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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용두사미: 외제불매운동의 역사적 경험

by 중은우시 2008. 4. 29.

글: 낙지사(樂之史)

 

최근에 뉴스에 자극을 받아, 일부 중국인들이 다시 1백여년전의 '외제불매운동'을 외쳐대고 있다. 어떤 제품이나 어떤 나라의 제품을 불매운동하는 것은 원래 기본적인 항의권리에 속한다. 다른 각종 불만을 나타내는 방식과 바찬가지로, 주변사람들로서야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위법한 방식만 쓰지 않는다면 정부도 간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100여년동안이 외제불매운동의 실제역사를 살펴보니, 대체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경험을 얻을 수 있어서, 참고하도록 글을 써서 올린다:

 

1905년 미국의 화공조약(華工條約)부터 시작하여,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될 때까지, 중국에서는 계속하여 외제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 중국국민들의 기본적인 항의의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불매운동과정에서의 태도로 그가 애국자인지를 판별하는 척도로 삼았었다. 심지어 폭력으로 정당한 영업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많은 상인들의 수입상품은 몽땅 불태워져서, 밑천을 다 날리게 된 일도 있다. 매번 외제불매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상인과 소비자는 왕왕 가장 큰 피해자였다. 많은 사람들의 사유재산이 침해받았을 뿐아니라, 매번 불매운동때마다 일부사람들이 불매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신체 및 인격상의 모욕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모욕은 당시 법률에 위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매국'이라는 큰 죄명하에, 일체의 법률도 효력을 잃었었다.

 

외재불매운동은 왕왕 '애국'으로 포장된다. 보통국민들의 소비선택에 연결시켜, 많은 사람들의 소비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 심지어 중국인들로 하여금 어느 나라의 값싸고 질좋은 제품을 사지 못하게 하고, 그저 비싸고 질나쁜 국내제품을 사도록 강요했다. 불매운동은 쉽게 시장독점으로 이어진고, 제품선택의 여지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매번 물가상승을 이끌었고, 소비자들이 그 피해를 모두 떠안았다. 당연히 아마도 오늘날 중국공산품의 제조수준으로 보면, 이미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제품의 품질은 특정국가의 브랜드제품과는 아직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매운동'의 명의로 시장운행법칙이 심하게 왜곡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매번 불매운동이 발생하면, 왕왕 특정세력이 어부지리를 얻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불매운동의 배후에는 왕왕 본국상인과 기업이 몰래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불매운동은 일부 본국상인들에게는 떼돈을 버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시장의 파이는 왕왕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재조정된다. 많은 상인들은 외제를 국산으로 바꾸어 팔기도 하고, 실제로 외제는 여전히 판매되는 경우가 많아서, 불매운동은 단지 명의상의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실제효과도 크지 않았다. 매번 특정국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난 후, 당해 국가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끝난 후에는 크게 판매를 신장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불매운동은 당해국가제품의 소비를 억제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본국소비자들에게 더욱 큰 소비욕구를 부추기기도 했다.

 

청나라말기이후 매번 외제불매운동의 역사를 보면, 한번도 불매운동을 끝까지 견지한 적이 없다. 마지막에는 모두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런 불매운동은 자주 외국인들에게 중국인들의 '오분간의 열정'으로 조소대상이 되었다. 실제효과에서 보더라도, 한번도 진정으로 성공한 불매운동은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조성한 각종 결과를 보면, 외제불매운동은 자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다. "애국"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 '애국'의 목적을 달성하느냐에 대하여는 보다 이성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특히 근대중국에서 자주 썼던 '불매운동'과 같은 수단을 오늘날 중국에서 다시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냉정하게 각종 결과를 다시 생각을 해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