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욱(山旭)
곽강.강파단달(霍康.强巴旦達)의 여러 손자들 중, 하나의 이름에 '곽강'을 붙여주었다. 6,7백년이나 지속된 이 오래된 가문에 다시한번 먼지 속에 묻혀 있던 특수한 칭호를 붙이게 된 것이다.
'곽강'은 이 가족의 '방명(房名)'이다. '방명'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소 혹은 봉지(封地)에서 따오며, 티벳 구귀족의 특유한 가족칭호이다.
라싸의 색랍로(色拉路) 티벳우유회사의 곁에 있는 주택에, 64세된 자치구 부녀연맹의 은퇴간부는방명으로 손자의 이름을 짓는 것이 무슨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지는 않는다. "귀족계층은 이제 철저히 소멸되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곽강'이라는 예전에 혁혁했던 가문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티벳문화와 라사풍속을 연구해왔던 강파단달은 '곽강'이라는 이 방명을 기억하는 것은 '일종의 특수한 문화전승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라싸부근의 갑마(甲瑪)지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곽강'은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2008년, 티벳자치구 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은 갑바와 곽강가족의 관계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가족의 혈맥은 14세기초엽에 티벳에 들어온 몽골귀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계속하여 유지해 왔다. '곽강'은 '곽이강살(霍爾康薩)'의 줄임말인데, 티벳어로 '몽골인의 새로운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곽강집안과 갑마역사의 관계는 한때 흥성했던 티벳구귀족가문의 대표일 뿐이다. 티벳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귀족들의 생활과 투쟁은 고원지대에서 계속하여 있어왔다. 통계에 따르면, 1959년 티벳민주개혁이전에 티벳의 구귀족가문은 개략 197개에 달했다.
반세기전에, 티벳사회의 대변혁이 도래하기 전에, 지방정부, 사묘(寺廟)와 더불어 3대지주로 불리던 귀족계층은 농노제사회의 민주화개혁과정에서 점점 변화하게 된다. 봉건특권과 착취를 폐지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민주개혁에 귀족제도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이다.
구귀족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그들의 자손은 그 변화속에서 평범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곽강가문은 특수한 몽골조상을 두었을 뿐아니라, 티벳에서 얼마되지 않은 상세한 족보를 가진 대가족이다.
티벳의 귀족제도는 5세 달라이라마부터 시작한다. 그는 몽골족의 도움으로 티벳종교지도자의 지위에 오른다. 달라이라마는 그가 신임하는 승려들을 정부요직에 기용하고, 승관(僧官)시스템을 확립하여, 티벳최고통치자에 특수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후에 세속행정계시스템의 구조에 따라, 속관(俗官)시스템을 건립한다.
승속관리계통은 상호 독립되어 있다. 1793년 최고권력기구로 확립된 갈하(噶厦)에서 4명의 3품관리 갈륜(噶倫)이 있다. 그들의 지위는 평등하며, 중대한 사항은 투표로 결정한다. 갈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3명의 속관과 1명의 승관으로 구성된다. 한때는 모조리 속관이 차지한 적도 있다. 그리고 한 때는 4명의 속관과 1명의 승관 합쳐서 5명으로 확대된 적도 있다.
귀족가문은 먼저 속관가족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드시 1명의 남성구성원을 정부관리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1959년 민주개혁전에, 티벳의 그다지 크지 않은 귀족제도는 6개의 '아(亞)'가족, 5개의 '제본(第本)'가족 및 약간의 미찰(米扎)가족 및 소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가족에서 누군가가 '갈륜'의 직위를 맡았지만. '아'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미찰'로 불리운다. 갈하가 최종적으로 없어질 때까지, 모두 37개 가족이 이 직위를 맡았었다. 곽강.강파단달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1765년과 1790년에 갈륜이 되었다. 이렇게 2번이상 갈륜의 직위를 얻은 가족은 모두 14개이다. 그들은 당시 정치무대의 주역이었다.
"제본"즉 "제본미찰(第本米扎)"은 명칭으로 보아도 특수한 미찰가족이다. 그러나 정의는 모호하다. 그들중 랍가일(拉嘉日)가족은 한번도 갈륜을 맡은 적이 없다. 그러나, 산남(山南)의 랍가일지구는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뒤에서 언급할 "파랍(帕拉)"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제본가족은 모두 고장왕(古藏王)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얘기한다.
이들 토번시대의 이야기는 신화적 색채가 충만하다. 예를 들어, 제본가족인 "탄파(呑巴)"는 자칭 송찬간포(松贊干布)의 수석대신이자 티벳문자를 창시한 탄미(呑米).상포찰(桑布扎)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그들의 역사적인 전승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793년, 청나라조정의 임명으로 티벳의 귀족계층은 상황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후 1959년까지의 티벳귀족권력의 판도는 유지된다.
절대다수의 여행자들은 라싸 약왕산(藥王山) 위에 있는 자그마한 관제묘(關帝廟)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주위의 거대한 라마묘와 비교하자면, 확실이 자그마하다. 관제묘안에는 석비가 새겨져 있는데, "만세불후(萬世不朽)"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근대 티벳귀족권력의 바탕이 된다.
1793년, 대장군 복강안(福康安)은 두번째로 티벳에 침입한 곽이객(廓爾喀)족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다. 건륭제는 그후에 새로운 티벳관리방법 즉 <<흠정장내선후장정(欽定藏內善後章程)>>을 반포한다.
이 문서에서 달라이라마, 판첸라마의 환생제도와 주장대신(駐藏大臣)의 지위를 규정했을 뿐아니라, 티벳귀족의 신분과 지방정부의 관제도 확인해주고, 내지의 구품제에 따라 관직을 내렸다. 이전 수십년동안, 달라이라마가족의 가장은 이미 이등공작 보국공의 작위를 받았었다. 그후 나머지 티벳귀족도 삼품에서 칠품까지의 품계를 받았다.
이번의 조치는 티벳귀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모호했던 조상의 전승 이외에, 그들의 신분은 제도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도, 절대다수의 귀족후예는 자술서를 쓸 때, 모두 자기가족의 품계를 먼저 언급했다. 나중에 사품을 경계로 하여, 고급귀족과 일반귀족이 구분된다. 사품을 얻었다는 것은 상층귀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번의 곽이객족과의 전쟁에서, 티벳의 손실은 적지 않았다. 찰십윤포사(扎什倫布寺)는 약탈을 당하여, 상대 판첸라마의 금책까지도 약탈당한다. 그러나, 전쟁은 일부 가족에게는 기회였다.
곽강가문의 조상인 색낙목랍희(索諾木拉喜)는 전쟁의 공로로 삼품에 상당하는 찰살극(扎薩克)이라는 칭호를 받고, 마침내 갈륜에 오른다.
티벳이 안정된 후, 복강안은 약왕산 관제묘에 비석을 세워서 기록한다. 그는 청나라조정이 티벳에 세운 제도와 그가 곽이객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공적이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란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강안이 쓴 비문은 여전히 대부분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상, 일찌기 <<흠정장내선후장정>>을 새긴 비석이 대소사(大昭寺)와 찰십윤포사에 세워져 있었다. 1950년, 일부귀족은 라싸에서 한족-티벳간의 거의 모든 문화재를 파괴한다.
확실히 1959년에 가까워지면서 일부 티벳귀족은 1793년의 청나라조정의 봉수((封授)에 대하여 모순된 심정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근거가 바로 그 청나라조정의 봉수였다. 그들의 조상이 청나라중앙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티벳이 중국의 일부라는 역사적인 연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20세기가 되자, 오래된 전통은 귀족세계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파(瑪巴)제도이다. 즉, 데릴사위제도이다.
티벳사람은 성(姓)이 없다. 귀족에 있어서, 그들이 하사받은 토지 혹은 라싸의 주택 명칭이 바로 전체 가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름의 가장 앞에 썼다. 이것이 방명(房名)이다.
하사받은 토지는 "파(帕)" 혹은 "카(卡)"로 불리웠다. 토지를 얻으면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티벳귀족제도의 기초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은 남성후계자가 없는 귀족가족은 왕왕 데릴사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토지 및 방명을 승계했다. 데릴사위는 귀족세력 재조정의 방식이었다.
마파제도하에서, 귀족의 연원관계는 어지럽게 변화한다. 곽강.강파단달은 우리에게 곽강가문과 아패(阿沛)가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곽강가문의 최초의 부계는 18세기에 들어서 이미 남성후계자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에 가장 권세있던 섭정왕 파라내(頗羅鼐)가 자신의 동생을 데릴사위로 들여보내고, 그가 '곽강'의 명호를 승계한다.
곽강가문의 아왕진미(阿旺晋美)라는 사람은 1931년 아패가족에 들어가서 그 가족의 이미 죽은 갈륜의 처를 부인으로 취한다. 그가 바로 나중의 아패.아왕진미이다. 그의 곽강가문에 있을 때의 형제인 곽강.색랑변파(索朗邊巴)는 바로 이 글의 첫머리에 나온 강파단달의 아버지이다.
20세기에 마파제도로 인하여 생겨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달상점퇴(達桑占堆)의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신해혁명후에, 청나라제국의 티벳에 대한 공고한 통치는 무너지게 된다. 티벳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청나라군대의 우두머리인 조이풍(趙爾豊)도 피살당한다. 자칭 의성(醫聖) 우타.운단홍포(宇妥.雲丹汞布)의 후예라는 찰융(擦絨)가문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10년동안 갈륜을 담당하던 가장 왕추결파(旺秋結波)는 한족에 친근했던 것으로 인정되어 1912년의 갈하회의에서 일부 승려에 의하여 포탈라궁 아래로 끌려가서 총살당한다.
나중에 찰융가문에는 활불이 환생한 것으로 인정받은 어린 아들과 그의 5명의 누나와 형수 하나만 남게 된다.
달상점퇴는 달라이라마의 안배하에 찰융의 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리하여 찰융.달상점퇴가 된다. 달상점퇴으 딸인 돈주탁마(頓珠卓瑪)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부친은 원래 라싸부근의 팽파(彭波)라는 곳에서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5살때 색랍사에 출가한다. 나중에 나포림카(羅布林卡)에서 일을 했다.
1904년, 영국군이 침입하고, 십삼세 달라이라마는 몽골로 피난간다. 젊고 총명했던 달상점퇴는 몽골어를 배워서 달라이라마의 측근시위가 된다. 그후 그는 달라이라마를 안전하게 호송하여 신임을 얻는다.
찰융가문에는 차단탁알(次丹卓嘎)이라는 딸이 곽강가문으로 시집을 간다. 그녀는 바로 곽강.색랑변파의 모친이며, 강파단달의 조모이다. 차단탁알의 남편은 결혼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그녀는 다시 찰융가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달상점퇴와의 사이에 6명의 자식을 둔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돈주탁마이다.
확실히 달상점퇴가 찰융.달상점퇴로 변신한 것은 기적이다. 외부세계의 변화와 충격이 귀족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옷도 제대로 걸칠 게 없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던 자가 일약 '찰융'이라는 오래된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것이다.
달상점퇴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외국친구도 많았다. 14세 달라이라마가 출가할 때, 대소사의 모든 불상에 금칠을 한다. 네팔상인은 75냥하던 금가루 1병의 가격을 150냥까지 올렸다. 달상점퇴는 그가 잘 아는 독일인을 찾아가서, 인도에서 구매한 서적을 보고 순금으로 금가루를 만드는 방법을 익힌다.
달라이라마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달상점퇴는 얼마후 갈륜이 되고, 티벳군총사령관이 된다. 또한 조폐창, 방직공장 및 기타 현대화된 공장을 설립하고, 행정권력, 군대 및 경제명맥을 장악한다.
그후 사묘출신이지만 신분은 속관인 달상점퇴는 승관집단의 권세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그는 곁에 서방교육과 훈련을 받은 젊은 장교를 불러모았다. 그들은 서로 만날 때 악수를 하고, 커피를 차대신 마셨다. 심지어 테니스도 쳤다. 돈주탁마는 이렇게 얘기한다. 빈한한 출신이었던 달상점퇴는 여러번 서방제도와 중국제도의 장점을 토로했고, 농노제도의 폐해를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달상점퇴와 장교들은 갈하에 상소를 올려 개혁을 요구하기로 한다. 군대대표를 티벳의 중요회의에 참가하도록 허락하고, 군사재판은 갈하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회의후에 회의에 참석한 한 단장이 달라이라마에게 밀고를 한다.
얼마후, 달상점퇴는 모든 군정직위를 박탈당한다. 그저 귀족가장의 신분으로 도로,다리건설과 화초재배만 하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권력을 잡은 갈륜은 티벳인들은 지금까지 좁은 길로 다녔고, 소가죽배를 저었다는 이유로 그의 이런 행동마저도 금지시킨다.
개혁에 대한 열정이 있던 달상점퇴에게 또 다른 일면도 있었다. 1959년의 반란에서 그는 반란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해방군에 포로로 잡힌다.
13세 달라이라마가 원적한 후 1930년대에 속관집단은 다시 승관집단에 비교적 온화한 도전을 일으킨다. 이것이 "용하사건"이다.
비록 보수세력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라싸의 영어학교는 요절했지만, 많은 권력자들과 대귀족은 더 이상 팔곽가의 티벳식 집에서 살지 않고, 라싸강변의 외국인들이 지은 것과 같은 널찍한 별장에서 생활하게 된다. 찰융가문에는 양식을 할 줄 아는 주방장이 있었는데, 자주 다른 집안에서 빌려갔다.
오늘날 팔곽가에서 남쪽으로 걸어가면 이 별장지역을 만날 수 있다. 아패.아왕진미의 집도 라싸실험소학교 곁에 있다. 담황색의 서양식 건물이고, 그리 크지는 않다. 그러나 아주 편안하고 운치가 있다. 곁에는 일세를 풍미했던 곽강가문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섭정왕 파라내의 직계후손의 별장이 있다.
가정상황이 허락하면, 귀족들은 모두 자녀를 인도에 보내어 유럽식교육을 받게 했다. 8살된 돈주탁마도 다질링으로 보내어진다. 함께 간 것은 4명의 여자아이와 3명의 남자아이였다. 다질링에는 영국학교가 많았는데, 그들은 맹다호망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돈주탁마는 영어를 배웠을 뿐아니라, 농구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일부 귀족출신의 유배자들과 도망자들이 진정한 혁명을 기획했다. 우두머리는 방달(邦達).요알(饒嘎)이었다. 그는 방달창(邦達昌)가족의 한 방계이다. 강구의 반갈하폭동으로 1936년 인도로 도망갔다. 또 다른 인물은 철방사의 승려인 갱돈군배(更敦群培)로 유명한 티벳학자였다.
1946년초, 인도경찰은 요알이 4000장의 "티벳서부개혁당' 당원양식부분과 2000장의 당원등기카드를 주문한 것을 알게 된다. 나중에 요알의 주택을 압수한 자료를 보면, 그들은 티벳에 중화민국에 예속된 공화정부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자, 요알등은 내지로 도망친다. 갱돈군배는 3년형에 처해진다. 사람들이 '티벳서부개혁당'과 관련된 정보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인지, 갱돈군배가 구속된 죄명은 '화폐위조'였다.
이렇게 하여, 1959년이전의 50년간, 어떤 경향에서이건, 귀족집단이 시도한 모든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1951년, 해방군이 라싸로 들어간다. 그들은 '금주마미(金珠瑪米)'로 불리웠는데, 티벳어로 사슬을 여는 군대라는 뜻이다.
돈주탁마는 1953년에 라싸로 되돌아온다. 찰융가장은 이를 기념하여 연회를 베푼다.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다른 귀족들 뿐아니라 해방군의 고위장교도 있었다.
공상당원들도 곽강가문에 자주 손님으로 들렀다. 1950년, 색랑변파는 4품군수관으로 창도전투에서 해방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공산당과 접촉한 티벳귀족이 된다. 그는 그후에 창도해방위원회위원 및 티벳군구지방간부학교 교도처처장의 직위를 받는다.
찰융가문의 별장은 티벳군구연락부에 임대하였고, 돈주탁마는 그곳에서 영어교사를 지냈다. 그녀와 연랍부의 한족 여병사 및 출신이 비천한 티벳종 여병사는 서로 좋은 친구가 된다.
많은 귀족자제들과 마찬가지로, 돈주탁마는 애국청년문화연의회에 참가하여, 당시 라싸강변의 작은 집을 짓고 문화체육활동을 벌인다. 당시에 청년업무를 맡았던 공청단 티벳공위부서기 위극의 회고에 따르면, 1953년에 성립된 청년조직의 목적중 하나는 바로 상류계층 청년들을 통하여 전체 티벳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함이었다.
1953년말의 연의회상무위원회에서 보수집단이 돌연 곤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귀족출신의 부주인과 몇몇의 위원들이 연의회 정관을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상임위원숫자를 증가시켜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위극에 따르면 그들은 상층귀족의 교사를 받았다고 한다.
1957년, 곽강가문의 한 아들이 찰융가문에 구혼을 한다. 곽강.토등니마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청년애국문화연의회의 부회장, 청련 주석, 공청단 티벳공위 부서기를 지냈다. 그는 원래 승려인데, 1956년에 귀족신분을 버리고 공산당에 입당한다.
당시 토등니마는 이미 30세가 넘었다. 달상점퇴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그에게 보증인을 세우라고 요구한다. 아패.아왕진미가 보증인이 된다. 1958년 봄, 토등니마와 돈주탁마는 두 번의 혼례를 거행한다. 첫째는 곽강가의 저택에서 올린 티벳식 혼례였고, 둘째는 공청단 자취구공위의 강당에서 올린 신식혼례였다.
돈주탁마의 혼례는 온화한 변혁을 상징하는 시대의 축소판이다. 그러나 1959년 반란이 일어난다. 그후의 민주개혁에서 귀족들의 변화는 각각 서로 달랐다.
곽강.돈주탁마는 나중에 '티벳족가이드제일인'이 된다.
곽강.색랑변파는 자치구정협부주석, 자치구인대상위부주임을 지낸 후, 저명한 티벳학자의 신분으로 1955년에 별세한다.
곽강.강파단달은 자치구부련에서 은퇴한 후, 장문화연구자가 된다.
용하의 아들인 랍로.차왕다걸은 현재 티벳근대사의 권위자이다.
제본귀족인 파랍가의 후예인 농민 나포차인은 파랍장원에서 나온 후, 자신이 2층짜리 새 집을 지었다.
강자귀족 찰동재희림가의 재림.왕다는 티벳어로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역했다.
원래 포탈라궁 바깥에 살던 정운가의 10여명의 손자들은, 현재 각 업종에 흩어져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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