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릉을 둘러싼 논쟁

by 중은우시 2007. 6. 27.

정리: 방산인(方山人)

 

<<도시문화보>>와 <<금릉만보>>등 매체, 그리고 진경원(陳景元)이 시나닷컴의 블로그상에 연속하여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놀랄만한 견해를 밝힌 이후, 고고학계의 권위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나타내고 있고, 진경원도 이에 대하여 상대방과 새로운 학술대논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서 일반인들에게 쌍방이 논쟁을 벌이는 최신 이슈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정방(正方) : 진용관(秦俑館) 관장(館長) 오영기(吳永琪)

 

오늘 날 사람들은 진시황이 확실히 여산(驪山)아래에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 주요한 근거는 2천여년전의 사마천이 <<사기>>에 그렇게 기재하였기 때문이고, 동시에 풍부한 실물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고연구자들이 현지에서 출토한 문화재의 명각(銘刻)에서 진나라때의 지명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호북에서 출토된 운몽죽간, 호남에서 출토된 용산죽간의 동시대문자와 대조하면, 그들은 진나라때의 글쓰는 습관에 부합한다. 병마용에는 진나라때 장인들이 새긴 문자와 진시황릉의 기와에 있는 글자와 비슷하다는 점은 양자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건국후 50여년간의 고고학적 발굴과 복구를 통하여, 현재 이 일대에는 고대건축, 성벽, 봉토, 묘지, 배장갱(陪葬坑)등 육백여개가 있는데, 이런 규모와 배치는 만일 진시황릉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사서에는 진시황이 "7월에 사구(沙丘)에서 사망하고, 9월에 함양에 돌아와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시신이 썩었을 것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서 역사상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는데, 포어(鮑魚)를 놓아둠으로써 시체썩는 냄새를 없앴다는 기이한 내용도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반방(反方) : 건축사학자 진경원

 

<<사기>>에서는 진시황이 즉위하자마자 자기의 묘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정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시황의 즉위초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조상묘부터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시황릉 자체에서 엄격히 중축선, 대칭배치를 지킨 건축군공사도 근본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내성, 외성 및 봉토등도 모두 죽은 후에 진행된 것이다. 거기에 깊이 파는 지궁(地宮)은 생전에 미리 파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한시기의 공사기술발전수준을 보았을 때, 진시황릉의 지궁구조형식은 한무제의 무릉(茂陵)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사기>>의 진시황릉 지궁에 대한 묘사는 진실일 수가 없다. 진시황의 유체를 혹서를 감수하면서, 천리먼길을 형태에서 함양까지 가져와 안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유는 노정이 너무나 길고, 날씨는 너무나 더웠으며, 도로는 너무나 좁았기 때문이고, 장례도 너무 괴이하였기 때문이다. 이 돌아오는 길은 도처가 몽염의 부대가 관할하는 곳인데, 조고(趙高) 등이 대외적으로 조그만큼도 죽었다는 소식을 새어나가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시체썩는 냄새만 하더라도 하북성밖으로 운구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산묘에는 의관만 묻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정방(正方) : 섬서고고연구소 장점민(張占民)

 

진시황릉 방원 일정범위내의 출토문물을 진시황릉의 배장묘, 배장갱으로 보는 것은 고립된 판단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황릉의 동쪽 외벽에서 350미터 떨어진 곳에, 고고학자들은 17개의 황자, 공주의 배장묘를 발견했다. 외장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100여개의 마구갱(馬廐坑)을 발견했다. 황릉외성과 병마용의 사이에는 물이 흐르던 옛물길이 있는데, 지리적으로 보면, 그곳에 배장갱을 만들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성벽 1천여미터 떨어지고 지세가 넓은 곳에 병마용 배장갱을 만드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다. 만일 진경원이 말하는 것처럼, 병마용이 진선태후의 배장이라면 우리의 이전 고고발굴경험에 의하면 진나라 태후의 능원에도 성벽이 있어야 한다. 얼마전에 우리는 하태후묘(夏太后墓)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도 아(亞)자형의 묘도가 있었다. 군왕묘와 규격이나 형태가 비슷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이 어떻게 선태후의 능묘이겠는가? 병마용갱의 후면에 있는 보잘 것없는 묘는 탐측한 바에 의하면, 그저 단묘도(單墓道)이고, 일반 대신묘의 규격에 불과하고, 하태후의 묘장에 전혀 못미친다. 진소양왕 모친이며 진나라에서 가장 대단했던 태후인 선태후의 묘장규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못미친다.

 

나는 진경원이 유력한 증거도 없으면서, 불리한 증거에 대하여는 곡해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어떤 동과(銅戈)에 "삼년상방여불위(三年相邦呂不韋)"라고 글자를 새겼는데, 이는 1호갱앞의 다섯 탐방이내에만 하더라도 출토된 명각은 "사년" "오년" "칠년"등 글자를 가진 10여건의 동과가 있다. 이런 글자모양을 보면, 실제로 병마용의 연대를 확정하는 "직접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십육년사공모조(十六年寺工某造)"와 같은 글자가 있는 동피(銅?,구리바늘)이 발견되었는데, '사공'은 중앙에서 공업을 관리하는 하나의 관서이다. 그리고 진시황시절에만 있었다. 진경원은 동과는 후인들이 집어넣은 것이거나, 후세에 난전중에 딸려들어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들이 발견된 것은 병마용의 저층이고, 고고학적으로 동일한 지층에 속한다. 선태후보다 70년이나 지난 후의 동과를 선태후의 배장갱안에 넣었다는 것은, 컴퓨터나 자동차를 진시황릉에 넣었다는 것처럼 황당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병마용갱은 "반지하과동식"의 토목건축을 가지고 있는데, 진시황릉내와 외성벽과의 사이에서 발견된 다른 모든 배장갱의 품격도 거의 같은 모양이다. 병마용갱에 깔려있는 전석도 진시황릉궁전건축과 규격이 일치한다.

 

반방(反方) : 건축사학가 진경원

 

1974년 7월 15일, 진용고고대가 들어갔을 때, 그리고 이전의 반달동안, 진용은 일찌감치 명명되어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먼저 이름을 지은 후에 나중에 발굴한 것이 아닌가. 어느 사서에 진시황릉이 56.25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고 적혀 있던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산자락에서 발견된 모든 물건은 맞는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고 모두 진시황릉의 배장품으로 취급하는가? 예를 들어: 진시황릉주위의 그렇게 많은 고고학적 발견, 병마용, 동차동마, 석개갑, 진용관은 언제 한번 과학적인 논증을 거쳐 하나하나 일일이 진시황릉의 배장갱이라고 확인받았는가? 진용관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진시황릉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이고, 이 곳에는 다른 선인, 선조의 묘지가 없고, 후손들도 이 곳을 묘지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다. 주나라, 진나라에서 명청에 이르기까지, 풍수가 좋은 곳은 아주 부족했고, 묘지의 쟁탈전은 역대이래로 극심했다. 거의 모든 제왕이 능묘를 만들 때는 기존의 땅을 점용했던 것이고, 수천수만의 다른 사람 묘지를 부수고 만들었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계속하여 엄격하고 과학적인 논증을 거치지 않은 진시황릉의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장관이대(張冠李戴, 장씨의 갓을 이씨가 쓰다)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것이 아닌가.

 

진시황의 조모인 하태후의 묘장에 대하여도 그는 2만자의 자료로 반박한다; 동차마에 대하여도 2만자의 고증을 했다; 진선태후능의 위치에 대하여 "여불위과"의 내력, "사공피"의 기년등 문제에 대하여도 그는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논증을 했다. 예를 들면, 진선태후보다 70여년이나 늦은 "여불위과"가 어떻게 선태후의 배장갱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어떤 사람은 이것은 황당하며, 고고학을 모르는 소치라고 한다. 이것은 20년동안 진경원을 조롱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진경원의 회답을 들어보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완벽하고, 교란당하지 않은 묘장에서라면 후기의 기물은 절대 전기의 묘장에 나타날 수가 없다. 이것은 확실히 고고학적 상식이다. 그러나, 엄중하게 교란된 묘장에서는 후기의 기물이 전기의 묘장에 나타날 수 있다. 이것도 고고학의 기본상식이 아닌가? 진용관의 <<발굴보고서>>에는 분명히, "진용갱은 불에 타서  훼손되기 전에 엄중한 인위적인 파괴가 있었다....여불위과는 진흙층의 위에 있었다"고 적혀있지 않았는가? 이럼에도, 병마용내에는 절대 후기의 기물이 들어갈 수 없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을까?

 

정방(正方) : 복단대학 교수 진순(陳淳)

 

진경원 선생이 제기한 어떤 의문은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확실히 진시황릉과 병마용의 연구자들에게 이후의 연구에서 목표를 가지고 깊이 연구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연구출발점중에서 "상상, 추측"의 성분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 있다. 현재는 그저 '추정'의 수준에 머무를 뿐인 것이다. 나는 진용의 규격과 투입한 인력, 물력의 각도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천고일제의 매장규격이라고 본다. 진시황릉과 비교적 격이 맞는다고 본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열국중에서 어느 한 나라의 군왕도 이처럼 방대한 국력을 동원할 수 없었고, 이처럼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만일, 진선태후가 정말 이런 배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하는 진정한 제황의 능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촌(西楊村)-하화촌(下和村)의 어느 장소에 있어야 한다. 설마 병마용 뒤에 있는 작은 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외에, 진용갱은 진시황 생전의 기밀공사였다. 진경원이 어떻게 사적의 기재만을 가지고 진시황의 능묘와 배장갱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고, 6국의 귀족을 진압할 때,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동쪽에 있었고, 이는 열국귀족의 복벽을 방지하려는 욕심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후세 제왕릉의 "주축선"의 배치사고와는 달랐으므로 그를 기준으로 분석해서는 안된다. 현재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병마용을 진시황의 배장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병마용과 진시황릉의 지리적인 위치관계때문이다.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무슨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서에 기재한 것처럼 진시황이 자기의 내세에 대하여 그렇게 희망했다면, 진시황릉을 자신의 죽은 후의 궁전으로 생각했다면, 크기가 같은 지하군대를 몇킬로미터 바깥에 안치해두고, 자기의 안전을 지키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다지 의외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반방(反方) : 건축사학자 진경원

 

진용관의 고고학자들은 1974년부터, 거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모두 "상상, 추측"의 기초위에서 결정했다. "삼백장(三百丈)"도 상상이고, "56.25평방킬로미터"도 상상이다. "진시황릉이 서에서 동으로 향한다"는 것도 상상이다. "동피는 진시황기년병기"라는 것도 여전히 상상이다. "여불위과는 진시황릉배장품"이라는 것도 더구나 상상이다. 진순 선생이 견지하는 "그저 진시황만이 이러한 국력, 재력이 있으므로 병마용갱을 건조할 수 있다"는 관점은 또 어찌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겠는가? 지하에 큰 갱을 파는 것은 진시황이 팔 수 있고, 팔 돈이 있고, 진선태후는 팔 수도 없고, 팔 돈도 없는가? 진선태후는 진나라를 41년간 다스렸고, 사회가 가장 안정되었고, 국력이 가장 강성했다. 역사상 그녀는 2000여년전의 자희태후라고 칭해지고, 그녀도 "봉황이 위에 있고, 용이 아래에 있던(황제보다 태후의 권한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능력이 없고, 큰 갱을 팔 수가 없고, 진용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고고학계, 역사학계의 권위자분들이 무슨 기술경제상의 계산에 근거한 것인가?

 

상반되는 것은, 진경원의 진용관주장에 대한 모든 비판자료중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빈말이나 틀에 박힌 말이 없고,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믿을만한 자료와 엄밀한 논증을 거친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릉과 병마용간에는 "삼백장"의 위치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정확한 지형도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56.25평방킬로미터는 건설용지의 통제지역"이라는 주장을 제출하는데 이는 섬서성인민정부의 정식문건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는 "진시황릉은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견을 견지한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석흥방, 공계명 선생의 친필감정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는 진선태후릉의 위치는 서양촌부근이라고 보는데, <<사기. 정의>> <<섬서통지>> <<서안부지>. <<임동현지>>를 근거로 한다. 진용의 머리모양, 병기, 전차, 복색등등 모두 확실한 자료를 근거로 한다. 진시황릉, 병마용의 문제에 대하여 그는 이미 두 권의 책을 썼고, 모두 100만자에 이른다. 이로써 서안의 전문가들과 학술대논쟁을 한판 붙으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