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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공덕성(孔德成) : 공자의 77대 직계 후손

by 중은우시 2007. 8. 29.

글: 황경도(黃驚濤)

 

2천여년의 역사에서 공자의 적전(嫡傳) 후예중 산동성 곡부의 공부(孔府)를 떠난 사람은 단지 세 사람이다. 그중 가장 최근의 사람이 바로 공덕성(孔德成)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장개석이 1948-1949년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대량의 황금과 문화재 이외에 일부러 3명을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공덕성이다.

 

지금까지 문화재와 골동품은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국옥새"와 같이 중요한 사람중에 공덕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아직 이립(而立, 30세)도 되지 않은 청년은 바로 공자의 77대 적손(嫡孫)이며, 2천년이래의 공자의 신성한 혈맥을 전승해 온 사람이므로, "국지중보(國之重寶, 국가의 중요한 보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공덕성은 태어난지 100일이 되던 날, 당시의 대총통이던 서세창(徐世昌)은 영을 반포하여 "연성공(衍聖公)"에 봉했다. "연성"은 성인 공자의 덕을 연속(이어가는)하는 고귀한 혈통이라는 의미이며, 수천년을 이어온 유가의 문화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세에 태어난 공적성은 이미 마지막 연성공이 되었다. 여기에 서학동점으로 공자유학은 타도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속에서 곡부에서 자란 젊은이는 선조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부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역사상 그가 속해 있는 가족은 이미 충분한 영광을 누렸다.

 

한무제가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 제자백가의 술법을 다 몰아내고, 오로지 유가만을 받든다)"의 정책을 세운 이래로, 공자의 지위는 날로 높아갔다. 공자학술은 경전이 되어 역대왕조의 공식학문으로 자리잡는다. 공자는 몰락한 귀족의 자제에서 무면지왕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공자 개인은 계속 추존되고 시호가 더해져서,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에서 "문선왕(文宣王)", "대정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로까지 추존되었다. 선조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과 더불의 공자의 적전자손의 지위도 같이 올라갔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기원전195년에 노나라를 지나가면서, 공자에 제사를 지내면서, 공자의 9세손인 공등(孔騰)을 "봉사군(奉祀君)"에 봉하였고, 그로 하여금 공자제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나중에 한원제는 공자의 13세손인 공패(孔覇)에게 식읍(食邑)을 주고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공자후예가 작위를 세습받으며 제사를 지내게 된 제도의 시작이 된다.

 

수십년간, 공자의 적전후손은 "군(君)"에서 "후(侯)"로 승격되었다. 당현종때 이르러 공자의 35세손인 공지(孔之)를 "문선공(文宣公)"에 봉했다. 이 작위는 송인종 지화2년(1055년)까지 계속 되었다. 송인종 조정은 공자의 46대손 공종원(孔宗願)을 연성공에 봉한다. 나중에 잠깐 봉성공(奉聖公)으로 바꾸지만, 다시 숭녕3년(1104년)에 연성공으로 다시 고친다.

 

이로부터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이후 800년간 계속된다.

 

이 오래된 가족은 이렇게 하여 중국봉건왕조가 주기적으로 진동을 겪는 와중에서도 만세일계의 영광을 누려온 것이다.

 

1920년, 공덕성은 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공부에서 태어났다. 출생때, 부친인 공령이(孔令貽)는 이미 수개월전에 사망했었다. 공령이의 첩인 왕씨(王氏)가 출산할 때, 어떤 사람이 영아를 바꿔치기하거나 의외의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당시 북양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산방(産房)을 포위했었고, 곳곳에 보초를 세웠다. 그리고 장군 1명이 공부에 주둔하였으며, 성에서도 관리를 파견했다. 공부내에도 공씨 일족의 어른들이 모여들어 출산을 지켜봤다.

 

공덕성이 출생한 후, 공씨의 족장은 즉시 북양정부 대총통, 총리, 내부총장 및 산동성장에게 서신을 보냈고, 100일후에 작위를 승계했다. 이로부터 공씨집안 사람들은 장유배분을 불문하고 모두 "공야(公爺)"라고 그를 불렀고, 예를 표했다.

 

그 당시는 이미 민국시대였으나, 선통황제는 아직 자금성에 거주하고 있었다.1924년, 풍옥상은 선통제를 황궁에서 쫓아내고, 황제라는 허울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가 없는데, 연성공의 "공(公)"이 어찌 지속될 수 있겠는가? 가죽(황제)이 떨어져 나갔는데 터럭(공)이 어디에 붙어있을 것인가? 이렇게 하여 1928년 8월, 공덕성은 중앙정부에 "연성공"의 작위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이 때도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신해서 요청한 것이다.

 

일생동안 삼민주의의 신도라고 자처하던 장개석은 공자의 유가에 대한 보호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1935년 1월 18일, 남경정부는 결의를 하나 통과시킨다. 즉,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는 관직으로 변경시킨 것이다. 그리고, 특임관(特任官)의 지위를 부여했다. 7월, 진입부가 주재하고, 대계도가 감독하며, 장개석이 참관한 가운데, 공덕성의 취임선서를 하게 된다.

 

장개석은 공덕성을 계속 돌보아 주었다. 다음 해 12월 16일, 공덕성이 청나라때 장원급제하였던 손가내(孫家)의 손녀인 손기방(孫琪芳)과 결혼할 때, 원래 그는 친히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돌발한 서안사변으로 참석할 수는 없었다.

 

[공덕성의 결혼사진] 

 

이어서 1937년에 대일항전이 전면적으로 개시되고, 연말에 일본군이 산동남부로 진입하였다. 곡부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전에, 장개석은 국민당 제20사단 사단장인 손동선에게 명령하여, 부대를 동원해서 공덕성 부부를 공부에서 나와서 무한으로 갈 수 있도록 조치하게 했다. 공덕성은 무한에서 항일선언을 발표한다. 무한이 함락된 후에는 다시 중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중경의 가락산에 그를 위하여 따로 봉사관부를 마련해주고, 국민당 참정회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일항전승리후에 진행된 국공내전때에도 장개석은 공덕성을 잊지 않고 대만섬으로까지 데려간 것이다. 나중에 공덕성은 대만에서 "고시원장"의 직에 9년간 있었고, "총통부자정(總統府資政, 대통령고문)"을 맡기도 하였따.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만대학에서 강의하는데 보냈고,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5년, 그는 대수학자인 구성동과 함께 대만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지금, 공덕성의 장손인 공수장(孔垂長)은 이미 "견습봉사관"이 되었다. 2006년 공자의 제80대 적손인 공우인(孔佑仁)이 탄생하였다. 역사적인 관례에 따라, 공덕성은 이미 대만의 "내정부"에 등록하였다. 공자의 성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진당정부는 하나하나 중국적인 것을 제거하고 있는데, 공자후손도 이러한 비바람의 와중에 놓여 있다. 민진당정부는 손중산의 흔적을 없애고, 장개석의 흔적을 없앴는데, 공자의 흔적은 남겨둘 것인가? 이것도 민진당의 향후 정치동향을 파악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

 

[공자 77대손 공덕성과 공자 80대손 공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