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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조고(趙高)의 진실

by 중은우시 2007. 12. 20.

 

조고(趙高)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그의 지록위마(指鹿爲馬)에 대한 고사와 함께 진시황이 죽은 후,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환관(宦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최일류의 서예가였으며, 문자학자였고, 법률에 정통했으며, 체격이 크고 강하였으며, 기마술에도 능했고, 무예도 뛰어났으니, 진나라 조정관료중에서 보기 드문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고 한다.

 

조고는 사구(沙丘)의 음모의 주모자이고, 진나라제국을 멸망시킨 주요책임자이다. 조고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2천년이래로 적지 않은 곡해가 있었다. 동한시대이후에 조고는 내시로 추악화되었고, 그의 가족도 내시가족으로 추악화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편견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조고에게 아들, 딸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딸은 염락(閻樂)에게 시집갔는데, 염락은 함양령(咸陽令)이었다. 실제로 사마천은 조고가 내시라고 말한 바가 없다. 사마천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동한이전의 모든 역사서적에서도 조고가 내시라고 말한 기록은 없다. 조고를 내시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이다. 하나는 "환(宦)"이라는 글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궁(殷宮)"이라는 글자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기. 이사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조고는 "환인(宦人)"이고 "환적(宦籍)"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조고를 내시로 오인하는 첫번째 자료이다. 그러나, 최근에 출토된 <<장가산한묘죽간>>에 따르면, "환(宦)"이라는 것은 궁중의 내정(內廷)에서 임직한다는 뜻이고, "환인"은 궁내에 직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며, 왕이나 황제의 심복시위와 같은 신하를 말한다. "환적"이라 함은 궁에 출입할 수 있는 자를 등기한 책자와 같은 것이다. 진한시대에 "환인"이나 "환적"이건 "환관"이라는 용어는 모두 거세한 남자로서 궁내에서 직책을 갖는 것, 즉 내시를 의미하지 않았다. 당시에 거세한 후에 궁중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가리키는 말로는 "엄인(奄人 또는 人)"이라고 불렀다. 궁중에서 일하는 엄인은 "환엄(宦 또는 宦奄)"이라고 불렀다. 이 당시에 단어에 대한 정의는 아주 분명했다. 이러한 최신 자료에 따르면 조고는 궁중에서 일하던 환인이었고, 즉, 황제의 측근신하였지, 거세된 내시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 몽염열전>>에 의하면 "조고의 형제는 모두 은궁(隱宮)에서 살았다"는 말이 있다. 이것도 조고가 곡해를 받게 된 또 하나의 자료이다. "은궁"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불명확하다. 동한이후, <<사기>>에 주석을 달던 유씨성의 인물이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은궁"의 "궁(宮)"을 거세받는 궁형(宮刑)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상상력을 보태어서, "조고의 부친은 궁형을 받아 거세되었는데, 모친이 다른 사람과 야합하여 조고의 형제를 낳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조고의 형제는 조(趙)씨성을 쓰면서 나중에 거세를 하고 내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만들수록 더 커지고, 조작을 더 많이 할 수독 더욱 통쾌해진다. 그리하여 계속 와전되어갔다. 당나라이후, 조고의 일가는 모두 내시라는 것이 점점 고착되어 간다. 진나라역사전문가인 마비백(馬非百) 선생은 <<수호지운몽진간>>을 근거로, "조고형제가 모두 은궁에서 살았다"는 말의 "은궁"은 "은관(隱官)"의 오자라고 보았다. <<장가산한묘죽간>>이 출토된 이후, "은관"의 의미는 아주 명확해 졌다. 은관이라 함은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 일하던 곳이었다. 즉, 원래 형벌을 받는 기간이 만료된 사람이라는 것이지, 궁형이나 거세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고힐강(顧剛) 선생은 아주 유명한 논점을 제시한 바 있다. "누적적(層累的)으로 형성된 고대사"라는 것이다. 고선생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고대사는 역대를 거치면서 계속 새로 쓰고 개조되어 이미 원래의 모양은 찾아볼 수 없고, 여기에 역대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입맛에 따라 첨가되어왔다는 것이다. 진실한 고대역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역대에 첨가된 것을 제거해야만 고대의 진상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한은 환엄(내시)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했으므로, 유씨의 곡해는 당시 사람들의 환관(내시)을 미워하는 심정과 일치하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는 것은 모두 내시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오히려 믿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당나라때도 환관들이 정치를 농단하여, 고래로 내시에 의하여 나라가 망한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직 걷히지 않았다. 이러한 성토가 지속되는 분위기 하에서 조고도 내시라는 유언비어는 자연스럽게 크게 빛을 발했고, 다툼없는 정설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명나라때는 내시의 화가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 말기에도 대태감 이연영이 자희태후의 비호하에 정권을 농단하여, 사람들의 내시에 대한 미움은 다시 되살아 났다. 이처럼 대대로 누적되면서, 곡해된 역사는 정사인 것처럼 유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겉을 본 것이다. 실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나약한 점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다음 문제가 된다.

 

역사를 쓰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진상을 확인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진실이 없다면 그 후의 모든 것은 모래위에 지은 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의 가정, 사료의 고증은 모두 논문의 형식을 통하여 표현된 또 다른 역사이다. 사구의 음모이전의 조고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고는 조(趙)나라의 왕족 성씨이다. 조고의 부친은 조나라 왕족의 먼 친척이었다. 전국시대에 천하는 합종연횡을 하고 각 나라간에 결맹을 하는 때에는 상호간에 왕실의 자손을 인질로 삼았다. 이처럼 인질이 된 공자들은 많은 경우에 당해 국가의 주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먼친척이었다. 그리하여 인질이 된 후에 장기간 이국타향땅에서 살아야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하게 일생을 마쳤고,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고의 조상은 아마도 조나라에서 진나라에 인질로 붙잡혀온 공자일 것이다. 그리고 조나라에서 총애를 받지 못하고, 진나라에서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진나라에 머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 진나라에서 처를 얻고 자식을 얻어서, 자손들이 함양의 시정에서 살아가게 되고, 진나라사람이 되었다. 보통 서민과 이미 차이가 없게 된 것이다.

 

조고는 형제가 여러명 있었다. 모두 은관 출신이다. 역사상 이름을 남긴 자는 동생인 조성(趙成)이 있을 뿐이다. 조성은 나중에 조고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낭중령(郎中令)이 되고, 진2세를 모살하는 망이궁(望夷宮) 정변에 참가하는 사람이다. 은관은 정부에 설치된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수공예방이다. 형기가 만료된 범죄자들을 모아서 일을 시키는 곳이다. 조고의 모친은 죄를 받은 적이 있는 데 사면된 후 신체에 형을 받을 때의 장애가 남아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 불편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아서 계속하여 은관에서 일을 하며 살았다.

 

진나라때의 신분등급에서 은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신분도 은관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형기만료후 석방된 사람이다. 지위는 보통 서민보다 낮았고, 점유하는 토지나 주택도 보통서민의 절반수준이었다. 제국의 법률은 공정을 중시하여, 은관의 지위가 낮기는 했지만, 혼인에는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은관의 자녀의 신분은 보통서민과 같았다. 조고의 부친은 아마도 은관에서 일하던 하급문관이었을 것이다. 법률을 잘 알고, 서예를 잘 알았을 것이다. 은관에 재직할 때 조고의 모친을 알았고, 가정을 꾸몄다. 그리하여 조고형제들을 낳은 것이다. 진나라는 가업을 중시하는 나라였고, 자식은 부친의 가업을 잇는 것이 제국의 국책이었다. 조고는 성년이 된 후 문관의 길로 들어섰고, 1류의 서예가와 법률가가 되었다. 이는 모두 부친의 직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고는 진소왕(秦昭王) 말년에 태어났는데, 개략 진소왕 51년(기원전256년)전후에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진나라와 조나라간에는 장평지전(長平之戰)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은 진나라군대에 겹겹이 포위되었다. 3년전에, 진시황이 한단에서 출생한다. 이때 진시황은 모친과 함께 포위된 성안에서 불안하게 하루를 보냈다.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있다. 진시황과 조고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다. 그들은 역사에서 각자 역할을 바꾸어 살았다. 진시황의 부친은 진나라의 왕족인데 진나라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조나라사람을 처로 삼았다. 진시황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조고의 조상은 조나라의 왕족인데 진나라에 인질로 오고 진나라사람을 처로 삼는다. 조고는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서 태어나, 나중에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또다른 같은 나이의 인물인 유방(劉邦)은 같은 해에 초나라의 패현에서 출생한다. 40여년후에 그는 조고와 손을 잡고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진시황의 유업을 이어 진나라를 기반으로 한나라를 창업한다. 또다른 진나라멸망에 관련되는 인물인 이사(李斯)는 이때 이미 성년이었다. 개략 25세정도 되었을 것이다. 이때는 초나라의 작군에서 하급관리를 지내고 있었다. 이들 역사를 결정짓는 인물들은 아직 서로 마주치지 않았고,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며 묵묵히 역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라는 상앙(商)의 변법이래로 경전(耕戰)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법률(法律)로 나라를 다스렸다. 군인은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는 직업이었다. 관리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진나라의 남자가 사회로 나아가는 경로는 군대에 들어가거나, 관리가 되는 두 가지 길이 가장 정도였다. 남자들은 17세에 성년이 되는데, 이때부터 입적되어 국가를 위하여 요역과 조세를 부담한다. 혹은 군대에 들어가서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고, 혹은 학실(學室)에서 글을 익혀서 선발을 거쳐 관리가 된다. 학실은 문관과 법관을 양성하는 전문학교였고, 수도와 각군에 설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문관 법관의 자녀들 중에서 선발되었고, 17세에 입학하여 3년간 배웠다. 주로 문자, 서예와 법률을 배운다. 3년간 다 배우고 나면, 학실에서 자격시험을 치르고, 5천자이상을 외우면 합격하여, 사(史)가 된다. "사"는 글과 법을 담당하는 하급관리이다. "사"의 직을 맡는 외에 중앙정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참가할 수도 있다. 1차시험은 각 지방에서 거행되고, 각 지방의 답안지는 함양으로 보내어진다. 소부(少府)의 관할하에 있는 대사(大史)가 심의하여 점수를 매긴다. 판정결과에 따라 가장 우수한 자는 선발하고, 점수가 낮으면 처벌을 내렸다. 성적이 우수한 자는 출신현의 영사(令史)로 임명되는데, 이는 참모직에 해당하고, 직접 현령(縣令)의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된다. 성적이 나쁘면, 그에게 부여되었던 "사"의 직책이 취소되기도 한다. 3년후, 영사를 맡은 자는 다시 한번 2차시험을 치를 수 있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가장 우수한 자 1인을 선발하여 궁정에서 상서졸사(尙書卒史)로 임명한다. 이는 내정비서의 역할이고 직접 진왕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부친이 문법관리였고,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하여, 조고형제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감독하에 글쓰는 것과 법률을 배웠고, 상당히 튼튼한 문법의 기초를 갖추었다. 조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능력이 있었으며,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끈기가 있었다. 그는 관료로 들어선 후에 아주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17세에 문법관리자제로 학실에 들어갔고, 성적이 우수하여 3년후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처음에 "사"를 받고, 이어서 1차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영사"와 같은 직위를 맡았으며, 3년후 2차시험에도 합격하여 1등으로 진왕의 궁중에서 상서졸사를 맡았고, 진왕의 곁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진나라에서 수천수만의 문법관리중에서 조고는 가장 뛰어난 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조고가 궁중에 들어간 이후, 그의 능력과 거동은 진왕 영정, 즉 이후의 진시황의 눈에 띄게 된다.

 

조고가 궁중에 들어갔을 때는 개략 23세정도였을 것이고, 시간은 개략 진왕정13년(기원전234년)이었을 것이다. 이해에, 진왕 영정은 26세였고, 친정을 시작한 후 5년째 되던 해였다. 정치에서 큰 뜻을 막 펼치려는 중이었다. 진나라의 관료제도는 엄밀하고 완벽했다. 문법관리의 승진이동은 시험을 쳐야 했고, 햇수를 채워야 했다. 조고는 아주 행운아였다. 그는 진나라궁정의 환관들 중에서 진왕 영정이 직접 인정한 관리였고, 소부에 있는 상서졸사들 중에서도 빼어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임명된다.

 

중거부령은 태부의 수하이다.  태부는 제국의 주요한 구경(九卿)의 하나이고, 제국의 차마교통(車馬交通)을 담당했으며, 관할하에 각종 차부관서, 원마감령이 있었다. 중거부령은 각종 거부령(車府令)과 마찬가지로 관록이 600석이고, 부관으로 중거부승 1인이 있는데, 관록이 300석이며, 소속관리가 수십명에 이른다. 직급으로 따진다면 중거부령은 중급관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거부령은 궁중내부의 거부령이므로 직무는 황제의 시종거마반장역할을 하게 되고, 황제의 거마(車馬)의 관리와 수행을 담당하게 되며, 친히 황제의 마차를 이끄는 역할이므로 직위가 아주 중요했다. 황제가 절대로 신임하는 자가 아니라면 절대 맡기지 않는 자리였다.

 

조고가 중거부령을 맡은 것은 진왕 영정이 직접 임명한 것이다. 조고는 진왕 영정의 총애를 받았다. 시험성적이 우수했던 것을 제외하고도 그는 진나라궁중에 들어온 후 개인적인 능력과 지혜를 발휘해왔다는 점이 가장 주요한 요소였다. 조고의 서예는 감히 제1류라고 할 수 있었다. 방대한 진나라제국에서 승상인 이사를 제외하고는 그와 겨룰만한 사람이 없었다. 조고는 문자학의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진나라제국에서 이루어지는 문자개혁에 그가 상당한 공헌을 한다. 그는 <<애력편(愛歷篇)>> 6장을 쓰는데, 진나라제국의 관리들이 알아야할 글자에 대한 교본중 일부분이 되며, 유명한 문자학의 저작이다. 진나라제국은 실용주의의 법치국가였다. 서예를 잘하고 글자를 아는 것은 나중에 행정문서와 법률문서를 작성하는 도구역할을 한다. 조고는 문자와 서예에 정통하였는데, 이는 그가 부단히 형벌에 관한 문서를 준비한 결과였다. 복잡하고 엄격한 진나라의 법률체계에서, 조고는 법률에 능통한 전문가였고, 가학의 연원이 있는 법률명가출신이었다. 만년의 진시황이 어린아들인 호해의 교육을 그에게 위탁한 것도 그가 문자, 서법과 법학에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조고는 업무에 아주 근면했고, 일처리에 끈기가 있었으며, 과감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출중한 행정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도 진시황이 그를 총애한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조고가 진왕 영정으로부터 중거부령에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조고가 이 직위를 맡는데 적합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중거부령은 황제의 시종차마반장이다. 가마와 말에 대한 관리가 주요하고 황제의 안전을 보위할 능력이 필요했다. 진나라때의 법률에 따르면, 일반적인 가마와 말을 관리하려면 최소한 4년의 훈련이 필요했다. 4년이 지난 후에도 가마와 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교관이 처벌을 받았고, 본인은 4년간 복역해야 했다. 합격한 거사(車士)는 연령이 40세이하여야 하고, 키가 7척5촌이상이어야 하며, 발걸음이 빠르고 강해야 하며 말을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손이 재빨라서 상하로 마차를 몰 수 있어야 한다. 가마를 다루는 기술이 숙련되어, 가마의 전후좌우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강건하고 힘이 있어, 가마위의 깃발을 손으로 잡고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무예가 뛰어나서 8석의 강한 활을 당길 수 있어야 하며, 가마를 몰면서 좌우전후로 활을 쏠 수 있어야 한다. 중거부는 진나라제국에서 말과 가마를 잘 다루는 자들이 모두 모여있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요구조건은 다른 가마꾼들과는 또 다르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거마(銅車馬)는 1/2의 비율로 진시황이 생전에 타던 마차를 사실대로 만든 것인데, 마차를 모는 사람은 검을 차고 노(弩)를 놓고, 허리띠를 차고 관을 쓰고, 수염을 날리면서 위무가 당당하면서도 안정된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중거부관의 이미지이다. 중거부령은 중거부관리들을 지휘감독하는 자리아고, 제국의 가마수들의 최고고수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거부령의 자리에 앉았던 조고는 체격이 건장하고 기마술이 뛰어나며 검과 활등의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무예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그는 진제국의 궁중에서 문무를 겸비한 보기드문 인재였던 것이다.

 

중거부령으로 승진한 것은 조고의 일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직위의 승진뿐아니라, 진나라정치권랙의 핵심과 중추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기회만 닿는다면 천하의 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이다. 조고가 중거부령에 있을 때는 개략 40세경이었을 것이고, 마침 장년으로 전도가 양양한 때였다.

 

그러나, 독재체제하에서의 관료의 길, 등급제도하에서의 관료사회는 군주의 아래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바둑돌과 같다. 하늘에 언제 비바람이 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화와 복이 엇갈린다. 앞길이 밝아졌을 때, 조고는 법률을 어겨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황제는 대신 몽의(蒙毅)로 하여금 재판을 하게 한다. 재판결과 조고는 죽을 죄로 결정되고, 관직에서 면직되며, 궁중을 드나들 수 있는 환적에서 제명되며, 행형을 기다리게 된다. 황제측근이 관여되고 사안이 중대하므로 몽의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안과 심리결과를 직접 시황제에게 보고하여 결정하게 한다. 진시황은 조고의 재주를 아끼고, 조고가 여러해 동안 신변에서 열심히 일해왔고, 일처리가 민첩하였던 점을 생각해서 조고를 사면해주고, 그의 중거부령의 직위를 회복시켜준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력이나 경위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본다면, 이 사건은 조고의 일생에 대하여, 사구의 음모에 대하여, 몽씨가족의 이후 운명에 대하여, 심지어 진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