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예종(唐睿宗) : 천하를 세번 양보하다

중은우시 2007. 12. 28. 18:34

 

당예종 이단(李旦, 662-716)은 당고종(唐高宗) 이치의 8번째 아들이면서, 막내아들이다. 그는 또한 무측천(武則天)이 낳은 4명의 아들중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예종은 용삭2년(662년) 6월 1일에 장안의 봉래궁 함량전에서 출생한다. 그히 11월 18일에 은왕(殷王)에 봉해진다. 나중에 그는 예왕, 기왕, 상왕등의 왕의 작위를 받는다. 예종의 첫이름은 욱륜(旭輪)이었다. 나중에 "욱"자를 떼어내고 외자로 "륜(輪)"이라고 불렀다. 영륭2년(681년), 예왕으로 봉해질 때 이름을 다시 "단(旦)"으로 바꾼다. 나중에 그의 이름은 "륜"과 "단"을 여러 번 왔다갔다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이름을 바꿀 때마다, "륜"으로 바꿀 때는 운이 나쁠 때이고, "단"으로 바뀔 때는 운이 좋을 때였다는 점이다. 사서에서는 그를 "겸손하고 공경하며 효도하고 친구들과 잘지내며, 글을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문자훈고에 특히 관심이 깊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종은 태어나면서 부터 왕의 작위를 받았고, 나중에 두 번이나 황제위에 오른다. 이런 경력은 그의 형제인 중종이나 겨우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당황실의 구성원으로서 그처럼 황태자도 해보고, 황태제가 되도록 건의받기도 하고, 태상황도 해본 사람은 오로지 그 하나 뿐이다. 이뿐아니라, 모든 황제들 중에서 부모가 모두 황제를 지낸 경우는 사례가 없다. 당예종과 그의 형제인 당중종 뿐이다. 예종이 더욱 특이한 점은 그의 세명의 형(모두 무측천 소생)은 모두 황태자를 지낸 적이 있는데, 나이 많은 두 형은 모두 황제에 즉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중에서도 장남은 황제와 인연이 없었고, 셋째가 황제위를 이었다. 그가 바로 당현종 이융기이다. 황실에 살신지화를 겪는 경우가 많았던 시절에 에종은 평안하게 지위를 유지하다가 죽었다. <<구당서. 예종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무측천이 임조하고 혁명할 때, 왕실은 여러 차례 변고가 있었다. 예종은 매번 공손하고 검소하며 물러나고 양보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당예종은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당예종은 일생동안 두번 황제위에 즉위한다.

 

제1차는 사성원년(684년) 봄 2월 7일이다. 즉, 당고종이 죽은 다음 해이다. 그는 예왕 이단의 신분으로 형님인 당중종을 대체하니, 그 때 나이 22세이다. 고종이 등극할 때의 나이와 같았다.

 

제2차등극은 경운원년(710년) 6월 24일이다. 바로 당중종이 죽은 해이다. 이번 즉위는 상왕의 신분으로 중종의 아들인 어린황제, 즉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대체한 것이다. 두번의 즉위는 27년의 시간간격이 있다. 이 27년동안 당왕조의 중앙정국은 파란만장했다. 예종의 일생은 아주 전설적이다. 이는 그의 두번에 걸친 등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번에 걸쳐 천하를 양보한 데 있다.

 

첫번째는 모친에게 양보한다.

 

예종이 제1차등극할 때는, 무측천이 낙양의 궁중에서 형인 중종황제를 폐위시켜 노릉왕으로 삼은 다음 날이다. 이때 무측천의 정치실적은 아직 황조를 바꿀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막내아들인 예왕 이단이 새로 황제에 올랐다. 예종은 중종이후의 제5대 당나라황제가 되었다. 예종이 황제가 된 후, 그는 정궁에서 조회를 볼 수 없었을 뿐아니라, 그저 별전에 머물 수 있을 뿐이었다. 무측천은 태후의 신분으로 임조칭제했다. 그녀가 예종을 위하여 해준 것이라고는 2월 7일에 그를 새로 황제로 앉히는 동시에 왕비인 유씨를 황후로 세워 주었고, 며칠 후, 다시 예종의 장남인 영평군왕 성기(成器)를 황태자로 삼았으며, 연호를 개명으로 바꾸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원래 예종이 황제라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무측천이 혼자서 결정한다. 예종을 실질적으로 허수아비황제였다. 같은 해 무측천은 다시 연호를 바꾼다. 이 한해에만 연호는 세 번 바뀐다. 이를 보면, 예종의 모후인 무측천은 황조를 바꿀 의사를 가졌다는 것뿐아니라, 정치적으로 이미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서경업의 양주병변과 종실 월왕 정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무측천은 한편으로 사람들을 죽여 위엄으로 정적을 제압했고, 동시에 거짓으로 환정(還政)을 실시하기도 했다. 수공2년(686년) 정월 그녀는 조서를 내려 예종황제를 정사에 복귀시킨다. 예종은 모후가 본뜻에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반대의 뜻을 강하게 표시한다. 무측천도 순수추주(順水推舟)로 여전히 임조칭제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돌아오는 해의 정월에 무측천은 예종의 몇 몇 아들을 왕에 봉한다. 예를 들어 성의(成義)는 항왕(恒王), 융기(隆基)는 초왕(楚王), 융범(隆範)은 위왕(衛王), 융업(隆業)은 조왕(趙王)이 된다. 예종의 황제로서의 지위가 한껏 높아진 것같지만, 사실상으로는 무측천이 한걸음 한걸음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예종은 그저 방관자일 뿐이었다. 영창원년(689년) 무측천은 주력(周曆)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재초원년(689년)으로 연호를 고친다. 이해에 무측천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인 조()를 사용한다. 이때부터 피휘(避諱)를 위하여 조서(詔書)는 "제서(制書)"로 불리운다(발음이 "조"로 같기 때문). 무측천의 정치조치에 발맞추어, 수만명이 글을 올려 청원하며, 무측천에게 개조환대(改朝換代)하도록 요구한다. 당시 종실대신과 조정대신중 반대파들은 하나하나 살륙되고 멸문지화를 당했다. 무측천의 정치세력은 이미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풍랑의 중심에 놓인 예종도 어떻게든 입장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위의 죽음 이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당예종은 모후에게 황제위에 올라달라고 청원하고, 자기의 성을 무(武)씨로 바꾸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당예종의 이러한 행위가 진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개조환대에 하나의 구실을 준 것은 분명하고, 예종 자신의 평안무사도 얻어낼 수 있었다. 천수원년(690년) 9월, 무측천은 아들 예종과 군신의 요구에 동의하고, 9월 9일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꾼다. 예종은 황사(皇嗣)의 지위로 내려가고 무씨성을 받는다. 그리고 동궁(東宮)으로 옮겨 거주한다. 모든 예절은 황태자와 같았다. 그러나, 황태자라는 명분은 없었다. 황사는 후보적인 성격의 황위계승자였다. 이단의 이름도 륜(輪)으로 바뀐다. 이전의 황태자는 황손으로 되고, 황후 유씨도 다시 비(妃)로 격하되었다.

 

예종의 제1차 양위는 이렇게 끝난다. 황사가 된 예종은 그러나 나날이 평안하지는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측천의 총애를 받는 호비(戶婢)인 위단아(韋團兒)가 이 뜻을 이루지 못한 황사에 마음을 두었고, 그에게 사랑을 호소했다. 예종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고, 일신에 화를 불러올까 우려하여 거절한다. 이렇게 위단아의 원한을 산다. 그녀는 몰래 예종의 비인 유씨와 덕비 두씨가 사는 곳에 나무인형을 묻어두고, 그녀들이 요사스런 고술(蠱術)을 통하여 무측천을 저주했다고 무고한다. 결국, 장수2년(693년) 1월 2일, 유씨, 두씨는 궁에 들어와 무측천을 가예전에서 배알한 후 처결되고, 비밀리에 궁중에 묻힌다. 아무도 그녀들이 행방을 알지 못했다.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몰랐다. 예종이 제2차등극을 한 후, 두 사람의 혼을 불러 장례를 지낸다. 두 비의 돌연한 실종에 예종은 감히 묻지도 못했다. 그저 모후의 앞에서는 태연자약하게 굴어야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했지만, 또 다른 사람이 예종의 두덕비(당현종의 생모)의 모친인 척씨가 부당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여 방씨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때 방씨의 억울함을 풀어준 사람은 어사인 서유공이다. 그런데, 그도 이후 악역으로 몰려 교살형을 받는다. 결국 죽지는 않았지만, 관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두번째는 형에게 양보한다.

 

성력원년(698년) 3월, 무측천은 폐출된 노릉왕인 중종을 방릉에서 불러들인다. 예종은 "여러번 병을 핑계대고 조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중종에게 양위할 것"을 요청한다. 예종이 병을 들먹인 것은 분명히 핑계이다. 그는 스스로 나이거 어리다고 생각하여, 황형과 정치적으로 다툴 생각은 없었다. 장유유서에 따라 형이 궁중으로 불려들어왔으니, 모후에게 황형을 승계자로 삼으라고 얘기한 것이다. 당예종의 양보는 그의 명석함과 기민함을 엿볼 수 있다. 무측천은 자연스럽게 당중종을 다시 황제에 앉힌다. 이로써 형제간의 불화가 생길 여지를 없앴다. 결과적으로 당예종은 '황사'의 신문에서 황형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다시 상왕으로 내려간다. 신룡원년(705년) 장간지 등이 정변을 일으켜서, 장창종, 장역지를 죽이고, 무측천을 퇴위시킨다. 그리고 당중종을 옹립한다. 중종은 예종을 안국상왕에 봉하고 태위의 직을 내리며 재상의 신분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1개월도 되지 않아. 예종은 글을 올려 태위와 지정사의 직위를 사직한다. 그의 태도가 확고했으므로, 중종도 응락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중종은 다시 예종을 황태제(皇太弟)의 지위에 앉히려고 한다. 이는 분명히 그가 황위를 양보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도 예종이 극력 사양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예종의 겸양으로, 그는 중종복벽이후의 정치적인 풍랑 가운데서도 여러번 의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아들에게 양보한다.

 

경룡4년(710년) 6월, 중종은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에 의하여 독살된다. 어린 황제 이중무가 황제가 되고, 당륭으로 연호를 고친다. 처음에 재상 십여명이 집단으로 상의하고, 상관완아가 붓을 들어 쓴 중종의 유조에서는 위후를 황태후의 자격으로 임조칭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국상왕에 있던 예종으로 하여금 태위로 정치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위후의 당료들이 상왕의 정치참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함에 따라, 실제로는 위후가 무측천을 본떠서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예종을 장애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찌기 대당의 황제와 황사를 지낸 바 있는 예종에 대하여 의심하고 꺼려하게 된다. 예종은 중종의 유지를 받들었으나, 위후는 사심을 가지고 그의 권력을 박탈하고자 한다. 이때도 중종은 전혀 정면으로 부딛치지 않고, 한편으로 예전과 마찬가지로 물러나서, 조정을 장악한 위후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자 한다. 이는 당예종이 물러나는데 있어서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를 역행하다보니 위후는 결국 말로를 맞이한다. 예종의 셋째 아들인 이융기와 여동생인 태평공주등은 금군과 연락하여 병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서 위후를 주살하고, 어린 황제 이중무를 쫓아낸다. 그리고 예종을 다시 황제로 모신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이번 궁중정변이 성공한 후, 왕공백관은 글을 올려 국가에 난이 많았으니 나이든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종이 신망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를 황제에 추대한다. 어린황제가 조서를 내려 황제위를 양위할 때, 예종은 여전히 글을 올려 사양한다. 여러 사람들이 강력하게 요청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동의한다. 당륭원년(710년) 6월 24일, 예종은 승천문루에서 즉위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린다. 어린 황제 이중무는 6월 7일 즉위하고, 24일에 물러났으므로 1달도 채우지 못한다. 여기에 이 기간동안 위후가 임조칭제하였므로 그는 실제로 황제의 권력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당나라역사상이건 역사연표에서건 그를 황제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다. 예종은 이번에 즉위한 다음 달에 위후를 주살한 공이 있는 이융기를 황태자로 삼는다. 그리고 동시에 연호를 경운으로 바꾼다. 연화원년(712년) 8월 25일, 재위 26개월된 예종은 다시 한번 황제위를 양위한다. 태자인 이융기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태상황제"가 된다. 이에 이르러 예종의 3차례에 걸친 양위는 끝이 난다.

 

예종의 세번에 걸친 양위를 살펴보면, 첫번째 모친에게 양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두번째 형에게 양보한 것도 연유가 있는 것이며, 세번째 아들에게 양보한 것도 실은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예종이 세번이나 천하를 양보함으로써 자신은 아주 평안무사하게 지낼 수 있었다. 사마광이 평가한 대로, "상왕은 관후공근(寬厚恭謹)하고 안념호양(安恬好讓)하여. 무(무측천), 위(위후)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예종이 원래 양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그의 양보로 새로운 황제 당현종이 나타날 수 있었고, 당나라는 당현종의 시대에 태평성세를 맞이한다. 이것도 그의 성과라면 하나의 성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