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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등소평은 왜 두번이나 개명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8. 3. 31.

글: 하회굉(何懷宏)

 

이름을 짓는 일이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모두 중대한 일이다. 특히 중국처럼 가족과 이름을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의 시기에 사람들이 어떤 이름을 가장 많이 사용했는지는 왕왕 당해시기 사람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시기 특히 초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혹은 자신의 이름을 고칠 때), "위동(衛東, 모택동을 보위한다는 의미)", "홍위(紅衛)", "영혁(永革, 모택동의 영구혁명론에서)", "향동(向東, 모택동을 향한다는 취지)" 내지는 "향표(向彪, 임표를 향한다는 취지)", "위청(衛靑, 강청을 보위한다는 취지)"등이 있었다. 1980년대가 되어서는 다시 일부 연해지역도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서방적인 느낌을 주는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약한(約翰, John)", "마리(瑪麗, Mary)"같은 것이 그것이다.

 

흥미있는 일은 20세기말의 가장 중요한 전환을 이끈 인물인 등소평의 신세와 두번에 걸쳐 개명한 일은 이 시기의 주요한 변천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등소평은 1904년에 태어났다. 그때는 아직 청나라였던 시절이고, 과거도 아직 폐지되지 않았을 때였다. 등소평의 선조는 명나라때 진사를 배출했고, 청나라때는 한림을 배출했다. 부친은 향장(鄕長), 단련국장(團練局長)을 지냈으니, 지방엘리트인 셈이었다. 그의 모친도 명문가였다. 제1대 공산당의 지도자급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이처럼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비교적 명망이 있는 가정에서 나왔다(모택동, 유소기, 주은래등이 모두 그러하다. 진정한 노동자출신으로 당내요직을 맡은 바 있는 인물은 향충발, 고순장등인데, 이들은 오히려 쉽게 변절했다). 등소평이 태어나면서 얻은 이름은 "등선성(鄧先聖)"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성인의 이전(before the saints)" 혹은 "먼저 노력하여 성인이 되도록 한다(hoping to become a saint first)"는 의미이다. 나중에 사숙(私塾, 서당)의 선생이 이름이 성인에게 불경할 수 있고, 참월(僭越)의 의미가 있다고 하여, 이름을 "등희현(鄧希賢)"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현인을 본받거나 현인이 되기를 희망한다(hoping to be a sage)"라는 것이고, 이것은 고대 유생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이상이었다. 송나라때 유학자인 주돈이는 <<통서>> 제10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성인은 하늘을 본받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으며, 선비는 현인을 본받는다" 그는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큰 뜻을 품도록 격려했다. 큰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현은 되지 못하더라도, 명망있는 선비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등소평의 첫번째 개명이다.

 

등소평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15세때에 중경의 "프랑스유학근공검학예비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는 과거는 일찌감치 폐지되었고, 황제제도도 무너졌다. 그는 새로운 학교에 들어갔고, 다음 해에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儉學,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떠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5년여를 머물고, 그 곳에서 혁명에 참가하며, 소련으로 간다. 1926년에 귀국하고, 1927년 7월 무한에서 중앙비서를 맡는다. 이때 장개석, 왕정위가 선후로 청공(淸共, 공산당숙청)을 진행하여 공산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바로 이때 "등희현"은 "등소평(鄧小平)"으로 개명한다. 개명한 직접적인 원인은 당연히 지하공작에 따른 원래의 신분을 은폐할 필요때문이었다. "소평"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이 이름은 당시에 상당히 유행하였고, 보편적이었으며, 평민화한 이름이어서, 주의를 끌만한 이름이 아니었다(지금도 이 이름은 중국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선택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은 이름이다. 필자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같은 학년에 3명의 서로 다른 성을 가진 '소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으로, 이름을 지을 때는 가치관이 반영된다. 중국인들이 사람을 "소(小)"라고 칭할 때에는 친근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평(平)"은 "평안", "화평"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측면에서 본 것이고, 국가측면으로 보자면, 선조들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항상 말해왔다. "평천하"의 최고이상이 "대동(大同)사회"라면 그저 "소평"이라는 다음 급의 "소강(小康)사회"가 된다. 사실상 이것은 바로 나중에 등소평이 혼란과 방황을 마치고, 등소평이후의 중국을 비교적 안정된 발전의 시기로 끌고가는 이념이 된다. 중국인에게 단기간내에 도달할 수 있는 소강생활수준의 목표를 제기하였다. 중국은 확실히 기본적으로 이 모ㄱ표를 확실히 달성하였다. 비록 많은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중국은 현재 이미 질풍노도의 과도시기를 지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듯하다. "등소평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이 시대전환에서 핵심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비교적 장기간 평화, 안정의 사회형태를 누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사회형태에서 우리는 수천년이래로 통일되고, 지배적인 "선(善)"이 분해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의 가치추구가 다원회된다; 단독의 '지선(至善)'은 은퇴하고 가치와 자원이 분류(分流)한다; 국가정치는 사적생황영역에 더 많이 양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사람의 생활방식과 취미도 다양화의 경향을 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과 "정당"이 분리되고, "선"과 "인격"이 분리되는 것을 보게 된다; 도덕은 더욱 더 행위의 규범에 집중되는 것을 보게 되고, 가치추구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규범에 대하여만 컨센서스를 이루게 된다; 이런 사회정의와 행위정당에 관련된 컨센서스는 더 이상 일종의 의식형태로서 독단적인 기초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각종의 합리적인 가치체계와 정신신앙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세계의 연결을 더욱 밀접해지고, 중국은 글로벌 현대화과정에 어쩔 수 없기 말려들게되고, 심지어 열심히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발전시기로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로 인하여 더욱 더 '현대성'의 번뇌와 부담을 받게 된다. 사람이 추구하는 '선'이 갈수록 더 많이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로 향하지는 않는가? 계속 증가하는 물질욕구는 절제없이 팽창하지는 않는가. 심지어 물욕은 많은 사람들이 원함에 따라 최고의 지배적인 '선'으로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추세가 확장되어 전체 지구와 인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우리는 21세기의 중국에 대하여 어떤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중국인이 새로운 세기에 어떻게 '선'을 이해하고, 그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이상을 가지고, 어떤 생황방식을 가질까? 중국은 다음 세기에 근 백여년간 추구한 부강한 국가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중국은 어떻게 수천년동안 이어내려온 문화전통과 백년간 이어내려온 혁명전통을 처리하고 대처할 것인가? 중국은 경제발전에 노력할 뿐아니라, 사회의 전면적인 개혁에도 노력하고 정신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세계에 공헌할 수 있을까? 이러한 아직은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혹시 부지불식간에 해버리기만 하지 말로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지는 않을까? 학자들은 대체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면서 세계를 분명하게 이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