은 일부 서생이 진시황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그가 '형률을 마음대로 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임으로써 위엄을 세운다'는 등등의 말을 하였다. 진시황은 그들이 '요사스런 말을 하고,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보아 그들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460여명의 유생을 체포하여 전부 함양에서 갱살의 방식으로 죽였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은 최소한 두번 유생을 산채로 매장했다고 한다. 제1차는 바로 함양에서 발생한 460여명이고, 이것은 공개적인 갱살이었으며, 그 목적은 일벌백계의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제2차는 규모가 더욱 컸다. 한꺼번에 700여명을 갱살했는데, 이때는 비밀살해의 수단을 썼다. 방법도 교묘하고 잔인했다. 동한의 위굉(衛宏)은 <<조정고문관서서>>에서, 진시황은 여산온곡에 갱을 파서 오이(瓜)를 심고, 겨울에 오이가 익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는 핑계를 대어, 박사등 유생을 모두 여산에 와서 구경하도록 시킨다. 유생들은 이것을 놓고 논쟁을 그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의견을 얘기할 때, 진시황은 명을 내려 흙으로 덮어 이들을 묻어버린다. 700여명의 유생이 모두 산골짜기에 산채로 묻혔으나, 외부인들이 알지 못하여, 200여년간 비밀로 유지되어 왔었다고 하였다. 나중에 당나라때 장수절이 <<사기정의>>를 편찬할 때, 이 사료를 사서에 편입시킨다. 당나라때 안사고가 주석한 <<한서. 유림외전>>에서도 이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기정의, 유림외전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진시황의 여산갱유도 당연히 사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수단이 비밀스럽고, 당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감히 드러내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산갱유를 직접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진시황의 갱유는 단지 1회이며, 함양갱유, 여산갱유는 사실상 1가지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적다. 왜냐하면 두번의 갱유가 장소도 다르고(전자는 함양의 공개갱살, 후자는 여산의 비밀갱살), 인원수도 다르기(전자는 460여명, 후자는 700여명) 때문이다.
특히 지적할 점은 맨 처음 제2차갱유를 기록한 위굉은 학문태도가 아주 엄격했던 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저작은 모두 장기간에 걸친 깊이있는 현장조사, 연구, 정리를 거쳐 나온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여기에 동한의 광무제는 비교적 개명한 군주여서, 학술연구를 중시했으므로, 위굉이 진시황의 제2차갱유를 폭로한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그리하여, 후대에 이 설을 채택한 글들도 적지 않다. 원나라때, 사학자는 <<문헌통고>> 권40, <<학교고>>에서, "시황은 어사사건을 유생들에게 물어 서로 고발하게 한 후 460여명을 죽였다. 그리고 겨울에 오이를 여산에 심고, 과실이 열리자, 유생들로 하여금 보게 한 후, 기회를 틈타 700명을 죽였다"고 적었다.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고금기자>>의 기술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진시황은 밀령을 내려 여산의 골짜기 따뜻한 곳에 오이를 심게 한 후, 과실이 열리자, 사람을 시켜 상소하게 하였다: 겨울에 오이가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박사 유생을 불러모아서 이를 말하게 하는데, 사람들마다 말이 달랐다. 모든 유생이 도착하였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기회를 틈타 흙을 묻었고, 모두 깔려 죽었다." 이를 근거로 어떤 학자들은 진시황의 갱유는 1차만 있었지 않고, 2차까지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찾기도 한다: 제1차에서 갱살한 것은 수도의 460여 박사, 제생이었고, 많은 유생들은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이들이 강렬하게 진시황의 통치에 반발했다. 심지어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 조차도 천하가 겨우 안정되었으니 멀리서 온 백성들이 모두 공자를 칭송하는데, 황상께서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중시하니 신은 천하가 불안해할까 저어됩니다. 부디 굽어 살피소서" 이런 주장은 당연히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아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진시황이 도대체 몇번이나 갱유하였는지에 대하여도 학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460명도 좋고, 700명도 좋고, 한번도 좋고 두번도 좋다. 분서갱유는(설사 방사를 묻었다고 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잔혹한 야만적 행위이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이천년간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가 과연 갱유를 하였는지, 했다면 몇번을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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