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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은 어떻게 천하무적의 군대를 관리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7. 5. 29.

병마용의 고급장교(도위) 

 

글: 비룡(飛龍)

 

1975년, 호북성 운몽현의 철로변에서 죽간(竹簡)이 꽉들어찬 고대의 묘를 발굴한다. 묘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희(喜)라고 부르는 진나라의 하급관리였다. 그는 진나라의 복잡한 법률을 죽간에 써서, 죽은 후 자기의 신변에 놓아두었다.

 

죽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진시황이 등극한 해에 "희"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정부에 자기의 나이를 신고했는데, 당시는 이를 "부적(傅籍)"이라고 불렀다. "부적"의 뜻은 그가 장정으로 등기하였고, 국가를 위하여 일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죽간의 기재에 의하면, "희"는 각각 진시황 3년, 4년, 13년때 군에 들어가 전투에 참가한다. 이로써 볼 때, 진나라에서 한 사람이 일생동안 몇번 군대에 참여하는지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은 없었던 것같다. 17세부터 60세까지, 국가에서 필요로 하면, 모든 성년남자는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진나라는 또한 봉작(封爵)제도를 실시했다. 20급의 작위가 있었는데, 남자가 1급작위이상을 받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사면받을 수 있었다. 보통사람의 복역기간은 17세부터 60세까지인데, 작위가 있으면 복역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고, 56세에 퇴역할 수 있었다. 당시에 이를 "면로(免老)"라고 불렀다.

 

10년통일전쟁때, 진나라는 개략 100만명의 사병을 동원했다. 당시 진나라의 인구는 약 500여만이었으므로 진나라사람 5명중 1명은 사병이었다.

 

"희"의 경력으로 보면, 진나라가 실행한 것은 보편적인 징병제였다. 전쟁이 터지면, 모든 진나라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국가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죽간의 기재에 의하면, 군량은 국가가 통일적으로 공급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한 사병이 매달 받는 양식은 개략 40근가량이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명시키는동안에 전쟁은 2년을 끌었는데, 필요한 양식이 적어도 50만톤이상이었을 것이다.

 

상앙(商)변법의 핵심은 경전(耕戰)이다. 즉, 백성들을 그저 경작하고 전쟁하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다른 것은 전혀 필요없다. 백성이라면 생산할 때는 양식을 많이 거두고, 전쟁을 할 때면 적군을 많이 죽이면 되는 것이다.

 

진간(秦簡)내의 전률(田律)에 의하면, 비가 내리거나 가뭄이 들면 적시에 상부에 보고하여야 하고, 심는 종자의 수량, 밭가는 소의 사육, 사용하는 철제농기구도 모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국가는 법률로 경작에 대한 관리를 하였고, 전시의 수요를 보장받았다.

 

통일전쟁 85년전에, 파국(巴國)과 촉국(蜀國)이 진나라군대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파촉지구는 진나라의 양식창고가 되었다. 이빙(李氷)이 도강언(都江堰) 수리공사를 마친 후에, 파촉지구는 천부지국이 되었다. 도강언은 관개와 항운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고대수리사상 가장 위대한 공사였다. 2000여년후에도 도강언은 여전히 역할을 다 하고 있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기원전246년, 한나라 사람인 정국(鄭國)이 진나라의 관중평원에 250킬로미터의 큰 인공수로(鄭國渠)을 건설한다. 이로써 농토 280만무에 관개할 수 있게 되었다. 관중은 이때부터 비옥한 토지로 변모한다.

 

바로 정국거가 완공된 그 해, 진시황은 통일중국의 전면전쟁을 시작한다.

 

"희"는 죽간에 진나라군대가 형구(邢丘)를 공격할 때의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형구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사병 갑은 적군의 수급을 하나 베었다. 사병 을은 사병 갑을 죽여서 그 수급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했는데, 제3의 병사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사병 을은 붙잡혀서 사법처리를 받게 왼다.

 

진나라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적군의 수급 하나를 위하여 서로 죽고 죽이려 하다니. 도대체 무엇때문에 적군의 수급을 이렇게 갈망했던 것일까?

 

상앙은 진나라에 다른 어떤 나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법률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 전체는 엄격하게 이 법률에 따라 운영된다. 거기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진나라의 사병이 적군의 수급을 하나 베어오면, 바로 작위 1급, 전택(田宅) 1곳과 노비 수명을 받는다" 베어오는 적군의 수급이 많으면 많을수록 작위는 더 올라간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군공수작제도(軍功授爵制度)이다.

 

군공작위는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만일 부친이 전쟁터에서 사망하면, 그의 공로는 아들에게 기록된다. "희"의 죽간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군에서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매끼 먹는 음식과 요리마저 다르다. 작위가 없는 보통사병은 그저 배나 채우면 다행일 정도이다. 그러나, 군공에 따라 나뉘어진 등급은 삼엄하였고, 보통사병들로서는 군공을 세우려는 갈망에 가득차 있게 마련이었다.

 

진나라 병사들의 눈에 무를 숭상하고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군의 머리는 바로 지위와 재산과 맞바꿀 수 있는 화폐와 같았다.

 

진나라의 군공작위등급규정은 전국시대의 열국중 가장 복잡한 것이었다. 상앙이 제정한 군공작위는 아래서 위까지 모두 20급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군대계급과 비슷하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2000여년전의 진나라군데는 이미 엄격한 계급제도를 시행했는가?

 

진나라군대의 최전면에는 세 줄의 노병(弩兵)이 있는데, 몸에는 간편복을 입고, 머리는 같이 빗어서 가운데를 솟아오르게 하여 며리가운에 상투를 만들었다. 몸에 갑옷을 입고 있는 보병은 두발을 빗어서 변발로 하엿고, 머리뒤에 묶었다. 대량의 보병은 마포로 만든 뾰족한 둥근모자를 썼다. 그들의 위치나 배열로 볼 때, 사병복장과 머리장식은 서로 다르다. 이는 작위급별에 따른 표시일 것이다.

 

전문가의 추정에 의하면, 이런 상투머리의 간편복을 입은 노병은 아마도 1급작위일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작위가 가장 낮고 명칭은 공사(公士)였다. 몸에 갑옷을 입고, 머리를 변발로 늘어뜨리거나 둥근모자를 쓴 보병은 2급작위일 것으로 본다. 그들의 명칭은 상조(上造)였다. 이 거대한 병마용에서 공사와 상조는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이런 보통사병이 진나라군대의 주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두 줄의 벽 사이에 하나의 독립부대가 있는데, 팔을 드러내고 손에 고삐를 쥐고 있는 전차를 모는 어수(御手)이다. 병마용갱에서 모든 어수는 하나도 예외없이 판모양의 소가죽모자를 쓰고 있다. 갑옷도 보통전사보다 정교하다.

 

사서의 기재를 참고하면, 어수의 작위는 적어도 3급이상이다. 그들은 아마도 진나라군대의 최하급장교였을 것이다. 어수의 권력은 한 대의 전차를 지휘하는 것이다.

 

1대의 전차로는 작전단위를 구성할 수 없다. 전체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누구인가?

 

병마용에서 한 장교는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있고, 기세가 위엄있으며, 모자의 형상도 아주 독특하다. 그의 갑옷은 모든 병마용중에서 가장 정교하기도 하다. 갑옷조각이 가늘고도 작으며 규격에 맞다. 앞가슴과 뒷배에는 화결(花結)이 있는데, 이런 화결의 작용은 고대 장교의 계급장을 연상하게 한다. 전문가의 고증에 의하면, 이런 군관은 아마도 도위(都尉)일 것이라고 본다. 작위는 대체로 제7, 제8급정도일 것이고, 그는 적어도 하나의 부대를 이끈다.

 

도위와 어수의 사이에도 일종의 장교가 있다. 그가 쓴 것은 판모(板帽)이다. 그러나 판모의 중간에 한줄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군후(軍侯)와 같은 류의 초급장교일 것이며, 부대에 소속된 한 분대를 지휘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병마용에서 계급이 가장 높은 사람은 도위라는 것이다. 대체로 오늘 날의 대대장에 해당한다.  진나라군대를 통솔하는 최고지휘관은 어디를 갔는가?

 

진나라에서 군대를 움직이는 권한은 누구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가?

 

당시 군대를 움직이려면 반드시 호부(虎符)가 있어야 한다. 호부는 군주가 신하에게 부여한 병권이고, 군대를 움직이는 증빙이다. 그리하여 "병부(兵符)"라고도 부른다. 호부는 절반씩 나우어서 왼쪽은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주고, 오른 쪽은 군주가 가지고 있는데, 둘이 합해서 딱 들어맞으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 호부는 군대지휘권의 표지이고, 모두 진나라 왕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

 

진나라 군대의 상징이며, 병마용의 최고총사령관은 오직 한 사람 뿐이다. 바로 진시황이다. 강대한 진나라군대는 오직 한 사람의 명령만을 들었다. 이것은 진나라의 행운이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6대의 왕들이 노력을 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이것은 또한 진나라의 불행이다. 기원전210년, 진시황이 순행길에서 사망하자, 사후 3년도 지나지 않아, 이 위대한 군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500년간 휘황했던 전투의지가 순식간에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의 사람으로서는 정말 믿기 힘들다.

 

중국역사상 진나라문화는 유일무이하다. 진나라는공리와 실용을 중시했고, 개척정신과 진취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질서와 규율을 중시했고, 무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문화전통은 진나라가 발전하기 전부터 그들의 성장을 예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멸망의 복선도 되었다. 진시황은 이 군대를 최고조로 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제왕의 시대를 초월한 야심은 제국의 국력을 낭비하였고, 생존이 문제가 되었을 때, 국가를 위하여 바치는 상무정신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다시한번 2000여년전의 이 군인들을 응시해본다. 그들은 일찌기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중국의 역사를 만들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쓰는 문자는 진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의 광대한 영토도 진제국의 연속이다. 중국의 통일된 중화민족도 진나라제국때 형성된 것이다. 2000년전의 그 대제국은 지금도 중국인의 혈맥속에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