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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성사위(成思危) : 전인대부위원장

by 중은우시 2007. 5. 20.

글: 오소리(吳小莉)

 

성사위, 중국에서 아주 유명한 이름이다. 그가 이름난 것은 그의 관직이 높아서 국가지도자의 반열에 들었을 뿐아니라, 그의 이름과 그의 일생은 중국의 한 시대를 비춰주고 있다.

 

성사위를 얘기하자면, 그의 부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유명한 신문인인 성사아(成舍我)이다. 성사아는 중국신문업계의 걸출한 개척자이다. 일본군이 북경에 침입했을 때, 그는 가족을 데리고 홍콩으로 옮겼다. 성사위는 이때문에 홍콩에서 2년간 중학을 다녔다. 그런데, 홍콩은 그와 가족이 헤어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1951년 10월, 막 16세가 된 성사위는 부친을 속이고, 모친을 기망하면서 홀로 내륙으로 되돌아가서 당시의 광주로 가서 동부이모의 누나에게 의탁했다. 다음 해,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갔다. 이로써 가족들은 천리를 떨어져서 20년간 서로 왕래하지 못했가. 그가 아주 사랑하는 모친은 돌아가실 때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데, 성사위는 이것도 나중에 여동생으로부터 듣게 된다.

 

성사위를 인터뷰하기 전에 그의 참모는 평소에 매체에서 그의 모친을 언급한 것이 적으니, 그의 모친에 대하여 좀 많이 얘기해도 될 것같다고 얘기해주고, 여기에 그의 부친과 그들이 서로 이념이 달랐던 것에 대해서 얘기해도 될 거라고 얘기했다. 우리는 원래 그가 말을 많이 해주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모친인 소종양(蕭宗讓)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아주 흥겹게 모친을 소개했다. 그러나, 두 세마디를 한 후에 다시 부친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부친과 모친은 소년인 성사위에게는 불가분의 것이었다. 부친의 "반공"과 그의 "친공"에 대하여 성사위는 아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우리 집안은 정치이념이 서로 달랐는데, 부친은 이 점에 대하여 아주 개명되었었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성사위의 일생은 여러 번 중요한 선택이 있었고, 매번 선택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골치아팠을 것같다. 인터뷰전의 편집회의때, 동료들이 가장 많이 물은 것은 "왜", "왜 홍콩을 떠났는가?" "왜 화공에서 경영으로 학과를 바꿨는가?" "왜 화공부 부부장의 직위를 내팽개치고, 유명무실한 중국민주건국회로 옮겨갔는가?"

 

부모를 10여년간 떠나서 홍콩에서 일하고 있는 본인으로서, 나에게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의 16세때의 선택이었다. 동료들은 여러가지로 물어봤다. "소년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계속 전복시켰다. 전통적인 신앙관도 전복시키고 기존의 사업관을 전복시켰다"

 

어렸을 때,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이상을 가진 후, 그는 다시는 모친을 만나지 못했다. 이는 노인과 자신에게 평생의 유감이 되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성사위는 나를 보면서 그가 젊었을 때의 일을 얘기했는데, 이미 세상사에 통달한 어른같았고, 조용하면서 약간 아쉬움을 가지고 후배에게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보다 어렸다. 그러한 시대에 우리 집안과 같이 분할되고 동란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투에서 마치 우리는 그의 부친의 "천하대임, 사아기수(天下大任, 舍我其誰, 천하의 큰 임무를 나를 버리면 또 누구인가라는 말로 "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임)"과 그 자신의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하게 살때에 위기를 생각한다는 말로 '사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임)의 시대였다. 그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필연이었다. 그리고 일단 선택하면 운명의 바퀴는 스스로 굴러간다.

 

성사위의 기억력은 놀랄 정도였다. 여러해전에 그와 한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나의 부모가 타이페이의 내호(內湖)에 산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번 인터뷰때 그가 돌연 물었다. "네가 내호에 산다고 말했었지?" 그래서 나는 아주 놀랐다. "아직도 기억하세요?" "나는 90년과 91년 타이페이에 가서 부친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부친과 친구들, 국민단의 옛날 국민대회대표들이 그 곳에 살고 있었지. 나도 가 본적이 있어."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 시대의 자녀들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기세와 흉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로 인하여,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었다. 기개가 대단했던 성사아는 대만으로 옮겨간 후, 당시의 장개석에 의하여 용납되지 못했고, 신문을 만들 수 없었다. 겨우 세계신문전문학교를 만들 수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해협저쪽에서 성사위가 과학보국의 큰 흐름하에서 제1지망이 아니었던 화학공학을 전공하였는데, 다행히 수학을 잘해서, 실적이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솔직히 말한다. 문화대혁명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 이로써 그는 경영업무를 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확실히 중국의 과학기술이 낙후되었다는 것을 느꼈고, 경영은 더욱 낙후되었다고 느꼈다. 그외에 만일 잘 경영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과학기술인재라도 제대로 작용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친의 자금지원하에, 성사위는 미국에 가서 당시 중국내지에서는 아직 거의 배우지 않던 MBA를 공부한다.

 

인터뷰때 성사위는 자기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경영학자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경제학자는 What과 Why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지만, 경영학자는 How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사위의 신분과 직위는 아주 많다. 그에게 세상사람들이 어떤 신분으로 기억해주면 좋겠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언젠가 그가 부친과 마찬가지로 명함에 그저 "성사위"라는 세 글자만 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다른 어떤 칭호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도량이다. 옛날에 내가 지금은 고인이된 대만해기회동사장 고진보의 손에서 '고진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새긴 명함을 받았을 때 바로 이런 도량을 느꼈다. 성사위는 권력을 장악한 장군이 되고자 한 적은 없다. 그는 어렸을 때는 문과를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지식분자출신의 재상이었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제갈량이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현재의 그는 어렸을 때의 꿈을 달성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사랑하는 국가를 위하여 계획과 정책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왜 그가 화공부 부부장의 직위를 버리고 민주당파에 가입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했으므로 그의 말은 직접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듣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듣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그가 말한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전부 받아들여지고, 어떤 것은 일부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그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를 악물고 계속 제기할 것이다.

 

이미 고희를 넘긴 성사위의 발걸음은 건강해 보였다. 길을 걸을 때면 홍콩에서 일하는 나보다 빨랐다. 그는 "이미 습관이 되었다. 남는 시간은 일을 더 해야지" 그의 모친은 프랑스에서 문학을 공부했었고, 예술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취향은 유전받지 못했고, 그저 태극권을 배워서 지금까지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이 건강한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사아의 아들로서, 사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득이었는지, 실이었는지" 내가 물었다. "득도 있었고, 실도 있었다. 실은 당연히 문혁대의 연루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득이 많았다"

 

"당신과 부친의 이름은 중국근현대사의 두 세대의 사람인데, 우리는 아주 호기심이 많다. 당신의 자녀들은 어떤 이름을 가졌는가?" 내가 묻자 그는 "성탁(成卓), 성붕(成朋)"이라고 말해주었다. 성사위는 많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두 세대가 짊어진 중국의 시대만으로도 충분했는 모양이다. 현대중국의 조류에서 탄생한 자녀는 현재 모두 성사위가 최근들어 중국내지에서 극력 지지하는 벤처캐피탈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일종의 부친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