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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티벳

티벳의 역사

by 중은우시 2008. 4. 14.

 

원시의 전설

 

티벳족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는 인도에서 왔으며, 석가모니의 후예라고도 하고, 일설에서는 티벳인들의 모습이 말레이인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말레이반도에서 이주해왔다고도 한다. 그런데, 티벳의 민간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티벳어로 된 역사서인 <<티벳왕통기>>에 나오는데,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였다(??變人)"는 설화이다.

 

보타산에 사는 관세음보살은 그의 제자인 미후(원숭이)에게 남해에서 눈내리는 티벳으로 옮겨가 수행하라고 하였다. 티벳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미후는 현지의 요녀(妖女)와 결혼하여 6마리의 어린 원숭이를 낳았다. 아비 원숭이는 이들을 숲속에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찾아서 생활하게 하였다. 이들 어린 원숭이들이 자란 후에, 다시 교배하여 500여 원숭이로 늘어났다. 이처럼 개체수가 늘어나자 숲속에서 따먹을 과실이 점차 적어졌다. 관세음보살은 미후에게 수미산에서 가져온 오곡종자를 티벳의 땅에 뿌리도록 시키고, 그러자 티벳땅에는 각종 곡물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들 원숭이는 오곡을 먹기 시작한 후, 꼬리가 점차 짧아지고,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들이 티벳인들의 조상이다.

 

체당(Tzedang, 澤當, 라싸 동남쪽 약 200킬로미터. 인구1.52만)의 공포산(貢布山)에는 아직도 당시 원숭이들이 서식하던 "후자동(?子洞)"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체당의 티벳어에서의 의미는 "원숭이가 놀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체당에서 멀지 않은 사라림(撒拉林)은 전설에 따르면 미후가 곡물을 대지에 뿌린 곳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티벳족의 첫번째 밭"이라는 호칭이 전해져 온다. 지금도 매년 봄이 되어 씨를 뿌릴 계절이 되면, 티벳인들은 이곳의 '신토(神土)'를 한줌 집어가서 풍요를 기원한다.

 

이러한 신화들은 고증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티벳고원에도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부터 원시인류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들어 임지(林芝), 정일(定日), 창도(昌都)등에서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그 방증이다.

 

티벳의 원시인류는 감숙, 청해 일대에서 이주해온 강(羌)족과 융합되어, 티벳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장족은 원래 산남(山南, 체당)지구에만 거주하던 원시부락이었고, 부락이 첫번째 우두머리는 섭적찬보(?赤贊普)였다. "찬보"는 뛰어난 군주라는 의미이다. 그는 나중에 토번(吐蕃)왕조의 시조가 된다. 그의 자손은 "찬보'의 칭호를 세습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티벳군주는 '찬보'라고 부른다. 7세기이전에 티벳족부락은 각지에 분산되어 이썼는데, 33대찬보인 송찬간포(松贊干布)가 무력으로 각 부락을 통일하고, 토번왕조를 건립했다. 티벳족은 이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통일된 토번왕조

 

송찬간포는 토번왕조를 건립한 후, 수도를 라싸로 이전한다. 그리고 정치, 군사, 경제, 문화등 각방면에서 중요한 조치를 취한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본떠서 티벳문자를 창립한다. 이외에 송찬간포는 정략결혼의 외교술로 왕조를 공고히 한다. 먼저 남방의 네팔에 청혼하여 적존공주(赤尊公主)를 취한다. 그후 당태종 정관8년에 사신을 장안에 보내어 혼인을 요청한다. 그러나, 당태종은 완곡하게 거절한다. 송찬간포는 대노하여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치게 된다. 당태종도 무력으로 반격하여 토번을 격파한다. 이번 전투를 거치면서 당태종은 토번이 완강함을 알게 되고, 정복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티벳왕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때가 정관14년이다.

 

다음해(정관15년), 문성공주는 장안에서 출발하여, 2년간 산넘고 물건너 라싸에 도착한다. 문성공주를 따라 티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한족의 문화, 예술, 의학, 역법, 농업등 문화기술을 티벳에 전파해준다. 나중에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불러온 장인들로 하여금 대소사(大昭寺, Jokhang Temple), 소소사(小昭寺, Ramoche Temple)를 건축한다. 대소사는 건축이 웅장할 뿐아니라, 티벳불교의 성전으로 되어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성공주가 가져온 불상, 불경 및 경건한 신심은 티벳에서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불교는 티벳문화 및 티벳인들의 생활에 깊고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문성공주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650년, 송찬간포가 죽은 후,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는 악화되어, 쌍방은 싸우기도 하고 휴전하기도 하였다. 당목종 장경3년(823년)이 되어서 쌍방은 각자 내란이 빈번해지자, 상호불가침협정을 맺고 이를 비석에 새겼다. 그리고는 장안과 라싸에 각각 세웠다. 지금도 라싸에는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대소사의 앞에 서있다.

 

송찬간포부터, 불교는 토번에서 성행한다. 나중에는 인도의 고승이 티벳에 들어와서 불법을 전하면서, 티벳의 원시종교인 발교(鉢敎)와 결합하여 티벳밀교가 창립된다. 즉, 현재의 라마교이다. 라마교의 세력이 점차 증대하면서, 구귀족대신들과 갈등이 발생하며, 각종 충돌이 일어나게 되며, 심지어 군웅할거의 국면까지 벌어진다. 토번은 점차 암흑시대로 접어들고 국력은 날로 쇠락한다.

 

사카(薩迦, Sakya)왕조와 정교합일

 

기나긴 암흑시대를 거쳐, 11세기초 토번문화는 다시 부흥한다. 불교는 티벳에서 몇개의 교파를 탄생시킨다. 13세기때, 토번은 원나라에 투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판도내에 들어간다. 원나라는 비록 장군을 파견하여 토번에 주둔시키기는 했지만, 티벳인들은 자주권을 유지했다. 원세조 쿠빌라이가 등극한 후, 티벳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써서, 티벳불교의 사카파의 영수인 파스파(八思巴)를 국사로 모시고, 티벳의 통치권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티벳은 다시 한번 통일된 왕조 사카왕조를 이루게 된다. 다른 측면으로, 티벳의 불교도 원나라황제의 신앙을 힘입어 북방의 몽골초원에까지 전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중앙아시아, 내몽고, 외몽고의 몽골각족이 라마교를 신봉하는 원인이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사카왕조도 함께 쇠망한다. 마침내 갈거파(?擧派,Bka-brgyud 白帽派)의 파죽(?竹, Phag-gru)파에 의하여 대체된다. 이후, 티벳왕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티벳의 권력자가 된다. 다만, 티벳왕와 라마교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하여, 정교합일의 국면은 여전히 유지된다.

 

이 시기에 티벳에서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종카파(宗喀巴, Tsong-Kha-pa, 1357-1419)의 종교개혁이다. 그는 티벳불교계가 퇴폐하였다고 보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새로운 교파인 게루파(格魯派, Gegupa, 黃帽敎)를 창시한다. 게루파는 신속히 발전하여 티벳의 주류종파가 된다. 종카파가 죽은 후에는 게루파가 '활불'제도를 이용하여 교파의 계승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두 제자는 각각 환생하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된다.

 

명신종 만력8년(1580년), 게루파의 우두머리는 몽고 투무터의 옌다칸에 의하여 '달라이라마'라는 존호를 받는데, 그가 바로 달라이3세이다. 그는 이전의 두 사람을 달라이1세, 달라이2세로 추존한다. 1645년, 샤가츠(Shiagatse, 日喀則)의 게루파 장문인은 몽고허소트부의 구시칸에 의하여 '판첸라마'라는 존호를 받는다. 그도 이전의 세 장문인을 추존하고 스스로 판첸4세가 된다.

 

17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까지, 비록 외부세력의 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티벳정권은 달라이라마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달라이라마정권이 건립된데는 달라이5세의 공이 크다. 달라이5세(1617-1682)는 정치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1643년, 그는 몽골구시칸의 군대를 이용하여 티벳왕을 격파하고, 티벳을 통일한다. 그리고는 정교합일의 "간단포장(甘丹頗章)"정권을 건립한다. 이후 청나라순치9년(1652년), 북경으로 황제를 친견하고, 청나라정부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티벳문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문학, 예술에서 모두 큰 발전이 있었고, 티벳에술을 집대성한 포탈라궁도 이때 중건된다.

 

청나라초기의 통치와 영국의 침입

 

달리이5세이후, 티벳의 국면은 불안정해졌다. 청나라조정은 티벳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강희44년(1705년) 주티벳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한다. 강희59년, 청나라조정은 다시 군대를 보내어 라싸에 주둔시키고, 달라이7세의 신정부를 성립시킨다. 옹정5년, 청나라조정은 주장대신제도를 명확히 규정한다; 건륭15년, 주장대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티벳의 주요한 정치사무는 반드시 달라이라마와 주장대신이 합의하여 결정하게 하였고, 티벳은 이로써 청나라의 종주권하에 있는 보호국이 된다. 건륭55년, 네팔이 티벳에 침입하여, 샤가츠를 함락시킨다. 청나라조정은 군대를 보내어, 네팔을 격퇴한다. 그리고 영토를 위(衛, 前藏), 장(藏, 後藏), 강(康, 西康) 및 아리(阿里)의 네 부분으로 나눈다. 이로써 중국의 티벳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된다.

 

18세기말엽이후, 영국은 인도를 근거지로, 세력을 중국서남지구로 전개하고자 하며, 여러차례에 걸쳐 티벳과의 통상을 요구한다. 1888년, 영국과 티벳간에 무장충돌이 발생하여, 상호관계가 악화된다. 마침내 1903년, 영국은 영국령인도의 군대를 티벳으로 들어가게 한다. 쌍방은 강자(江孜) 종산(宗山)에서 격전을 벌인다. 지금도 종산에는 영국군에 대항하여 싸운 포대가 남아 있다. 강자를 함락시킨 후 영국군은 라싸로 쳐들어간다. 달라이13세는 몽고로 도망친다. 판첸라마는 영국과 "라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달라이13세는 몽고에서 북경으로 간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청나라조정이 무능하여 부탁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선통원년(1909년) 다시 라싸로 돌아가서 독립하고자 한다. 청나라조정은 이를 알고, 사천총독을 보내어 라싸를 점령한다. 달라이13세는 다시 티벳을 나와서 인도로 가서 영국에 보호를 요청한다.

 

독립충격하의 티벳

 

신해혁명(1911)이 일어난 후, 달라이13세는 다시 라싸로 돌아오고, 영국의 도움하에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금사강서쪽을 티벳의 땅으로 선언하여, 서강일대에서 자주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당정부가 건립된 후, 중앙정부가 티벳판사처를 설치했지만, 금사강서쪽지역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51년,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벳을 진주하고, 티벳평화해방협정을 체결한다. 1956년, 티벳자치구를 설립하고, 금사강서쪽지역을 티벳자치주에 속하게 한다. 티벳자치주정권이 성립된 이후, 전통적인 노예제사회체제와 종교지상의 사원제도가 개혁됨에 따라, 티벳각지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반항운동을 벌인다. 심지어 1959년에는 라싸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달라이14세는 인도로 망명하며, 그를 따라 망명한 티벳인들이 10여만에 달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은 티벳에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고, 승려들은 쫓겨났으며,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티벳의 역사문화에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하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이미 티벳인들의 종교자유를 회복시키고, 티벳인들에 의한 티벳통치를 추진하는 등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독립의 목소리를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87년가을에서 1988년봄까지 반년동안 라싸에서는 여러차례 반정부운동자들과 군대간에 충돌이 있었다. 이리하여 라싸는 1988년봄 계엄을 선포하고 1990년4월에야 계엄을 해제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망명한 달라이14세는 시시각각으로 각국을 다니면서 티벳의 '비폭력'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다. 1988년 6월, 그는 프랑스에서 선언을 발표하여, 만일 중국이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티벳도 중국이 티벳의 외교권을 보유한다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달라이14세 본인은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