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감진(鑒眞) : 일본으로 건너간 당나라 승려

중은우시 2007. 12. 19. 16:49

 

감진(鑒眞)의 속성은 순우(淳于)이며, 당나라 무측천 수공4년(688년)에 태어나서, 당대종 보응2년(763년)에 사망했다. 그는 양주 강음현(지금의 강소성 양주) 사람으로 14세때 양주의 대운사(大雲寺)에 들어가 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치든 고승 지만선사(智滿禪師)의 제자가 된다. 스승의 지도하에, 감진의 학업은 큰 성취를 이룬다. 3년후, 그는 대운사를 떠나 월수(越州, 지금의 절강성 소흥)의 용흥사(龍興寺)로 가서 계율을 배우고, "보살계"를 받는다. 당중종 경룡원년(707년)에 그는 사방을 구름을 벗삼아 떠돌아다니면서 배움을 얻는다. 이때 낙양, 장안을 들른다. 경룡2년(708년) 그가 20세 되던 해에 율종법사 홍경(弘景)의 주재하에 그는 구족계(具足戒)를 받는다. 이후 그는 계속 불경의 교의를 연마하여, 율종(律宗)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게 된다. 733년, 그는 강회일대의 수계대사로 명성을 얻게 되고, 불교계내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게 된다.

 

당현종 개원원년(713년), 감진은 양주의 대명사로 가서 계율을 강의한다. 그로부터 강연을 듣고 수계를 받은 제자들이 근 4만명에 달한다. 이때, 그는 이미 학식이 깊고, 명성이 높은 불학대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승려들을 모아서 불경을 옮겨쓰는데, 33,000권에 달한다. 그리고 그는 사원 80여곳을 세웠다. 일본에서 당나라고 유학온 승려들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

 

개원21년(733년) 일본의 제9차 견당사(遣唐使)가 당나라로 오게 된다. 대표단을 따라온 일본유학승 영예(榮睿), 보조(普照)는 일본성무천황(聖武天皇)의 명을 받아 감진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건너와줄 것을 청하게 된다. 당현종 천보원년(742년) 10월, 영예, 보조는 양주대명사에서 감진을 배알하고, 일본에서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불법이 비록 일본국에도 전해지기는 했으나, 불법을 전하고 수계를 해줄 고승이 없다고 하며, 그로 하여금 일본으로 와서 불교를 흥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감진은 절안의 여러 승려에게 물어서 일본의 초청을 받아 가기를 원하는 승려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여러 승려들이 모두 침묵을 지켰다. 한참이 지난 후, 상언(祥彦)이라는 승려가 말했다: "그 나라는 너무 멀어서,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바다를 멀리 건너가야 해서, 백명이 가면 한명이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어렵고 중국에서 살기도 어렵지만 수행을 마직도 마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감진은 "불사를 위한 것인데 생명이 뭐 아깝겠느냐. 여러분이 안가겠다면 내가 가겠다" 감진은 이때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제1차 동도(東渡) : 감진과 제자 상언등 21명이 양주를 출발하였는데, 관청에서 간섭하여 실패로 끝난다.

 

제2차 동도 : 그는 군선(軍船)을 매입하였고, 적지 않은 불상, 불구, 경소, 약품, 향료등을 준비하였으며, 수행하는 제자와 기술인원이 85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배가 장강입구에 다다라 바람을 맞아 파손되어, 부득이 회항하여 수리하여야 했다.

 

제3차 동도 : 주산열도의 해면까지 갔으나 암초를 만나서 실패로 끝난다.

 

제4차 동도 : 744년, 감진은 복주에서 출발하려 한다. 그러나 온주로 가는 도중에 관부에 붙잡혀서 강제로 양주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제4차 동도도 실패로 끝난다.

 

제5차 동도 : 746년 6월 27일, 감진은 제5차 동도를 진행한다. 그는 양주에서 출발하여, 주산열도에서 3개월을 정박한 후, 동해를 가로질러 건너가려고 하는데, 태풍을 만나서, 해상에서 14일간 표류한 후, 해남도 남단의 애현(崖縣)에 도착한다. 전전하여 양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제자 상언과 일본학승 영예가 연이어 죽는다. 감진 본인도 장거리 여행과 혹서와 전염병이 들어 두 눈을 실명한다.

 

당나라 천보12년(753년) 10월 15일, 일본의 제10차 견당사가 귀국하기 전날, 견당대사인 등원청하(藤原淸河), 부사인 길비진비(吉備眞備),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 그리고 당나라에서 관료를 여러해 지내고 당나라 광록대부, 어사중승, 비서감등의 직위를 지냈던 일본유학생 아배중마려(阿倍仲麻呂, 중국이름은 晁衡)등이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양주의 연광사로 감진을 배알하러 왔다. 등원대사는 "일찌기 대화상이 5번이나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전하려 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뵙게 되니 아주 영광입니다. 만일 대화상께서 아직도 그러한 뜻이 있으시다면 제자등은 배를 네 척 준비해서 일본으로 되돌아가니 모든 물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같이 가실 뜻이 있으신지요?" 감진은 비록 66세의 고령이면서, 두 눈이 실명했지만, 불교를 전하고 계를 전수하려는 생각에서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감진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려 한다는 소문이 양주에 퍼지자, 관련 사원에서는 그의 일본행을 막기 위하여 엄밀하게 방비한다. 이때 마침 감진의 제자인 인건(仁乾)이 무주(절강성 금화시)에서 양주로 돌아와 있었고, 사부가 먼길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암중에 그와 약속하여 배를 강두(江頭)에 준비해두고 기다렸다. 10월 29일 저녁, 감진과 제자, 장인등 24명은 양주 용흥사에서 강두로 가서, 배를 타고 길을 떠났다. 대운하를 따라 장강으로 들어간 후, 바로 소주의 황사포(지금의 강소성 상숙현 황사. 즉 황헐포)에서 일본 견당사의 선단과 만난다.

 

감진이 가져간 물건은 여래, 관세음보살등 불상 8존, 사리자, 보리자등 불구 7종, 화엄경등 불경 84부 300여권, 그리고 왕희지, 왕헌지의 진품행서등 자첩 3종이었다.

 

떠나기 전에 관청에 발각될까 걱정하여, 11월 15일 감진일행은 제2, 제3, 제4선에 나누어 탔다. 11월 16일이 되어 선단이 출발하기 전에 감진은 대반고마려의 제2선에 올라탔다. 동해로 들어간 후, 선단은 강한 동북풍을 맡나 흩어진다. 제4선은 행적이 묘연해진다. 남은 3척의 배는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1월 21일, 제1, 제2 두개의 배가 오키나와섬에 도착하니, 다미도(일본 종자도)의 서남이다. 제3선도 밤에 같은 곳에 정박한다. 12월 6일, 해상에 사람들이 바라던 남풍이 불었고, 3척의 배는 줄지어 순풍을 타고 출발한다. 그런데 등원대사와 아배중마려가 탄 제1선은 암초를 만나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감진이 타고 있던 제2선은 다미를 향하여 가는데, 7일에 익구도(지금의 일본옥구도)에 도착한다. 정박후 10일간 바람과 다른 선박을 기다린다. 제1선은 수리후 계속 항행하였는데, 편북풍을 만나서 안남(월남)까지 표류한다. 배에 타고 있던 180명 중에서 170명이 죽거나 실종된다. 겨우 대사인 등원청하와 아배중마려등 10여명이 살아남았다. 제3선은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온다. 12월 18일, 제2선은 익구도를 출발하여 19일에는 폭풍우를 만나서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한다. 감진은 다시 고난을 겪는다. 12월 20일 정오에 일본 규슈 사쓰마국의 아다군 추처옥포(지금의 일본 가고시마현)에 도착한다. 12월 26일, 감진등 일행은 일본승려 연경(延慶)의 인도하에 일본 태재부(太宰府)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해(754년) 2월 1일, 일본견당사의 선단과 함께 항난파(지금의 오사카부근)에 도착한다. 2월 4일, 감진은 일본의 수도 나라에 도착하고, 일본의 거국적인 성대한 환영을 받는다. 황족, 귀족, 승려들이 모두 와서 그를 배견한다.

 

성무천황과 효렴의 뜻에 따라 감진은 율종의 고승으로, 일본의 여러 승려를 도울 책임을 부담한다. 일본사회에서는 당시 스스로 불문에 들어가서 노역과 부세를 면하려는 현상이 있었으므로, 효렴은 "지금부터 계율을 전수하는 것은 화상에게 맡긴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국내의 "자서수계"파의 반대에 부닥친다. 특히 흥화사의 현경(賢璟)등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리하여, 감진은 그와 흥복사에서 공개적으로 변론하기로 한다. 변론에서 감진은 양보를 하여 "자서수계"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되, 정식으로 인가하는 구족계는 반드시 삼사칠증(三師七證)을 요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현경등의 사람들도 모두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감진은 동대사(東大寺)에 단을 세우고, 성무, 광명황태후 및 효렴이하 황족과 승려 약 500명에게 수계를 내린다. 756년 효렴천황은 감진을 대승도(大僧都)에 임명한다. 일본 본토의 화엄종 고승인 "소승도(少僧都)" 양판(良辦)과 함께 일본불교업무를 통할하게 된다.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의 봉호를 받고 일본에 정식으로 계율제도를 확립한다.

 

758년, 감진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효렴천황이 궁중투쟁에서 밀려나서, 할 수 없이 천황의 지위를 순인천황(淳仁天皇)에게 물려준다. 이에 따라, 감진도 배척을 받게 된다. 758년, 순인천황은 명을 내려, "정사가 번잡하여 나이든 분을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이류로, 감진의 "대승도"직을 해지하고, 궁중투쟁에서 패배하여 죽은 전 황태자 도조왕(道祖王)의 관저를 감진에게 하사한다. 직위에서 물러난 후, "대화상(大和上)"으로 존경받는다. 다음 해, 감진은 관저를 절로 고치게 되며 순인천황은 "당초제사(唐招提寺)"라는 이름을 내린다. 감진은 동대사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다. 당초제사는 지금도 있으며, 일본국보로 취급되며 일본건축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순인천황은 명을 내려, 일본승려들에게 수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당초제사로 가서 배우도록 한다. 그리하여 당초제사는 당시 일본불교의 최고학부가 된다. 이후 감진은 이 곳에서 수계를 내리고 경전을 강의하며 율종을 일본에 전파한다. 그리하여 일본율종의 시조가 된다. 감진은 비록 두 눈이 실명되었지만, 기억력은 비상하여 불경의 구절을 다 외웠다. 그는 그 외에 의학에도 정통하여 냄새로 약초를 구분했고 사람의 병을 치료했다. <<감상인비시(鑒上人秘示)>>라는 의학서적도 남겼다. 이리하여 일본의학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가 일본에 가져온 중국불경인쇄물과 서법비첩은 일본의 인쇄술과 서예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763년 5월 6일, 감진은 일본의 당초제사에서 원적한다. 사내에는 지금도 감진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것도 일본의 국보이다. 이는 감진의 제자인 인기(忍基)와 사탁(思托)이 중국의 간칠협법으로 그를 위해 만든 것이다. 감진이 일본에 있던 10년동안 그는 중국과 일본의 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