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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괴인 양수명(梁漱溟)의 기괴한 도처시(悼妻詩)

by 중은우시 2008. 2. 16.

글: 요소원(姚小遠)

 

국학대가인 양수명의 첫번째 부인인 황정현(黃靖賢)이 죽은 후에, 상당히 기괴한 시를 써서 죽은 처를 기념했다. 시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나는 그녀와 결혼한지 10여년이 되었는데,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녀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바로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죽었다. 죽어도 좋다.

이런 나라

이런 사회에 살면서

그녀가 죽어서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할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다.

 

보기에 너무나 담당하고, 통상적인 정리에 맞지 아니하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것은, 특수한 사람이 하나의 황당한 시대에 괴기한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약간의 초기현대주의의 불가사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양수명은 아주 괴물이었다. 6살때부터 책을 읽을 때, 바지를 입지 않았다. 일찌기 불교를 믿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부친자살로 인하여 자극을 받아 효도를 한다는 차원에서 친구의 처제인 황정현과 결혼했다. 비록 결혼전에 혼인상대방에 대하여 그저 "관후(寬厚), 초속(超俗), 백력(魄力)"의 세가지 조건만을 내걸었지만, 결혼후 양수명을 그녀를 "입고 신는 것, 꾸미는게 모두 이상하고, 풍모는 남자같았으며, 언니인 오부인과 같이 있으면 얼굴색은 언니보다 더 늙어보이고, 모든 여자가 남자들의 마음을 끄는 점이 약간이라도 있게 마련인데, 그녀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황정현도 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 점은 위의 시에서도 단초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효도를 다하는 측면에서 황정현은 양수명에게 할만큼 했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요절하였지만, 두 아들이 있어, 양수명에게 '무후(無後)'의 불효자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연히 자식을 낳는 것 말고도, 황정현은 양수명의 생활을 돌보아주고, 그의 관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양수명은 황정현을 회고할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결혼후 14년간, 나로 하여금 인생을 이해하게 하고, 인생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근검함과 아주 소박한 생활로 나는 사회에서 하고싶은대로 하고, 돈을 벌거나 집안을 돌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오로지 나의 사회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나는 (황)정현을 얻은 후루,두 아들을 낳았고, 소위 인륜실가(人倫室家)의 즐거움과 가인부자(家人父子)의 친근함에 대하여 그 맛을 알게 되었다"

 

"현재 (황)정현이 죽으니, 집안은 무너진 것같고,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을 다 잃은 것같다. 오호, 내가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글로 미루어 볼 때, 비록 황정현, 양수명에게는 애정(愛情)보다는 친정(親情)이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애정이라는 것은 아무리 뜨거워도 재가 되어 날아가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친정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의뢰(依賴)와 의련(依戀)은 철석심장을 가진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옛날식 혼인에 대하여 만감이 교차하게 하는 것이다. 양수명의 기괴한 도처시는 바로 이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담담하고 황당하고 심지어 인간미가 없는 싯구와 냉혹한 언어에서,  암중으로 숨어있는 절망과 깊은 정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한 말로 장식된 사랑의 싯구들이 오히려 빛을 잃는 듯하다. 국학대가의 감회는 과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