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인(鋼人)
파키스탄과 중국의 관계는 두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중국이 막 건국했을 때, 파키스탄은 완전히 친미노선을 걸었고, 중국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만,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 파키스탄은 계속하여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1960년대, 파키스탄은 중국이 인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970년대, 제2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후, 미국은 처음으로 '아시아의 가장 좋은 맹방'이라던 파키스탄을 버렸다. 그리고 구소련에 가까워진 인도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미군측은 각종 명목으로 파키스탄에 지급해야할 무기장비의 이전을 늦추거나 막았다. 그러나 인도는 구소련에서 선진 전투기를 구매하여, 파키스탄을 누르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이때, 파키스탄은 실제로 '세계의 고아'가 되어버렸다. 파키스탄의 한 고위인사는 '우리는 이미 세계의 버림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때, 인도에게 있어서는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하고, 인도가 파키스탄을 집어삼킬 가능성이 커졌다. 파키스탄의 제한적인 저항능력은 공중에서부터 인도에 격파되기 시작했다.
다만, 인도는 "동파키스탄분열, 파키스탄수복"의 꿈을 꾸고 있을 때, 가난하지만 커다란 국가가 돌연 파키스탄의 등뒤에 섰다. 파키스탄은 이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밀접하게 강화했다. 이전의 '미국서방과의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우호국으로 전환했다. 중국에서 제조한 '섬(殲) 6,7' 전투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섬7 전투기가 파키스탄에 들어간 이후, 인도공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파키스탄은 섬7을 '수도상공을 지키는 호위자'로 대우했고, '공중초병'이라고 불렀다. 이때 파키스탄 내부에서는 '대반성'운동이 벌어진다. 신정부가 올라서고, 원래의 미국일변도의 정책을 바꾸게 되면서, 중국의 품으로 뛰어든다.
파키스탄 정치가의 좌우명은 "언제든 미국을 믿는다면 그것은 버림당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서방국가보다 파키스탄에 유리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이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외교정책이 50-100년간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처럼 대통령이 한번 바뀔 때마다 친구인지 여부를 새로 따지는 국가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파키스탄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국은 친미정책을 걷는다. 그리고, 파키스탄에 대한 정치적 태도도 약간은 바뀌게 된다. 이전의 아주 친밀한 관계보다는 약간의 간격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파키스탄은 여전히 자신의 방침과 전략을 고수했다.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한 후, 파키스탄은 아주 긴장한다. 어쨌든 소련의 홍군은 일세를 풍미하는 군대이고, 파키스탄은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때 중국을 도와 구소련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과감하게 아프간반군과 연락하는 도로를 만들었고, 미국이 돈을 내고, 중국이 무기를 제공하고, 파키스탄이 반군에 대한 운송을 담당했다. 최종적으로 구소련이 아프간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은 철저히 붕괴되었다.
1980년대에서1990년대초기에, 미국은 국가지도자가 바뀌고, 부드러운 수단으로 중국에 대한 내부분화를 진행한다. 결국은 '북경의 봄'을 불러온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유엔에서 공개적으로 전세계에 중국을 제재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이때가 파키스탄에게는 선택의 분수령이었다. 퇴역한 중앙정부부관리인 나타리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은 일찌기 대량의 잉여군사물자와 일부 신형전투기를 공급하며, 매년 500만달러이상의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조건으로 파키스탄에게 중국을 떠나 '민주와 자유'의 편에 서도록 요구했다.
파키스탄은 당시 직접적으로 회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묵인으로 보고 파키스탄에 F16신형전투기를 판매할 계획에 착수했다. 유엔회의에서 중국에 대한 제재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파키스탄은 돌연 일어나 고성으로 "우리는 중국을 제재하는데 반대한다. 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국가주권에 대한 간섭이다"라고 소리쳤다. 이는 바로 유엔회의에서 중국제재문제에 대한 첫번째 반대표였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군사, 경제, 외교의 측면에서 폭풍과도 같은 제재를 받게 된다.
오래지 않아, 파키스탄의 군사정변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선다. 비록 많이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파키스탄 군사정부가 변경하지 않고 강화한 것은 바로 대중국관계였다. 여기에서 북아메리카에 있는 중국의 우방 쿠바를 얘기해보자. 쿠바도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어진 비동맹운동 48개국회의를 열어 압도적인 절대다수로 유엔이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의안에 대한 반대표를 던졌다.
이외에 파키스탄은 군사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했다. 중국이 연구개발한 홍전(紅箭)8형 미사일이 막 출시했을 때, 거의 시장이 없었는데, 파키스탄은 앞장서서 구매해주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구미11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소위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이로써 홍전8형 미사일은 이름을 떨치게 된다. 파키스탄은 중국의 전문가의 협조를 얻어 제조하고, 그들의 "타오1" 미사일을 대체하여, "녹검(綠劍)"이라고 이름짓는다. 그리고 미국의 지지를 받아 비밀리에 유고슬라비아독립파에 공급하여, 유고슬라비아정부군에 타격을 가한다.
파키스탄은 프랑스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1990년대중반, 유럽의 무기수출금지로 인하여 시라크는 공개적으로 무기를 중국에 팔 수가 없었다. 다만, 이때 대만독립운동은 계속 팽창하여, 중국은 동해에서 바다는 있으나 해군은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신형 잠수함을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프랑스와 협상하여 프랑스의 오거스타 잠수정기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파키스탄은 앞장서서 중국보다 먼저 3척의 오거스타 잠수정을 구매했고, 그 중 1척을 비밀리에 중국으로 보낸다. 그리하여, 중국에 연구유지보수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하여, 1996, 1997년의 연속 2년내에 중국은 연이어 송(宋)급 1, 2 두 개의 모델을 개발해내고, 같은 해에 진수시킨다. 1형은 자체설계로 계단형의 망루가 있다. 2형은 외관이 거의 프랑스 오거스타 B와 같은데, 바로 현재의 송급 개량형이다. 1형은 생산량이 작았고, 2형은 매년 3-4척의 속도로 지금까지 건조되고 있다(이 자료는 미국 CIA의 자료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부인하고, 파키스탄은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
중국과 파키스탄은 공동으로 L8훈련기를 개발했고, 파키스탄은 큰 돈을 들여 연구제조에 참여한다. 다만, L8의 판매는 좋지 못했다. 그래도 파키스탄은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중국과 파키스탄은 신형탱크도 공동개발했다. 차체의 기초는 바로 중국육군에서 도태된 T85IIMP형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태국에서는 T85IIMP에 대하여 여러가지 나쁜 소문이 들려왔지만, 파키스탄은 전혀 듣지 않았다.
21세기에 중국은 10년전에 약속했던 신형전투기 효룡(梟龍)을 마침내 띄우게 된다. 바로 파키스탄에서 전국적으로 축하행사를 벌이고 있을 때, 인도는 무기조약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효룡전투기의 엔진공급을 중단하도록 하고자 했다. 파키스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가장 신뢰할만한' 국가인 중국에 의지했다. 과연 중국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러시아의 제한을 풀어주었고, 크리모프회사를 중국에 유치했다. 인도는 78억달러나 들여서 러시아로부터 거액의 중고품을 사주었지만, 중국과 파키스탄의 협력을 저지할 수 없었고, 오히려 러시아의 버림을 받았다.
중국주석이 파키스탄을 방문하면, 파키스탄은 대통령이 성대한 의식을 베풀며 관리들을 이끌고 공항에 나가서 영접했다. 이때 "6성홍기"를 내걸었다. 인도의 미디어는 이에 대하여 "파키스탄군사정부가 파키스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그래도 중국주석은 파키스탄을 '4호인국(4好隣國)'으로 평가했다.
이외에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많은 뉴스통제가 있었다. 파키스탄은 '대만과 중국' 혹은 '북경과 타이페이'처럼 하나의 중국원칙을 살짝 벗어나는 표현을 금지했다. 그들은 여전히 '중국 대만성'으로 부른다. 2006년, 2007년에는 몇번에 걸처 무장분자들이 중국공사현장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중국이 책임진 공사프로젝트에는 수많은 무장병사를 배치했다. 거의 대통령에 대한 호위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시내버스에서, 만일 중국인이라면, 무엇이 '친구'인지, '4호인국'인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금지지역에 설립된 많은 시설도 참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인이라면 절대로 거절당한다. 이는 2006년 영국 타임즈가 보도한 내용이다.
여기서 중국자신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한 파키스탄의 기자가 그가 중국에서 보고 겪은 것을 보도했다. 이는 파키스탄 민중의 불만을 자아냈다. 중국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파키스탄을 가난한 나라로 보고 있고, 북경, 상해등지에서는 파키스탄인을 인도인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는 아주 큰 불만요소이다(실은 두 국가 사람들은 쉽게 구분이 된다). 2006년, 중국의 서남신문사 기자가 내부참고소식에서 중국서남부지구의 일부 변경공로의 운전기사가 파키스탄인이 크고 작은 가방에 가득 물건을 산 것을 보고는 그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욕을 계속 퍼부었다. 이 일은 나중에 중국청년보에도 실렸다. 최근에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파키스탄 정부는 내부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본국의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다만, 몇몇 서양물을 먹은 중국인들이 소식지를 만들어 이러한 일들을 파키스탄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에 절대 가지 말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파키스탄정부는 비록 이런 소식지를 압수하고는 있지만, 이들 '중국인'들을 어떻게 조치할 수는 없고, 그저 출국시킬 뿐이다.
크게 보면, 중국정부는 친구인 파키스탄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유엔회의에서, 전세계가 모두 중국을 제재하자고 했을 때, 겨우 2개의 친구들만이 중국을 위해서 말해주었다. 그 후에 미국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돈? 아니면 아주 선진적인 무기? 아니면 다른 것? 거의 아무 것도 주지 못했다. 다만, 파키스탄과 쿠바의 인민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믿음은 있다. 중국이 언젠가는 대국으로 굴기할 것이라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에게 있어서 세계무대에 진정한 친구는 몇 남지 않았다. 선조들이 물려준 '홍색중국'의 본전을 이미 많이 까먹었다. 다시는 만회할 수 없다. 중국은 진정 '고가과인(孤家寡人)'이 될 것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조선, 월남과 같은 옛날의 친한 친구를 찾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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