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의 주인이 진시황인가?

by 중은우시 2008. 8. 29.

글: 문재봉(文裁縫)

 

1974년 2월, 농민들 한 무리가 진시황릉 동쪽 1.5킬로미터지점에서 우물을 파던 중에 우연히 진짜 사람과 진짜 말과 같은 크기의 병마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천여년의 지하박물관이 발굴된 것이다. 지금까지, 병마용에서는 이미 도용(陶俑) 8000건이 출토되었고, 전차 10대 및 수만건의 실물병기가 발굴되었다.

 

그중 제1호갱은 "우군(右軍)"으로 진짜 사람과 말과 같은 크기인 도용, 도마가 약 6천건 묻혀 있었다; 2호갱은 "좌군(左軍)"으로 도용, 도마, 1,300여건, 전차 89량으로 보병, 기병, 전차등 3개 병종이 혼합된 군대진용이었다; 3호갱에는 무사용 68개, 전차 1량, 도마 4필로 지하대군을 통솔하는 지휘부였다. 이 병마용은 '세계제8대기적'으로도 불리웠다.

 

이 기적이 발견된지 얼마되지 않아, 이것은 진시황릉의 배장(陪葬)으로 인정되었고, 거의 공론으로 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포커스>>잡지에서는 병마용을 소개할 때, "중국의 첫번째 황제인 진시황이 2200여년전에 죽기 전에 중국을 통일하였고, 장성을 건설하도록 명령하고, 중국에 잔혹한 통치를 실시했다. 그가 당시 유일하게 겁내던 것은 하늘의 진노였다. 그는 이로 인하여 방대한 지하능묘를 건설하여, 8000명의 진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채색무사를 만들어 지키게 했다"

 

그런데, 최근들어 어떤 학자는 이 '공론'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설이 나오자, 즉시 학계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인가 아닌가? 만일 진시황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기한 사람은 남경의 건축학자인 진경원(陳景元)이다. 1961년, 그는 진시황릉의 보호계획에 참여한 바 있다. 1984년, 그는 일찌기 병마용의 진정한 주인이 진시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발표했지만,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2006년, 그는 다시 <<중국과학탐험>>이라는 잡지의 제2기에 <<병마용의 주인은 근본적으로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먼저, 진시황이 여산아래에 묻혀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진시황이 여산의 아래에 묻혀 있다고 믿는 것은 주로 <<사기>>의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9월, 시황을 여산에 묻었다. 시황은 즉위초부터, 여산을 파고..." 여기에는 두 가지 정보다 담겨 있는데, 하나는 진시황이 죽은 후에 여산에 묻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시황이 즉위하자마자 여선에 황릉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경원은 <<사기>>의 기록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시황이 출순도중에 하북 형태에서 죽는데, 함양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은 남쪽으로 가서 황하를 건넌 다음 낙양으로 갔다가 다시 서안으로 가는 것이다. 또 다른 노선은 진용관(秦俑館)에 표시한대로, 서쪽으로 정형(井)으로 가서 낭자관(娘子關)을 지나 태원(太原)으로 가고, 다시 북으로 가서 빠오터우(包頭)에서 꺽어 서안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단기간내에 함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름날씨에 조고, 이사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하여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로 하는 것(秘不發喪)'을 보장받거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장하려면, 진시황의 시신은 하북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 여산으로 와서 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관총(衣冠塚)일 것이다.

 

그러나, 섬서성 문화재관리위원회이 1960년대초에 현지에서 현장조사를 진행한 후에 쓴 조사보고서를 보면, 현재 진시황릉의 북쪽에는 대량의 항토(土, 다진 흙)지반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로써 보면 궁전건축군의 주요부분은 이 땅에 당시에는 아무런 시공, 건설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성, 외성 및 봉토등은 모두 그가 죽은 후에 공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산은 홍수가 잦은 곳이어서 거의 3년에 한번씩 폭우가 내렸다. 그러므로 크게 지하궁전을 파는 공사를 벌이면서 물이 고이는 것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진시황은 생전에 수십년전에 미리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는 진시황릉이 여산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기>>의 기록외에도, 고고연구자들은 출토문물에서 새겨진 글자에 많은 진나라때의 지명이 있는데, 호북에서 출토된 운몽죽간, 호남에서 출토된 용산죽간에 나오는 동시대의 문자와 대조해보면 그것들은 진나라때의 글쓰는 습관에 부합하여 확실히 진나라때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마용에 진나라 장인들이 쓴 문자와 진시황릉 벽돌기와에 있는 문자간의 유사성도 양자간의 관련을 말해준다. 사서에 따르면 진시황은 6월에 사구에서 죽고, 9월에 함양으로 돌아와서 묻힌다. 시신은 분명히 부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돌아오는 도중에 시신썩는 냄새를 감추기 위하여 전복을 마차안에 놓아두었다는 설이 있다.

 

진시황릉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후, 진경원은 다시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陳宣太后)라고 주장하였다.

 

진선태후는 성이 미()씨이고, 초나라 왕족이다. 진혜문왕에 시집왔다. 그녀는 진나라를 41년간이나 통치하는데, 중국역사상 최초로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한 여성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녀를 이천년전의 '서태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병먀용이 진시황이 아니라 그녀의 배장이라는 설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진경원은 역사상 진시황이 능묘를 바깥으로 확장할 때 "삼백장"을 넘길 수 없다는 법을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나라때의 삼백장은 현재의 치수로 하면 960미터라고 한다. 그런데,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근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므로, "삼백장"의 경계선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배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기. 정의>> 및 <<섬서통지>>, <<임동현지>>등의 사료에 따르면, 모두 이런 기록이 있다: "여산: 옹주 신풍현의 남쪽 16리에 있다; 진시황릉: 옹주 신풍현 서남 10리에 있다; 진선태후릉: 옹주 신풍현 남14리에 있다" 옹주 신풍현의 현성은 지금의 임동현 신풍진의 동북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상의 방위와 거리에 근거하면 진선태후릉은 진시황릉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여산과는 약 2리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서양촌, 하화촌 일대이다. 이곳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병마용의 소재지이다.

 

이외에, 병마용에서도 몇 군데 기괴한 점이 나타난다: 일부 병마용의 머리에는 묘족의 후예인 초나라사람의 특유한 한쪽으로 치우친 상투가 나타난다; 진용이 입은 옷이 아주 화려한 색깔인데, 진나라는 원래 검은 색을 숭상했으므로 차이가 현저하다; 이외에 도용의 몸에는 "미()"자가 나타나는데, 진선태후의 성으로 보인다.

 

진시황릉의 방원 일정 범위내의 출토물을 진시황릉의 배릉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충분한 판단이다. 황릉의 동쪽으로 벽에서 350미터 떨어진 곳에는 17개의 황자, 공주의 배장묘가 발견되었다; 외벽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는 100여개의 마구갱이 발견되었다; 황릉 외성과 병마용의 사이에는 물이 흐르던 옛 강길이 있는데, 지리적으로 보면, 그 곳에는 배장갱을 둘 수가 없다. 그리하여 외성벽에서 1천미터정도 떨어진 지세가 평탄한 곳에 병마배장갱을 둔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병마용의 동과(銅戈, 구리로 된 창)에는 "삼년상방여불위(三年相邦呂不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호갱 앞의 다섯군데에서만도 "사년" "오년" "칠년"등이 새겨진 10여개의 동과가 발견되었다. 이들 글자는 실제로 병마용의 연대를 확정짓는 직접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십육년에 사공(寺工) '모'가 만들다(造)"는 문구도 있는데, "사공"이라는 것은 중앙에서 수공업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진시황시대에 있던 것이다.

 

만일 진시황릉이 정말 진선태후의 배장이라면, 진선태후의 능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까지도 고고학자들은 병마용에 어울릴만한 진선태후릉을 발견하지 못했다.

 

진경원의 몇 가지 의문은 확실히 새겨들을 만하다. 그리고 현재 진시황릉과 병마용의 연구에 더욱 깊이 검토할 사항이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고증불립(孤證不立, 하나뿐인 증거로는 입증되었다고 할 수 없다)'이 강조된다. 즉, 하나의 사례만으로는 하나의 사물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록 진경원의 주장에 경청할 점은 있지만 현단계에서는 병마용의 주인이 진선태후이고 진시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