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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티벳

활불환생(活佛轉世)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08. 3. 24.

글: 희열다길거사(希熱多吉居士)

 

"활불환생"(중국에서는 活佛轉世라고 함)은 티벳불교(藏傳佛敎)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다. 이는 중국불교(漢傳佛敎)나 동남아불교(南傳佛敎)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활불환생"은 중국역대중앙정부가 티벳불교의 질서를 유지하고,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인정한 일종의 조치였다. 활불환생제도는 티벳불교사원이 자신들의 지도자의 승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건립한 제도이다.

 

현재, 티벳불교에서 가장 큰 몇 개의 활불환생체계는 모두 역대중앙정부가 책봉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라이(達賴)라마환생체계, 판첸(班禪)라마환생체계, 대보법왕(大寶法王)환생체계, 장자후투크투(章嘉呼圖克圖)환생체계등등이 그것이다. 이들 활불환생체계는 예외없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고,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역대중앙정부는 "활불환생"을 책봉하고 권력을 인정했을 뿐아니라, "활불환생"을 금지한 선례도 있다. 청나라 건륭제때 "반란죄"를 이유로 가마가쥐(噶擧)홍모계(紅帽係)의 활불환생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이 일맥은 환생체계가 중단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은 가마가쥐 흑모계(黑帽係)(즉, 현재의 17세 대모법왕의 전승)는 알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가마가쥐 홍모계의 전승체계도 있었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다. 가마가쥐 홍모계는 제1세활불인 찰파승격(札巴僧格, 1283-1349)이 원나라 황실구성원으로부터 붉은 승려모자를 받았다는데서 유래한다.

 

홍모계의 제10대 활불, 즉 마지막 활불은 이믐이 주자춰(朱嘉錯)였다. 그는 6세판첸라마인 패단의희(貝丹意希, 1738-1780)와 동모이부(同母異夫) 형제간이었다. 6세판첸라마는 건륭제의 70회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열하(熱河)의 수미복수사(須彌福壽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에, 천연두에 걸려 북경에서 원적하고 만다. 당시 건륭제와 만주, 몽고, 한족의 각 왕공대신들은 6세판첸라마에게 많은 부의와 물건을 보낸다. 합치면 약 10만냥 백은에 해당하였다. 6세판첸라마의 또다른 형인 중바후투크투(仲巴呼圖克圖)는 당시 찰십륜포사(擦什倫布寺)의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이 재산을 주자춰에게 나눠주지 않고, 모조리 자기가 독차지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자춰는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네팔로 도망쳐가서, 고르카(廓爾喀)의 통치자를 끌어들여 티벳으로 쳐들어오고, 찰십륜포사의 재물을 강탈한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유명한 대장인 푸캉안(福康安)을 파견하여 대군을 이끌고 티벳에 가서 고르카의 침입을 물리친다. 주자춰는 겁을 먹고 자결해버린다. 푸캉안은 대군을 이끌고 고르카를 티벳에서 몰아냈을 뿐아니라, 네팔까지 쳐들어가고, 나중에 고르카의 왕에게 주자춰의 유골과 처자식, 제자시종을 넘겨주는 것을 정전의 조건으로 삼는다.

 

나중에 건륭제는 주자춰의 유골을 티벳각지의 사원에 보내어 걸어놓게 함으로써, 반란에 대한 경고를 삼았다. 홍모계에 속한 사원, 토지, 목장, 농노는 모조리 국가에 몰수된다. 홍모계의 승려들은 칙령에 따라 황모파(黃帽派)로 개종하게 하며, 홍모계의 활불환생을 금지시킨다. 이로써 가마가쥐 홍모계는 단절되어 버린다.

 

재미있는 일은 건륭제가 최초로 활불환생을 금지시킨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티벳지방정권에서도 일찌기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금지시킨 바 있다.

 

3세달라이라마 소난자춰(索南嘉錯)가 원적한 후 1년만에 명나라 목종에 의하여 순의왕으로 봉해진 몽고 투무터부의 칸잉 얜다칸의 손자인 수미르의 아들이 탄생했고, 이 어린 아이는 3세달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어, "환생영동(轉世靈童)"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바로 4세달라이라마 운단자춰(雲丹嘉錯, 1589-1616)이다.

 

달라이라마의 환생이 몽고왕족의 집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은 당시 황모파의 상층부와 몽골족 통치계급간의 당시형세하에서 쌍방에 모두 유리하게 처리한 미묘한 조치였다. 이로써 황모파는 티벳의 다른 교파와의 지방세력투쟁에서 몽골족의 군사력에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황모파 지도자들은 모두 운단자춰가 소난자춰의 환생영동이라고 인정했으며, 이는 황모파집단의 사원이 당시 외족의 군사력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1602년, 몽고에서 군대를 대동하여 운단자춰를 티벳으로 보낸다. 가는 길만 1년여가 걸려서 1603년에 비로소 라싸에 도착한다. 4세 달라이라마와 그를 호송한 몽골군대가 도착하자, 후장(後藏)지구에서 새로 흥성한 신사바(辛廈巴)가족은 아주 불안해 했다. 그들은 전장(前藏)지구를 무력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1605년, 신사바가족의 단송왕부(丹松旺布)는 라싸북부의 분성(盆城)을 점령한다. 1610년, 신사바가족의 지도자인 펑춰난제(彭錯南杰, 1586-1620)는 티벳지방정권 즉 디시장바(第悉藏巴)정권을 건립한다. 이로써 라싸의 황모파세력과 산남(山南)의 파주(竹)집안과의 연결을 차단시켰고, 파주 집안과 기타 세력의 연합군을 무찌르게 된다.

 

1612년에서 1613년 사이에, 펑춰난제의 세력은 라싸주위까지 확장되고, 황모파세력과 그를 지지하는 몽고군대와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한다. 이 시기에, 몽고족의 상층인물은 부처를 배알한다는 명목으로 라싸로 찾아오고, 대량의 인원을 데리고 와서 황모파를 지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쌍방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긴장된 국면하에서, 1616년말, 4세달라이라마인 운단자춰가 돌연 철방사(哲蚌寺)에서 사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펑춰난제가 중병에 걸렸는데, 운단자춰가 저주를 해서 그렇다고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어 운단자춰를 암살했다고 한다.

 

4세 달라이라마가 죽은 후, 펑춰난제는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금지시킨다. 나중에 몽고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1617년, 1621년 두번에 걸쳐 티벳으로 진입하여 디시장바정권과 전투를 벌인다. 펑춰난제가 1620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5세 달라이라마의 환생이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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