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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모택동과 등소평: 등소평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며

by 중은우시 2007. 2. 16.

글: 왕울(王蔚)

 

내가 기억하기로 여러해 전에(아마도 지금도 있을 지도 모른다. 최근 2년동안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104번국도옆에 있는 산동시멘트공장의 양측에 두 줄의 거대한 표어판을 세웠다. 한줄은 "번신물망모택동(飜身不忘毛澤東, 번신에는 모택동을 잊을 수 없다. 번신은 몸을 뒤집다는 말로 신분이 바뀐 것을 말한다)" 다른 한줄은 "치부불망등소평(致富不忘鄧小平, 치부에는 등소평을 잊을 수 없다. 치부는 돈을 번 것을 말한다)"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표어의 발명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표어는 많은 내용을 말해준다. 첫째, 이 두 위인에 대하여 사람들이 감격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람들은 모택동에 대하여 감사할 뿐아니라, 등소평에 대하여도 감사한다는 것이다. 둘째, 모택동과 등소평에 대하여사람들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인민들의 번신(정치적 해방)을 시켰다면, 등소평은 인민들의 치부(경제적 해방)를 시켜준 것이다. 셋째,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계승관계가 있다. 등소평은 모택동을 계승한 것이다. 만일 모택동이 인민들의 해방을 이끌었다는 전제가 없다면, 당연히 등소평이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강산대유재인출, 각령풍소수십년(江山代有才人出, 各領風騷數十年, 천하는 대를 이어 인재를 배출했고, 각자 수십년씩 세상을 이끌었다)" 모택동과 등소평. 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의 지도자이다. 그들이 각각 처한 시대에 각각 역사의 절창을 불렀다.

 

1. 모택동과 등소평의 성격비교: 모택동의 호방(豪放), 등소평의 침온(穩)

 

모택동은 구세계를 부숴버리고자 했다. 청년시기부터, 모택동은 구국구민의 위대한 이상을 품고 이를 위하여 분투했다. 그의 기백과 위대한 장지, 그의 뛰어난 정치재능과 군사적인 천부 그리고 그의 재주(문장, 서예, 시가, 강연)는 그가 살던 시기에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의 '분토당년만호후", 그의 "지점강상, 격양문자", 그의 "이금매보종두월", 그의 "가상구천람월, 가하오양착별(하늘로 올라가 달을 잡고, 바다로 들어가 자라를 잡고)", 그의 "바여재위삼절, 일정증미, 일절유우, 일정환동국(너-곤륜산-을 세 개로 잘라서 하나는 미국에 주고, 하나는 유럽에 남기고, 하나는 동쪽나라에 돌려주고..)"의 호방한 시가들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투쟁철학을 신봉했다. "하늘과 싸우는 것은 그 재미가 무궁무진하고, 땅과 싸우는 것도 그 재미가 무궁무진하고, 사람과 싸우는 것도 그 재미가 무궁무진하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일본인(30-40년대 항일전쟁), 미국인(50년대 6.25), 인도인(60년대 중인전쟁), 소련인(1969년 진보도사건)과 싸웠다. 국내에서도 국민당과 싸우고, 장개석과 싸웠다. 당내의 투쟁은 더욱 많았다. 모택동이 사망할 때 <<전당, 전군, 전국각민족인민에게 고하는 글>>에서 그는 일생동안 10번의 노선투쟁을 이끌었다고 했다(물론 전부 다 승리했다). 그리고 만년에는 "등소평을 비판하고, 우경풍조를 반격하는 위대한 운동"을 일으켰다. 투쟁은 모택동의 일생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택동의 일생은 파란만장, 뇌정만균(雷霆萬鈞, 뇌성벽력이 내려치듯), 천마행공(天馬行空, 날개달린 말이 하늘을 날 듯), 무구무속(無拘無束,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는 것)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어떻게 하라고 할 수 없엇고, 아무도 그를 어떻게 하지도 못했다.

 

모택동과 비교하자면, 등소평은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비록 어렸을 때부터 원대한 이상을 수립하였지만, 그는 착실하고 평범하였다. 무슨 시사가부에 재능이 있지도 않았고, 호언장담을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유럽에 유학한 기간동안 노동자로 일했고,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며, 유럽에서 돌아온 후 백색기의(百色起義)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여러번 중공중앙의 비서장(최소한 3번, 87회의때 그는 바로 중앙비서장이었다)을 맡았다. 그는 성격이 침온하고, 일에는 과단성이 있으며, 말을 많이하지 않았다. 그는 일찌감치 자기의 착실한 풍격을 수립했다. 당내에 공인된 무실파(務實派)이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반격을 할 때도 그도 머리가 맑았고, 최대한 지나치게 하지 않으려 했으며 여지를 남겼다. 화국봉에 대하여, 호요방에 대하여, 조자양에 대하여, 이런 의견이 달랐던 사람들에게도 그는 바로 때려죽이지 않았다. 그는 일반백성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세계에서 가장 소박한 진리들을 말했다. 무슨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잡으면 좋은 고양이이다", 무슨 "돌을 만지면서 강을 건넌다", 무슨 "발전은 불변의 법칙이다", 그의 <<등소평문집>>은 겨우 3권(모택동의 5권보다 적다)이다. 대부분은 담화집이다. 그는 전고(典故)를 인용하지도 않았고, 이쪽저쪽에서 마구잡이로 끌어오지도 않았고, 완전히 보통쓰는 말로 했다. 그는 평민생활을 즐겼고, 가정생활을 좋아했다. 만년에 자손이 집안에 가득했고, 그 즐거움을 누렸다.

 

2. 모택동과 등소평의 흥취비교: 모택동의 정치중시, 등소평의 경제중시

 

성격이 다름에 따라, 사람의 사물에 대한 흥취도 달랐다. 모택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의 주요한 흥취는 정치에 있었따. 계급투쟁이 근간이다. 정치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그가 읽은 책, 그가 한 일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와 경제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그는 정치를 우선시했고, 경제는 뒷전이었다. 경제는 정치를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고 하였고, 경제는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혁명을 쥐고나서 생산을 촉진한다(왕왕 혁명만 쥐고 생산을 촉진하지 않았었다). "8차전당대회"때 비록 이성으로는 그도 업무의 중심을 경제건설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도는 전당에 말하기를 모순이 전환되었다, 이후에는 생산력의 발전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흥취상으로는 그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가 있었다. 그래서 1959년, 그는 주의력을 반우경으로 몰아갔다. 64년이 되어, 인민들이 막 '3년곤란시기'를 벗어나려고 할 때, 그는 다시 '사청(四淸)운동(주로 계급투쟁)'을 벌였다. 1966년, 다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의 저작을 보자, 정치를 얘기한 것이 많다. 군사를 얘기한 것이 많다. 경제를 얘기한 것은 적다. <<10대관계를 논한다>>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경제문제를 언급한 것이 없다.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로, 그는 왕왕 정치적인 수단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운동을 좋아했고, 군중운동을 좋아했다. 그는 운동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슨 대약진운동, 무슨 대채학습운동, 무슨 대경학습운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슬픈 것은 정치운동수단을 통하여 추진한 일체의 경제활동은 모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택동과 비교하자면, 등소평의 경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었다. 건국이후 얼마되지 않아, 등소평은 중앙정부에 와서 일했고,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다. 일정기간 그는 재정부장도 맡았다. 1962년에서 1966년까지, 유소기와 등소평이 당과 국가의 일상업무를 주재할 때, 등소평은 주요한 정력을 경제문제에 쏟았다. 그리고 농촌에서 "삼자일포, 사대자유"의 경제정책을 내놓았다. 1973년, 등소평이 다시 일에 복귀하였을 때, 업무흥취는 역시 경제문제였다. 바로 이런 경제를 중시하는 정서로 인하여 그는 두번째 타도를 당하게 된다. 당시 어떤 사람은 그를 단순한 경제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77년, 특히 1978년이후, 그는 주의력을 역시 경제로 돌렸다. 그리고 기치를 선명하게 들어 경제문제로 중점을 맞추도록 하였다. 등소평의 흥취는 경제에 있었고, 일체의 활동은 경제건설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경제건설ㅇ르 중심으로 하고, 발전이 불변의 진리라고 강조하였다. 등소평은 '경제건설이라는 이 중심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하나의 중심, 두개의 견지"의 기본노선은 그의 일생을 관통했다. 89년의 풍파이후, 당내외에는 일부 의문이 나타났다. 경제건설이란 이 중심에 대한 강조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하에서 등소평은 명확하게 지시했다. 당의 기본노선은 동요될 수 없고,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 지금 되돌아보면, 등소평의 당시 견해는 정확했다. 바로 등소평이 경제에 대하여 강렬하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중국인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아니라, 중국이 부유부강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등소평이 경제업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등소평이 중국은 반드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시장경제의 길로 가야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등소평경제사상의 가장 집중된 표현이었다. 이것은 등소평이 중국인민에게 남겨준 가장 고귀한 재산이다.

 

3. 모택동과 등소평의 인식비교: 모택동의 "파(破)", 등소평의 "입(立)"

 

성격이 다르고, 흥취가 다르기 때문에, 모택동과 등소평의 의식도 서로 달랐다. 청년시대부터, 모택동은 제도, 전통, 질서, 조류에 대한 본능적인 반항이 있었다. 만년이 되어, 이런 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이런 의식의 표현은 당의 생활, 국가의 정치생활이 부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당장의 규정에 의하면 당의 전국대표대회는 5년에 1번씩 개최하도록 되어 있고, 인민대표대회는 5년에 한번씩 새로 뽑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주재하던 시기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비정상적이었다. 7차전당대회와 8차전당대회간에는 11년의 간격이 있었고, 8차전당대회와 9차전당대회와의 사이에는 13년의 간격이 있었다(1956-1969). 3기인대와 4기인대는 10년의 간격이 있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은 기본적으로 인치사회였다. 중국은 법률측면에서의 건설은 완전히 공백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많은 영역과 많은 분야에 법률이 없었다.

 

등소평이 정치를 주재한 이후, 먼저 제도부터 손을 댔고, 당과 국가의 정치생활을 규범화하였다. 등소평은 당과 국가의 명운을 한두명의 지도자에게 의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제도건설에 착수했다. 등소평의 첫번째 공헌은 당과 국가의 정치생활을 정상화시킨 것이다. 두번째 공헌은 사회각분야의 법치건설을 추진하여, 중국을 법제건설의 궤도에 올려놓은 점이다. "의거할 법이 반드시 있고, 법의 집행은 반드시 엄격하며, 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하고, 사법은 공정해야 한다" 비록 완전이 이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사회경제생활의 주류적인 방향으로 자리잡게 하였따. 비교적 규범화된 당내와 국가의 정치제도를 건립하여, 지도자들간의 승계와 자리바꿈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

 

4. 결론: 등소평은 모택동의 가장 좋은 가장 맞는 후계자였다.

 

모택동은 등소평에 대하여 계속 좋게 평가했다. 모택동의 등소평에 대한 평가는 "얻기 힘든 인재"라는 것이었다. 초기부터, 모택동은 등소평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등소평의 충성을 알았다. 등소평은 일생에서 세번 낙마하고 세번 일어섰다. 첫번째의 낙마는 서금시기였다. 그 때 등소평은 모택동을 지지하다가 타도되었다. 이것은 모택동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택동이 정치를 장악하자, 모택동은 계속 등소평을 중용했다. 회해전투, 도강전투에 모두 등소평은 전적위원회서기(제1인자)였다. 건국후 얼마되지 않아, 모택동은 등소평을 중앙정부로 불러 일을 시키자고 건의했고, 부총리를 맡겼다. "8차전당대회"때,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중공중앙총서기를 맡기자고 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회의상에서 "내가 총사령관이고, 등소평이 부사령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등소평을 후계자로 기르겠다는 뜻이었다. 중소관계가 아직 괜찮을 때, 한번은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했다. 후르시쵸프가 누가 모택동의 후계자냐고 물었을 때, 모택동은 먼 곳에 앉은 등소평을 가리키며, "저 키작은 사람이 보이냐. 바로 그다"고 답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모택동의 등소평에 대한 처리는 시종일관 온화했다는 점이고,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매번 등소평이 타도될 때마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당적을 유지시켜주었다. 이것은 팽덕회에 대하여나, 유소기에 대하여나, 임표에 대한 것과 달랐다. 모택동의 내심 깊은 곳에는 그가 등소평을 아꼈고, 그가 후계자가 되도록 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택동이 임표를 선택하고, 왕홍문을 선택한 것은 지금 보기에 미봉책이었고, 그저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왜 화국봉을 선택했는지에 대하여는 지금도 모르겠다.

 

중국의 행운은 과도기를 거친 후 등소평이 중국의 실제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보면, 어느 지도자도 등소평처럼 충실하게 모택동의 유산을 계승할 수 없었고, 중국을 잘 변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만이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국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었다. <<건국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정>>에서 등소평은 객관적이고 실사구시적으로 모택동의 위대한 일생을 종합했다. 그리고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이것은 정치적인 식견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등소평이 그 결정을 내리도록 제안했을 때, 그는 조그만큼의 사심도 없었다. 바로 이런 큰 풍모로 등소평은 개인의 은원을 벗어날 수 있었고, 모택동의 위업을 계승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록 등소평은 성격, 흥취 및 기풍의 측면에서 모택동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이것은 등소평이 모택동의 가장 좋은 학생, 가장 좋은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중국은 아주 행복하다. 왜냐하면 모택동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아주 행복하다. 왜냐하면 등소평이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