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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티벳

라싸의 서방인교류역사

by 중은우시 2010. 9. 6.

글: 환구망

 

티벳의 구귀족인 파라(拉)가족은 라싸에 저택이 있다. 파라가족은 티벳에서 '아계(亞谿)가족'에 바로 다음가는 "제본(第本)가족"중 하나이다. 장원은 강자(江孜)에 있고, 라싸의 저택은 3층으로 되어 있다. 저택부지는 강자의 파라장원만큼 크지 않지만, 건축밀도는 아주 높다. 건축총면적이 비교적 크고, 천정과 정원이 상당히 넓어서, 티벳극을 공연하거나 각종 법사활동을 거행할 수 있을 정도이다.

 

300년전에 예수회 신부인 이포리토(Ippolito Desideri)는 카시미르에서 출발하여, 서부티벳을 지나, 1716년 라싸에 도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1721년 소환될 때까지, 티벳어와 티벳불교이론를 공부하여 정통했고, 자주 거시(格西, 티벳불교의 고승)들과 변론을 했다. 그는 티벳을 전면적으로 소개한 첫번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서방의 티벳연구의 개척자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라싸에는 아르메니아인과 모스크바공국의 사람들도 와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서방인들은 티벳과 통상과 무역을 시작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행동에 들어간 것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였다. 그들은 사미아르드푸트라는 네덜란드인을 1728년 방글라데시에서 라싸로 보낸다. 그후 라싸에서 북경으로 갔다가, 티벳을 거쳐 되돌아온다. 그후 그는 티벳과의 육로통상문제에 대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동인도회사로 대체되고, 네덜란드인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명목상으로 영국정부를 대표하지 않는 영국인 매닝은 1811년부터 티벳탐험에 들어간다. 그와 함께 간 사람은 자오진슈(趙金秀)라는 광동인이다. 두 사람은 인도의 불교신도로 변장하고, '성지순례'의 명목으로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그들은 현지의 한족주둔군대에 발각된다. 매닝이 뇌물을 써서 두 사람은 주둔군의 군의관으로 라싸까지 간다.

 

1811년 12월 17일, 매닝은 포탈라궁에서 나이 겨우 7살된 9세 달라이라마를 접견한다. 매닝은 달라이라마에게 망원경을 한 개 선물한다. 원래는 자신이 쓰는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장대신이 그를 간첩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라싸에서 매닝은 현대의술을 가지고 병을 치료했다. 환자는 갈수록 많아졌고, 도저히 모두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는 사람은 티벳족, 한족이 모두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된다. 주장대신은 조정에 보고서를 올린다. <<청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청인종(가경제)은 군기대신등에게 명을 내려, "오랭캐가 길을 우회하여 티벳으로 왔다. 이는 성지순례를 핑계로 염탐하려는 것이다. 오랫동안 티벳에 머무르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렇게 하여, 매닝은 1812년 4월 19일 라싸를 떠나게 된다. 자오진슈는 붙잡혀 신강 이리에 군인으로 보내어진다.

 

<<라싸사>>에 따르면, "영국침략자는 영국국적 인도인 난신거(南辛格)등을 보낸다. 1865년 상인으로 변장하고 시가츠(日喀則, Shigatze), 강자를 거쳐 라싸로 간다. 이같은 정탐의 측량활동은 도시, 보루, 도로정보수집 티벳의 행군노선도를 포함하고, 광산자원정보 및 정치, 종교, 풍도인심등의 정보를 얻는 것도 포함된다. 그후 영국은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인도측량국에서 훈련받은 난신거는 암호가 "판즈다1호"였다.(티벳어에서 '반즈다'는 학문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판첸라마의 '판'은 바로 '판즈다'의 약칭이다) 난신거는 티벳어를 모국어로 하는 인도인이다. 원래는 학교의 교장을 지낸 바 있다.

 

난신거는 인도측량국에서 선발한 후, 주로 두 가지 훈련을 시켰다. 하나는 측량과 보행훈련이었다. 그로 하여금 산이건 평지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난신거의 걸음은 1걸음이 33인치였다. 그후 그는 염주로 정확하게 하루 내 혹은 두 개의 목표물간의 거리의 걸음수를 합산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 하나의 훈련은 마니륜(轉經筒)을 이용하여 비밀손잡이를 두고, 동륜을 열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록한 메모와 다른 정보를 적은 종이를 넣고 꺼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개선을 거쳐, 지남철도 안에 숨길 수 있게 된다. 그는 기도하는 듯이 하면서 지형을 기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육분의를 여행상자의 안쪽에 숨겨둔다. 온도계는 안을 파낸 곤봉안에 넣어둔다.

 

이들이 티벳에 들어가는 것은 커다란 리스크를 안는 일이다. 일단 발견되면 액운을 면하기 힘들다. 그들을 도와준 티벳인들도 모두 함께 처벌을 받게 된다.

 

난신거의 기록에 따르면, 라싸성의 해발은 견딜 수 있는 수준이며, 산으로 둘러쌓였는데, 동으로 6마일, 서로 7마일, 남으로 4마일, 북으로 3마일이라고 적었다.

 

그는 고찰보고서에서 라싸의 상주티벳병사는 1000명이고, 청나라군인이 500명이라고 적었다. 장비는 장수석창(長燧石槍)이라고 하였다. 7대의 작은 대포도 막 도입했다고 적었다. 1854년, 청나라정부에서 군인과 승려를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때, 라싸의 여자는 9천명, 남자는 6천명이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이유는 분명하다. 많은 남자승려들이 독신으로 지내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1854년, 함풍4년의 티벳인구통계에 관하여, 현재 중국의 사료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래서 난신거의 자료는 더욱 귀중한 것이다.

 

난신거의 보고에 따르면, 2월 7일, 그는 포탈라궁에 섞여서 들어갔고, 남쪽의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12세 달라이라마를 접견하고, 달라이라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비밀보고서에 청나라중앙정부와 티벳지방정부의 관계도 언급했다.

 

라싸는 1년에 한번만 수확할 수 있다고 했다. 4월에 심어서, 9월에 수확하는 것이다. 극소수 부자들의 집은 벽돌로 짓지만, 나머지는 모두 흙으로 짓는다. 라싸는 우물물을 먹는데, 집집마다 1달이 2안나스(인도화폐단위)를 납부한다. 매년12월, 한족땅, 타타르, 타전로(打箭爐), 창도, 강구, 다왕, 부탄, 시킴, 네팔, 다지링, 아자라 달라크에서 상인들이 온다. 타타르는 시닝에서 금뢰사를 가지고 오고, 타전로는 대량의 차를 가지고 온다, 창도에서는 대량의 사향을 가지고 오는데, 이들 물건은 네팔을 거쳐 유럽으로 수출된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1904년 영허즈번드(Sir Fiancis Edward Younghusband, 1863-1942)이 티벳에 들어갈 때부터 라싸의 사진을 찍었다고 알려져왔다. 실제로는 체베코프와 나주노프가 그보다 3년먼저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라마는 아니지만, 라마교를 믿는 민족이다. 체베코프는 러시아 부르아트 몽골인이고, 나주노프는 러시아 칼메크 몽골인이다. 당시 이들은 모두 20여세이고 후자는 직업사진사였다.

 

1899년 11월 25일, 체베코프와 나주토프는 러시아 지리학회의 파견으로 티벳에 들어간다. 당시 티벳지방정부는 외국학자가 티벳에서 고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티벳성지수례하는 부리아트 불교신도처럼 변장했고, 1900년 8월에 라싸에 도착한다. 그후 1년여동안, 체베코프의 족적은 티벳과 칭하이의 여러 곳에 미친다. 1902년 4월 4일 탐험을 마치고 귀국한다.

 

체베코프는 티벳어에 정통했고,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티벳학연구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둔다. 그의 <<티벳유력목기>>는 당시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유명하게 된 작품은 <<성지 티벳의 불교신도>>라는 책인데, 사회경제학의 각도에서 당시 티벳의 농노제도를 분석했고,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그가 티벳에서 가져온 티벳어 전적이 3백권인데, 그가 나중에 이를 가지고 연구하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러시아 티벳학계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게 된다.

 

체베코프와 나주노프 두 사람이 티벳에 있는 기간동안 라싸의 사진을 찍는다. 그중에는 포탈라궁, 대조사, 로부린카 및 일부 인물의 사진이 있다. 심지어 달라이라마의 사진도 1장 있다. 이들 사진은 그들이 귀국한 후에 러시아황실지리학회에 보관한다. 나중에 사진원판은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 매입하여 세상에 공개한다.

 

1888년 영국이 제1차티벳전쟁을 일으킨 후, 영국인들은 아동(亞東)으로 들어간다. 1894년 아동이 빗장을 연다. 영국은 현지에 상무대표를 파견하고, 1903년 영국은 제1차티벳전쟁을 일으킨다. 다음해 라싸조약을 체결한다. 같은 해부터 강자 및 아동에 상무대표처를 정식으로 설립한다. 1906년 다시 가다크에 상무대표처를 설립한다. 1936년 8월 시킴주재 정무관  구더(顧德)으로 하여금 라싸를 방문하게 한다. 그후 1950년까지 계속하여 라싸에 외교인원을 파견한다.

 

이들 영국의 외교인원으로 티벳에 파견된 사람이 200명가량이고, 주요관리는 그중 10분의 1가량이다. 그중에는 티벳통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합법적인 외교수단을 통하여,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적인 측면에서 티벳에 반세기가량 간섭을 했고, 티벳지방정부와 중국중앙정부의 관계를 대립하도록 부추겼다. 여기에 관해서는 영국외교부와 인도사무부의 각종 자료가 남아있어 증빙이 될 수 있다.

 

영국자료는 50년후에야 공개된다. 이는 과거 영국의 티벳침략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50년내의 자료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다. 1964년 및 1970년 윌슨 노동장정부는 이 기간을 30년으로 단축시켰고, 영국의 관련자료들은 공개되었다.

 

영국인도식민정부의 티벳주둔대표는 3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첫째, 주시킴정무관(Political Office in Sikkim), 둘째, 주강자(Gyantze),아동(Yatung) 및 가다크(Gartok) 상무대표처(Trade Agent), 셋째, 주라싸상무대표(Representative in Lhasa mission) 혹은 책임관(Officer in charge).

 

주라싸외교사절단은 1936-1937에 구더의 라싸행 이후에 만들어진다. 1937년 2월 구더는 라싸를 떠난다. 리지성(黎吉生)이 초대영국주라싸상무대표가 된다. 1937년 7월, 리지성이 떠나고, 주라싸대표는 노부둔주(諾布頓珠)이 이어받는다. 노부둔주는 라싸사람이다. 1904년 다질링대학을 졸업하고, 오코너의 눈에 들어 통역으로 Younghusband의 군단에 가담하여 라싸침공에 참여한다. 1905년 오코너가 판첸라마의 인도방문을 강제로 추진했을 때, 오코너의 통역을 맡는다.1912-1913년 구더가 강자상무대표를 맡을 때 그의 심복이 된다. 인도정부는 그에게 Rai Bahadur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약 1932년경 티벳정부는 그에게 '자사크(擦薩克)'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자사크는 라싸에서도 소수의 사람만이 부여받을 수 있는 고위칭호였다. 1936년 그는 아동상무대표직을 역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