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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티벳

고산반응(高山反應)과 중국-티벳교류사

by 중은우시 2007. 2. 28.

글: 갈검웅(葛劍雄)

 

티벳(Tibet, 중국에서는 西藏이라고 함)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티벳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격리된 지리적 환경에 처해 있었고, 중국의 다른 부분과의 관계, 특히 한족이 거주하는 중원지구와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모두 불리한 교통조건을 생각할 것이다. 티벳과 내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 곳은 세계의 지붕에 속해 있어 산맥이 겹겹이 막혀 있고, 기후조건도 열악하여, 사람과 물자를 교류하기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생각못하는 한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고산반응이다.

 

사실,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이 괴이한 현상에 주목했다. 2천년전에 이미 고산반응에 대한 기록이있었다. <<한서. 서역전>>에는 기원전 1세기말에 두흠(杜欽)이 피산(皮山)에서 현도(顯度)까지의 교통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피산의 남쪽부터....다시 대두통(大頭痛), 소두통(小頭痛)의 산(山), 적토(赤土), 신열(身熱)의 언덕을 거친다. 사람으로 하여금 몸에 열기가 올라 기색이 없게 하고, 두통과 구토를 하며, 나귀나 가축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천여리를 가면 현도에 도착한다."

 

피산은 현재의 신강 피산현 일대이다. 현도는 지금의 타스쿠르간 서남의 카라코룸산과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산이다. 그래서 대두통, 소두통의 산은 신강경내의 쿤룬산(곤륜산)과 파미르고원을 가리킨다. 이 일대는 해발이 모두 4000미터가량이고, 일반인들이 이 곳에 오면 두통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도가 증가함에 따라 두통의 증상도 가중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두통산과 대두통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고산반응의 원리는 몰랐지만, 이미지는 명확히 고산반응의 특징을 집어내고 있다. 두통. 그리고 이미 가축들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구당서>>의 <<토번전>>과 <<후군집전>>에는 모두 정관9년(635년)에 후군집과 이도종이 청장고원동북부의 토곡혼을 추격할 때의 행군노선을 기재하고 있다. 후, 이의 두 사람은 남로로 진군하여 한곡산(漢哭山)을 넘었고, 오해(烏海)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2천여리의 황무지를 지나고 다시 성숙천(星宿川)을 지나서 백해(柏海)에 이르렀다. 오해는 지금의 청해성 고해(苦海)이고, 성숙천은 지금의 약고종열거이다. 백해는 오늘날의 찰릉호와 악릉호이다. 후, 이의 군대는 한곡산을 넘은 후 오해에 도착했다. 그래서 한곡산은 오늘날의 악랍산(鄂拉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발 4천미터 가량인데, 주의할 것은 "한곡산"이라는 명칭이다. 당나라군대는 처음으로 티벳을 깊이 들어갔으므로 현지의 원래 지명을 사용했을 것인데, 당나라사람 자신들은 절대 자신들에게 불길한 이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현지사람들의 발음을 한자로 고쳤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 두 글자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래의 지명을 의역(意譯)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대체로 한족들이 이 곳에 오면 고산반응으로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멀리 떠나온 것에 절망하여 통곡을 하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토혼곡사람들은 이곳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교통조건과 마찬가지로 고산반응은 오랫동안 한족과 티벳족간의 교류에 영향을 주었다. 다른 민족과 비교하면, 한족과 티벳족간의 상호이주는 많이 적었다. 당나라는 토번과 교류가 비교적 많던 시기인데, 현존하는 역사자료를 보면,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성공주의 일행과 소수의 사절이 적극적으로 티벳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은 모두 토번군대에 포로로 잡힌 군인과 강제로 이주당한 평민이었다.

 

오늘 날의 의학지식은 이미 고산반응의 원인을 모두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모두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심리적인 부담도 크지 않다. 거기에 산소흡입병등 보조수단과 긴급조치가 가능하여 의외의 사고가 날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고산반응은 사람들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적시에 적당히 방비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리상의 공포와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다.

 

고원에서 평원으로 내려온 후의 불량반응도 마찬가지이다. 토번인들은 산소가 적은 공기를 마시는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일단 산소량이 많은 공기를 마시게 되면 "산소에 취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기간동안 적응이 필요하다. 이것도 역사상 토번인들의 이주와 활동범위를 제약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당제국의 운명을 살리는 계기도 되었다.

 

당대종(唐代宗) 광덕원년(763년) 10월, 토번의 20만대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재의 섬서성 서안)을 함락시켰다. 당대종은 섬주(하남성 섬현)으로 돔ㅇ쳤고, 부원수 곽자의는 상주(商州)로 퇴각했다. 그러나 15일후, 토번은 황망히 장안에서 물러가고, 감숙성 경내로 되돌아간다. 토번이 돌연 퇴각한 원인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기재하고 있다. 하나는 당나라 사람들이 2백의 기병을 뽑아서 산수를 건넜고, 토번군대에 "곽자의의 군대가 곧 온다"고 소리쳤으므로 이에 토번인들이 놀랐다는 점. 다른 하나는 소장 왕보(王甫)가 소년깡패들을 데려와서 어원에서 북을 치며 소리를 질러서 토번군대가 놀라 밤중에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이유는 아무리 봐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전에 곽자의는 싸울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섰는데, 토번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놀랄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토번이 장안에 들어온 후 당나라의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앉혔으며 문무백관을 임명했으므로 이미 장기간 눌러앉을 태세를 갖추었는데, 몇 사람이 소요를 일으킨다고 놀라서 밤중에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밤중에 혼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병사들이 추격하지도 않았는데, 토번인들이 아무런 상황파악도 없이 그대로 병사를 되돌릴 리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 사람들은 토번인들이 왜 갑자기 물러갔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이 두 가지의 우연한 사건과 연결시켜서 생각했을 분이다. 토번이 점령한 이후 계속 안정적이었던 농동고원을 보면, 그들은 관중평원과 같이 저지대에서 생활하는 것은 불편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첫번째로 장안에 들어온지 오래되지 않아 두통등 불량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원인불명의 재난으로 토번인들은 매우 놀랐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것이다.

 

이 사건은 토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는 평원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번이 강성하던 시기에, 그들의 강역은 사천성, 운남성의 서부, 청해, 감속 그리고 신강의 대부분의 지역 및 인근 중앙아시아지역에까지 미쳤다. 그들의 병력은 신흥 아랍제국군대에 맞설만했으나, 그들은 관중(關中)으로 진출할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만일 토번인들이 저해발반응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이 반응의 원리를 이해했더라면, 그들은 장안에 더 많은 기간을 머물렀을 것이고, 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한족측면에서도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티벳에 대하여는 외경적인 태도를 취했다. 문성공주이 티벳으로 시집간 것은 한족과 티벳족의 교류역사상의 일대 사건이지만, 당나라측면에서는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고, 당태종도 자기의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아서, 종실여자를 뽑았던 것이다. 문성공주일행이 티벳으로 가는 2년여의 기간동안 서서히 고산반응을 극복해가고 고원의 환경에 적응했을 거시다.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티벳으로 간 사람들을 보면 모두 기본적으로 정치, 군사 또는 종교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었고, 관광이나 조사목적은 없었다. 명나라 말의 대여행가 서하객(徐霞客)조차도 티벳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와 비교하면, 몽고고원에서 온 유목민족은 비교적 쉽게 청장고원(청해, 티벳고원)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목민족은 종종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지났고, 청해에서 점차 위쪽으로 이동해갔으며 서서히 고산반응을 극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몽고고원과 청장고원의 교류는 비교적 밀접했다. 15세기이후, 티벳불교는 청해를 통하여 몽고고원으로 유입되고, 몽고족의 주요하거나 유일한 종교가 된다. 이와 동시에 몽고인들도 계속 티벳으로 들어간다. 한번은 티벳의 최고통치자까지 된다. 또 한 달라이라마의 환생아동은 몽고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고대 티벳은 거리가 비교적 가깝고, 교통이 상대적으로 편리한 인도와 남아시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 불교가 비교적 일찌기 티벳으로 전파되고, 티벳의 특징과 결합되어 티벳불교를 형성하게 되며, 장기간 정교합일의 국면을 유지하게 된다. 인도가 영국식민지가 된 이후, 영국은 계속하여 티벳을 자신들의 세력범위내에 넣기 위하여 노력한다. 비록 영국의 침략에 대하여 중국과 티벳인들이 반대하였지만,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철로와 도로를 히말라야산 남록까지 건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의 철로는 2천킬로미터 바깥에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들도 티벳에 들어가는데 인도를 통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현격한 교통조건의 차이에 고산반응의 제한까지 겹쳐서 티벳이 남방의 영향을 깊이 받아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지에서 티벳으로 연결하는 도로와 항공노선이 개통되면서, 특히 청장철도가 개통되면서, 티벳과 중국내지, 티벳족과 한족간의 교류에 아주 편리한 수단이 제공되었다. 현대화된 교통공구(산소공급기능이 있는 철로)는 고산반응을 극복하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현대에도 고산반응은 티벳과 내지의 각지방간의 교류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까지 사람들이 고산반응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의 조절을 통하여 점차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적으로 산소를 흡입하는 것이다. 앞의 방법은 많은 사람에게는 유효하나, 일부 사람들은 조절되지 않는다. 만일 그 중에 반드시 티벳으로 가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보전할 수 없는 손실이 된다. 그리고 체력적으로 적응된다고 하더라도 전체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공기가 결핍된 환경하에서는 사람의 사고도 무디어진다. 학술연구, 과학실험, 문예창작등은 최고의 상태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반드시 양지역을 오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반복하여 조정하여야 하는데, 어려움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과학연구를 하고 고산반응을 해결할 새로운 수단을 찾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교통을 개선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는 사람이 많으면 적응하는 사람도 많게 될 것이다. 길에서 소비하는 시간도 줄이고, 조건이 적합하게 되고, 자신의 조절도 비교적 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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