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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삼국시대에 위(魏)에 대항한 주력은 오(吳)인가, 촉(蜀)인가.

by 중은우시 2007. 1. 5.

1. 누가 위나라에 대항한 주력인가?

 

삼국시대에 위나라가 강하고, 오, 촉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래서 삼국정립의 전제는 오촉이 연합하여 위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촉 양국중 누가 더 많이 위나라에 대항하는데 공헌하였는가? 아래에는 그 사실을 보여준다.

 

제1단계: 208-219

 

208년: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주력군이고 유비는 그저 보조역할이었다.

209년: 손권은 합비를 포위하고, 주유는 전해부터 조인과 강릉(江陵)을 두고 다투었고 결국 함락시켰다.

210년: 주유가 죽고 노숙이 이어받는다. 손권에게 강릉을 유비에 빌려주도록 권유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비는 사천에 들어갈 통로가 없다는 이유로. 이 해에는 쌍방모두 위나라와 전투를 하지 않았다.

211년: 조주는 주의를 서북지역으로 돌렸고, 유비는 사천에 들어가느라 바빴다.

212년: 조조는 서북전투를 기본적으로 끝냄. 병사를 강동으로 진공시킴. 손권이 조조의 주의를 끌지 않았으면, 유비가 사천에 들어가는 것이 순조로울 수 없었다.

213년: 조조는 유수구로 병사를 압박함. 손권은 7만으로 이를 방어함. 유비가 사천을 장악하는 관건적인 시기였음.

214년: 손권은 친히 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킴. 이 해는 오나라가 독립하여 위나라에 대항함.

215년: 손권이 10만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함. 장료에게 패배. 손권의 북벌로 유비는 위나라의 간여없이 사천서부를 장악할 수 있었음.

216년: 조조가 손권을 물리침. 이 해도 손권이 단독으로 조조와 싸움.

217년: 2월, 조조가 손권을 공격함. 3월, 후퇴함. 유비는 한중을 공격함.

218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 조조가 친히 원군을 끌고 옴. 이 해는 조조에 대하여 유비가 주력으로 싸움.

219년: 유비가 한중을 얻음. 위나라의 주력부대를 손권이 견제해주었음. 이후 관우가 위나라를 물리쳤으나, 후에 손권에 의하여 붙잡혀 죽음. 유비는 형주를 잃음.

 

==> 12년중, 오나라가 위주인 해가 8년, 촉이 위주인 해가 2년이고, 쌍방이 함께 맡은 해가 2년임.

 

제2단계: 220년-226년

 

220년-222년: 손류연맹의 파열기. 유비의 오나라 정벌은 참패로 끝남. 위나라의 조비는 대거 오나라로 진군

223년: 유비 사망. 오촉양국은 다시 연맹을 맺음.

224년: 조비가 대거 오나라를 공격. 오나라는 단독으로 위나라에 대항함.

225년: 조비는 다시 오나라를 공격. 촉은 남정에 착수.

226년: 위의 황제가 바뀜. 손권이 위를 공격. 사마의등에 의하여 패퇴.

 

==> 손류연맹이 파기된 3년을 빼면, 기본적으로 오나라 혼자 4년간 위나라에 대항함.

 

제3단계: 227-234년

 

227년: 전쟁이 없음. 위나라는 동, 중, 서의 세개의 전선으로 나눔. 동쪽은 대사마 조휴, 중간은 사마의로 모두 오나라와 대치함. 서쪽은 하후무가 촉과 대치함.

228년: 제갈량의 제1차북벌이 실패로 끝남. 동부전선의 육손은 조휴를 대파함.

229년: 제갈량이 무도, 양평 2군을 공격함.

230년: 조진이 촉을 공격함. 손권은 위를 공격하여 합비성에 이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귀환.

231년: 제갈량의 제4차북벌. 손권은 중랑장 손포를 허위투항시켜 양주자사 왕릉을 유인하여 부릉에서 복병으로 섬멸함.

232년: 육손이 여강에서 만총에 격퇴당함.

233년: 서부전선은 전투없음. 동부전선에서는 손권의 북벌이 만총에게 격퇴당함.

234년: 오촉의 4로대군이 연합하여 위를 공격함. 손권, 육손, 손소, 제갈량으로 오나라의 3개부대, 촉의 1개부대임. 오나라군대가 다수를 점함. 제갈량과 대적한 것은 사마의, 손권을 대적한 것은 조예. 동부전선에 만총등 명정들이 있어 오나라군대에 대응하는데 주력했음. 제갈량이 규모최대의 북벌을 펼쳤으나, 오나라의 북벌에 비하면 손색이 있음.

 

==> 227-234년의 8년간, 오나라가 위주인 해가 4년, 촉이 위주인 해가 2년, 쌍방이 공동대항한 해가 2년임.

 

제4단계: 235-246년

 

235-240: 기본적으로 전쟁은 없었음. 위의 3개 부대중 2개부대를 오나라가 막고 있어, 오나라의 압력이 컸음.

241: 오나라의 전종이 회남을 공격, 제갈각은 육안을 공격, 제갈근은 조중을 공격. 오나라와 위나라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임.

242: 전쟁이 없음

243: 오나라 제갈각이 육안을 공격함.

244: 조상이 촉을 공격하나 실패

245: 전쟁없음

246: 오나라 차기장군 주연이 조중을 공격

 

==> 235-246의 12년간, 오나라 위주가 11년, 촉이 위주가 1년

 

제5단계: 247-262

 

247: 옹주 양주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촉한에 귀순.

248: 전쟁없음

249: 강유의 북벌. 곽준에 패퇴

250: 위가 오를 공격

251: 왕기, 주태가 오나라를 공격하여 격파함.

252: 위와 오의 전투

253: 오의 제갈각이 20만대군으로 위를 공격, 위도 20만을 모아 대응. 강유는 위오가 싸우는 것을 보고 위나라를 소규모로 공격하였으나, 위는 오와의 전투에 주력.

254: 강유가 농서를 공격

255: 관구검의 반람. 오나라가 병사를 보내어 맞이함. 강유는 옹주자사 왕경을 격파.

256: 강유와 등애가 단곡에서 전투. 촉군대패

257: 제갈탄의 반란. 동오와 연락하고, 오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맞이함. 사마소가 26만대군을 출동시킴. 삼국시기 최대규모의 전투.

258: 회남지전이 끝남. 위나라의 전승으로 막을 내림.

259-261: 전투없음.

262: 강유는 다시 등애에 패퇴

 

==> 247-262의 16년간, 오나라가 위주인 경우가 10년, 촉이 위주인 경우가 5년, 쌍방이 모두 공동으로 대적한 경우가 1년.

 

208년(적벽대전)에서 262년(촉의 멸망1년전)까지 55년동안 220-222년까지 손류동맹이 파기된 경우를 제외하고 실제로 52년간 동맹을 유지했었다. 이 중 오나라가 주력인 경우가 37년, 촉이 주력인 경우가 10년, 쌍방이 공동으로 대적한 경우가 5년이었다.

 

기간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촉군의 북벌시 최대규모는 제갈량의 제5차북벌로 10만대군이었다. 오나라의 북벌시에는 10만대군인 경우는 여러차례 있었다. 215년의 손권의 합비공격, 234년의 손권의 합비공격시 모두 10만이고, 제갈각은 20만을 이끌고 위나라를 친 경우도 있었다. 삼국시대의 후기에 들면서, 동부전선의 전쟁규모는 서부전선과 비교할 수 없었다. 회남삼반은 삼국시기 최대의 전투이다. 위나라에 대한 타격으로 보더라도, 관우의 수엄칠군은 주유의 화소적벽의 피해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육손이 협석에서 조휴의 군대를 대파한 것은 제갈량이 평생동안 싸워도 이루지 못한 전적이었다. 위나라에서 중시한 정도로 보더라도 3개의 전선중 2개전선이 오나라와의 대치이고, 항상 동서 양측에 전투가 동시에 발발하더라도 먼저 동부의 오나라와 먼저 대적했었다. 234년의 경우 동공서수(동쪽은 공격하고 서쪽은 지키는)의 전술을 써서 조예는 친히 손권에 대적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간적으로 봐도 오나라가 촉보다 많았고

규모상으로 봐도, 오나라가 촉보다 컸고,

전과의 면에서도, 오나라가 더욱 뛰어났다.

전체적으로 오나라의 공헌은 촉나라의 공헌보다 훨씬 컸다.

 

2. 왜 많은 사람들은 촉나라가 위나라에 대적한 주력이라고 오해하는가?

 

첫째, 삼국연의의 영향: 삼국연의는 촉을 정통으로 서술하고, 위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래서 오는 제3자로 밀려났다.

둘째, 219년에 있은 관우의 수엄칠군이 있었고, 이어서 오나라가 관우를 공격하여 죽이고 형주를 빼앗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해에는 확실히 위나라에 대항한 주력은 촉이었다. 이 해의 인상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뿐이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조조와 유비의 대립구도를 강화시켰다.

넷째, 유비는 한나라의 종친이고, 한실중흥을 내걸었다. 그래서 유비가 건립한 촉국이 위나라에 대항하는 주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3. 촉이 위나라와 수십년간 대치하면서, 오촉연맹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삼국중에서 위나라는 강했고, 오나라와 촉은 모두 약했다. 삼국정립의 전제는 오촉이 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삼국연의에서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오촉 양국간에는 비록 연맹이 파기된 적도 있었지만, 주류는 역시 협력이었다. 연맹은 양국에 모두 좋은 점이 있었다. 인구, 군대, 지역, 인재등의 여러 측면에서 오나라는 촉보다 훨씬 강했다. 이것은 결국 오나라가 위나라에 대항하는 주력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져다 주었다. 위나라의 방침도 동공서수였다. 대부분의 군대는 오나라쪽을 향했다. 그래서 위촉대치현상을 파악할 때도 항상 이 점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즉, 위나라는 촉보다 훨씬 강했지만, 위나라의 군대주력은 항상 오나라를 대응해야 하였으므로 촉과의 전선에 투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부전선에는 항상 가장 정예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었다. 오촉연맹의 이 구도를 무시하고, 제갈량과 강유의 전과를 부풀리고 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제갈량과 강유가 강대한 위에 맞서서 수십년을 버텨왔다고 보는 것은 실제에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