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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법률이야기

인민배심원제도의 곤경

by 중은우시 2008. 4. 21.

작자: 우과(羽戈)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최고인민법원 원장인 왕승준(王勝俊)은 4월 10일, 주해중급법원 법관들과의 면담시 사형판결의 3대근거를 제시했다: "첫째는 법률의 규정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치안전체상황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사회와 인민군중의 감각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 첫번째는 왕원장의 직업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는 중국사법이 아직도 '난세에는 중형을 써야 한다'는 실용주의적인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법은 이미 독립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인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모두 죽이라면 죽이고, 모두 살려주라면 살려주어야 하는가? 더구나 '인민군중의 감각(감각이라는 단어는 정말 애매하다)'을 어떻게 형량하고 어떻게 규칙화 체계화하여 사법활동에 활용할 것이며, 사형판결과 심사의 척도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인민군중의 감각"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입장을 정확히 한다는 뜻이다. 중국 <<헌법>>과 정치윤리에 따르면 인민은 불요불굴의 권력의 근원이며, 일관된 대입법자이다. 사법의 합법성과 권위성은 인민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법학자가 "인민법원"에서 "인민"이란 두 글자를 빼버리자고 주장한 일을 기억하는가? 그렇게 하면 사법독립을 실현하고, 세계조류에 발맞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민"의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인민법원"의 황금간판은 여전히 각 대도시의 가장 화령한 건물앞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인민"이 사법생활에서 어느 정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인민"이라는 것이 허환(虛幻)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크지만 명확치 않은 정치학적인 공동체의 개념이다. 누구를 통하여 목소리를 내는가? 대의제이다. 광장정치이다. 어쨌든 권력을 사람에게 양도하게 되는 것이다.

 

사법에 있어서만 말하자면, 이미 인민배심원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번에 "인민군중의 감각"으로 인하여 논쟁이 벌어졌는데, 논쟁참여자들은 속속 창끝을 인민배심재의 건립과 보급으로 향했다. 이것은 확실히 좋은 방향이다. 배심제가 어떻게 뿌리내릴 것인가? 중국은 생장에 적합한 토양을 지니고 있는가? "귤이 회남에서는 귤이지만 , 회북에서는 감이된다"는 비극이 다시 재현되지는 않을까? 중국사법개혁은 서방의 배심제를 도입함으로써 관념의 환상을 깨고 법치건설의 세부적인 점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배심제는 영국의 노르만정복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배심제가 흥성한 것은 사법심판에 쓴 것이 아니라, 행정관리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점차 사법민주의 이기로 변모하고, 행정권력에는 강경한 제한역할을 하게 된다. 대영제국의 해외확장과 더불어, 배심제는 전세계에 그 씨를 뿌리고, 각지에서 꽃을 피운다. 그러나, 피운 꽃은 각양각색이었다. 용의 씨를 뿌렸지만, 거두어들인 것은 뱀이었다. 프랑스대혁명시기에 평민으로 조성된 배심단은 폭력정치의 망나니역할을 했다. 1948년, 영국은 대배심단제도를 폐지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보통법의 정수로 받들어져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청나라말기의 법제개혁때, 배심제를 도입한 바 있다. <<대청형사민사소송법>>을 보면, 그 효력은 빈 조문을 메꾸는데 머물러 있다. 공화국이 성립된 후, 1954년 <<헌법>>에서는 명확히 "인민법원심판사건은 법률에 따라 인민배심제를 실행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혁시기에 "공안,검찰,법원을 파괴"하면서, 함께 파괴된다. 1979년 다시 부흥되었지만, 1982년 <<헌법>>에서 폐지당한다. 1983년, <<인민법원조직법>>을 수정하면서 배심제는 세번째도 다시 수면위에 나타난다. 그러나, "반드시 실행한다"가 "실행할 수 있다"로 바뀐다. 자유재량권을 법관에게 주다보니, 수시로 바뀌었다. 2005년 5월 1일, <<인민배심원제도를 완비시키는 결정>>이 마침내 효력을 발생하고, 중국사법은 진정한 배심제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들 재미없고 험난했던 법률사의 구체적인 점을 소개한 것은 우리의 인민배심원제도는 사법제도같지가 않고, 정치제도같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사법에 끼워넣은 것이다. 법률은 안정이 가장 중요한데, 배심제는 생겨났다가 폐지되고, 폐지되었다 다시 생겨났다. 거의 정치적인 온도조절기같이 법제개혁의 온도차를 통제하는 것같다. 인민배심제는 농후한 정치적인 속성이 있고, 이것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이며, 황토지위에 뿌리내리기 힘들고, 발걸음을 떼기도 힘들다.

 

배심제의 중국에서의 곤경을 하나하나 열거해보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배심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중국에 배심제가 필요한가?"이다.

 

배심제가 흥성하게 된 것은 사법독단을 막기 위한 것이고, 사법민주를 촉진시키기 위함이다. 주심법관이 너무 큰 사법재량권을 갖게 되는 것은 그에게 부패와 전횡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합의재판부로 이를 제약한다. 직업법관으로 합의재판부를 구성하는 것과 직업법관과 사회인사를 혼합하여 합의재판부를 구성하는 것중에서 어느 것이 사법전횡과 부패를 억제하는데 더 유리할지는 분명하다. 한가지 속담이 이것을 말해준다. 한 명의 배심원을 매수하기는 쉽다. 그러나, 합의재판부의 12명 배심원을 모두 매수하기는 아주 어렵다. 또한 비전문가인 사회인사가 사법판결과정에 간여하므로서 차가운 법률에 따스한 인간미를 불어넣을 수 있고, 법의 정의가 사람의 마음 속에 더 깊이 자리잡을 수 있다.

 

다만, 인정이 법률보다 높아야 하는가? 충분한 법률지식을 지니지 않은 배심원이 어떻게 유죄무죄를 정하고 형량을 판단할 것인가? 배심원의 격정과 도덕감은 판결의 공정에 마이너스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전형적인 영화 <<Twelve Angry Men>>은 그저 하나의 특수한 사례일까? 어떤 사람은 Edward Coke 대법관이 영국국왕을 풍자한 유명한 말을 언급하며 배심제에 의문을 표시한다: "폐하, 저는 폐하의 이해력이 번개처럼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폐하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률앞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한 법관이 20년의 시간을 들여 연구해야 겨우 감당할만 합니다" 이에 기하여, 어떤 국가(중국포함)에서는 전문가로 배심제를 대체하고자 하거나, 전문가로 직접 배심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사법민주를 실현하면서도, 판결의 질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진퇴양난이다. 과도한 사법민주는 옥석구분이 될 것이며, 사법독단의 위해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전문가배심단은 첩경이기는 하나, 어디서 그렇게 많은 전문가를 뽑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필자는 하나의 기본판단을 가지고 있다: 사법이 충분히 독립되면, 대중배심단는 거절하고, 전문가로 구성된 소형배심단을 운용하는 것도 못할 바 없다; 만일 사법이 충분히 독립되지 않으면, 반드시 대중배심단제도를 실행하고, 배심제는 정의의 교정기로서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배심제는 물론 인성의 선악이 어느 순간 잘못 자리잡거나 법률상식이 부족한 등으로 인하여 현행법률의 위신을 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손해는 민의를 담는다는 것과 공정을 촉진한다는 것, 부패를 억제한다는 층면에서 발휘하는 기능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다른 문제는 더욱 절박하고, 거의 해결방안이 없는 듯하다: 어떻게 최근의 배심원이 합의재판부에서 "지배불심(只陪不審, 참여만 하지 심판에는 간여못하는)"의 난감한 국면을 해소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필자는 법률의 범위내에서 인민배심원제도를 검토하고자 했지만, 결론은 법률의 한계를 벗어난 것같다.

 

사형판결의 근거가 되는 "인민군중의 감각"은 아마도 인민배심제도의 경로를 통하여만 판결서에 반영될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배심제의 사법현상을 보면, 낙관적이 될 수가 없다. 사형이 "감각"에 따라 내려지게 된다면, 인민군중의 "감각"은 또 뭘 따라서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