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중공중앙판공청 경위국 부국장 무건화(武健華)는 모택동의 경위중의 하나이며, 모택동이 서거한 후, 무건화는 명을 받들어 강청 및 모택동의 조카 모원신을 체포함으로써, 사인방시대를 마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최근 그는 구술로 사인방체포의 전후의 경력을 이야기하면서, 모택동을 위하여 건설한 "202"주택과 중공지도자들을 위하여 지은 "305"의원의 막후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모택동 만년의 202
모택동은 중남해(中南海)에 살았는데, 원래의 집은 수영장의 옷갈아입는 작은 방이어서 공간이 좁고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여러번 얘기해서, 모택동은 1974년에서야 수영장 남쪽의 몇 곳 오래된 작은 평방(平房, 단층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어 넓고 밝으며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집을 짓기로 했다. 새집은 주로 세 칸으로 나뉜다: 침실, 서재, 거실. 그리고 몇 개의 부속용방. 그리고 넓은 복도는 실내수영장과 연결되었다.
모택동을 위하여 새로 집을 짓는 공사의 번호는 "202"였다. 당시 이것은 중남해의 중대한 전쟁대비공사로 간주되었다. 공사량도 비교적 컸고, 중남해 중심지대의 부지가 관련되었다. 시공대들은 군사위원회 공정병과 북경시의 각종 건축대로 구성되었다. 중공중앙판공청 주임인 왕동흥은 중앙경위국 부국정 모유중, 이소와 무건화의 세 사람을 책임자로 지명했고, 중남해와 주변의 각종 공사관리 및 공사와 관련한 제반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무건화는 202공사의 부지선정, 설계, 시공 및 검수등의 각종 단계에 관여했다. 무건화의 회고에 의하면, 시공에 참여하는 인원이 절대 믿을만해야 하였다. 먼저 각 시공단위의 당조직에 인원에 대하여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하고, 다시 경위국 보위부서에서 엄격히 심사했다. 시공현장의 중요부분에는 중남해의 경위부대가 밤낮으로 초소를 만들어 지켰다. 공사중의 각종 파이프, 바람구멍, 지붕등은 모두 전문가가 순회하며 검사했다. 검수때, 일반적인 검수항목이외에 위생, 방화, 반도청부서들에서 기기를 가지고 와서 원자방어, 화학방어, 방사선방어등의 검측을 거쳤다.
시공으로 인하여 모택동의 일과 휴식에 영향을 주지 않고, 모택동의 휴식으로 인하여 전투대비공사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은래의 비준을 받아, 북경시 서성구 관원(關園)에 모택동을 위하여 집을 하나 준비했다. 그 곳에는 모택동의 집과 수행인원 및 경위부대의 집 및 상응하는 대소회의실등을 갖추고 있고, 커다란 정원도 있었다. 나중에 모택동이 시공기간동안 북경을 떠나 상해, 항주, 무한, 장사등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 중 1974년 10월 13일 모택동이 무한에서 장사로 가서 114일을 머물게 되므로, 모택동은 북경의 관원에 가보지도않았고, 그 곳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무건화에 의하면, 202공정은 1974년말에 완공된다. 그러나 당시 상당한 기간동안 모택동은 입주하지 않고 여전히 수영장의 원래 집에서 머문다.
모택동은 1976년 6월 26일, 두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세가 아주 위급했다. 중공중앙정치국은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왕동흥의 네 사람을 모택동의 거주지에 돌아가며 당직을 서도록 했다. 일반적인 상항에서는 화국봉과 장춘교가 한 팀이 되고, 왕홍문과 왕동흥이 한 팀이 되었으며, 돌아가면서 했다. 어떤 상황이 생기면 네 사람이 함께 협의하였다.
하북당산에서 7월 28일 새벽 7.8도의 지진이 발생한다. 북경시에서도 지진을 느낄 정도였다. 중남해 동팔소의 몇개 담장과 중남해를 둘러싼 큰 담장의 여러곳이 지진으로 허물어졌다. 적지 않은 집들도 무너졌다. 당시 모택동은 여전히 수영장의 작은 집에 머물고 있었다. 28일 오전, 왕동흥은 202를 급히 청소하도록 시키면서, 모택동을 옮기겠다고 하였다. 경위1중대는 그날 오전에 화국봉, 왕동흥의 지휘하에 모택동을 2년전에 완공한 202거주지로 옮긴다.
무건화에 의하면, 이날 밤에는 큰 비가 내리고, 비교적 강한 여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2에서는 거의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모택동이 202로 옮긴 후, 방이 넓어지고, 복도도 넓었다. 그래서 의무인원들이 계속 치료하고 응급조치하는데 편리했다. 그러나 겨우 43일을 머물고 모택동은 병세가 악화되어 9월 9일 0시 10분경에 202주소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305의원
국무원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고 있던 진의(陳毅)는 1972년 1월 결장암으로 사망한다. 주은래도 오래지 않아 암에 걸렸다는 것이 밝혀진다. 모택동도 당시 병을 앓고 있었다. 왕동흥은 북해공원 서쪽담장밖의 양봉협도(養蜂夾道)의 한 조용하고 공기가 신선한 장소를 골라서 소형의원을 건립할 준비를 한다. 당초의 요구사항은 중앙지도자의 신체검사, 질병치료, 휴식요양이었고, 그들이 그곳에서 손님을 만나기 편리하고 안정경위업무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기존의 의원에서는 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이 소형의원은 여러 측면에서 요구조건이 매우 높았다. 설계, 재료선정, 시공, 인테리어 및 건설참가인원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절대 믿을만해야 했고, 공사에 있어서도 절대 기준에 부합해야 했다. 주건축은 푸른벽돌과 철강콘크리트 혼합구조의 4층집이다. 1층은 중앙주요지도자를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침실, 사무실 및 외빈접견이 가능한 대청이 있었으며, 상응하는 부속설비도 있었다. 집의 벽체조직은 두텁고 견고했으며, 지진대비능력이 강하였고, 집도 높고 넓었으며 광선이 충분히 들어왔다. 공사는 1973년말에 주건물을 완성했고, 1974년 봄에 인테리어를 마치고 쓸 수 있도록 했다. 군사편제에 따라 이 병원은 "중국인민해방군제305의원"으로 명명되었다.
주은래는 305의원이 완공된 후 얼마되지 않은 6월 1일, 입원하여 치료받으며, 그 곳에서 사무를 보고 외빈을 접견했다. 주은래는 1976년 1월 8일 오전 305의원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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