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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풍도(馮道) : 5개황조 10명의 황제를 모신 직업재상

by 중은우시 2006. 11. 7.

풍도(882-954)는 당나라가 망한 후, 송나라가 들어서기까지의 5대10국시대의 걸출한 직업관료이다. 그는 모두 10명의 황제를 5개의 황조에 걸쳐 모신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당과 후진에서는 재상, 요태동 야율덕종이 후진을 멸한 후에는 태부를 후한때는 태사, 후주때도 태사를 역임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오대의 다섯나라중 후량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은 것을 빼고는 모든 황조의  재상급의 관직을 경험한다.  풍도는 이처럼 수시로 바뀌는 정권하에서 재상의 지위를 누렸고, 7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가 죽은지 6년후에 조광윤이 송을 세우고 황제에 올라 통일된 중국은 보지를 못한다.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보면 구양수는 그를 "염치없는 자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고, 사마광은 "간신중의 으뜸"이라고 하였으며, 청나라의 왕부지는 "풍도의 악은 주(紂)보다 심하고, 화는 도척보다 컸다"고 적었다. 정통학자들에 의하여 불충, 변절, 관료사회의 오뚜기등으로 불리우고, 온갖 욕을 다 먹는 사람이고, 심지어 최근의 여추우까지도 <<역사의 암각>>이라는 글에서 풍도를 "소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오대는 907년 주온이 황제에 오른때로부터 960년 조광윤이 송을 건국한 때까지의 54년간이다. 그런데, 이 짧은 54년간 5개의 황조가 뒤바뀐다.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황조이다. 가장 긴 후량이 16년이고 가장 짧은 후한은 겨우 4년이었다. 이런 환경하에서 적이 않은 사람들이 여러 황조를 모셨다. 예를 들어 후진의 정도광도 11명의 황제를 70년에 걸쳐서 모셨다. 그는 풍도보다도 1명 더 많이 황제를 모셨다.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북송초기에도 중병을 가지고 있던, 범질, 왕부, 석수신, 고회덕, 왕전빈, 한중, 조빈, 양업, 모용연교등이 모두 북송에 귀의했지만, 그들을 변절자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풍도만을 변절자로 매국노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또한, 황제와 재상의 관계를 현재 회사의 오너와 사장의 관계로 본다면, 풍도는 한명의 성공한 직업재상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M&A가 유행하고 먹고 먹히는 업계에서는 그의 생존능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풍도는 집안배경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다. 조상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글도 읽는 수준이었고, 지위는 매우 낮았다. 다만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눈이 와서 집앞이 막히건, 먼지가 내려앉아 방석에 가득하든(大雪擁戶, 凝塵滿席) 개의치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풍도는 당애제(唐哀帝) 천우연간에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 유주자사인 유수광의 아래에서 관리를 지냈다. 이때는 당나라의 지방할거세력들이 준동할 때였다. 당시 아직 책벌레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풍도는 유수광에게 선현의 대의에 따르고 전쟁을 멈추며, 황제를 모시라고 건의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때의 경험은 풍도에게 좋은 약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 천도에 순종하고 맡겨진 업무에 충실하고 백성에게 책임을 다하는 '나만의' 인생도리를 깨치게 된다.

 

겨우 목숨을 건진 풍도는 환관인 장승업에게 의탁한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장승업은 그를 아직 즉위하기 전의 후당 장종 이존훈에게 천거한다. 풍도는 업무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생활에서는 검약했다. 장종이 양나라와 싸울 때, 그가 거주하던 군장(軍帳)은 풀로 만들었고, 안에는 앉을 자리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매일 풀무더기에서 잤다. 매일 아랫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고 동일한 찬구를 사용했으며, 전혀 꾸며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서도 그는 억울함을 당한 곽숭도를 위하여 앞장서서 구해주어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데, 업무에서 최선을 다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했으므로 계속 승진하여 중서사인, 호부시랑까지 올랐다. 그런데 마침 이 때 그의 부친이 사망하여, 그는 수효(守孝)를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부친상을 지내는 동안에 고향에 재난이 닥쳐 농민들이 굶자, 가산을 털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노약자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인 경우에는 자기일을 마친 다음에 그들의 농사도 거들어 주곤 했으나,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는 풀집에 살면서 베옷을 입고 간단하게 먹었다. 지방관리가 이 소식을 듣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내주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고,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나중에 명종이 이 일을 전해듣고는 "진짜 사나이로다"라고 감탄한다. 그는 청렴하였고, 절약근검하였으며, 공복으로서의 절개를 지켰다. 나중에 거란인들이 풍도의 학문이 높고, 치국의 술법이 뛰어남을 듣고는 병사를 풀어 그를 붙잡아가려고 했다. 장종이 군사를 풀어서 그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거란인들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얻지 못한 물건은 더 아쉬운 법이다. 이것은 아마도 풍도가 거란에 항복한 후에 야율광중에게 중시된 원인이 아닐 까 싶다. 나중에 그가 후진을 대표하여 사신으로 거란에 갔을 때는, 야율덕광이 그의 재주와 명성을 앙모하여, 천자를 맞이하는 예로써 그를 맞이하려고까지 하였다.

 

부친상이 끝난 후, 풍도는 후당의 명종 이사원의 단명전학사가 된다. 나중에 중서시랑, 형부상서평장사가 된다. 이것은 풍도가 처음으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 때 나이가 44세이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재주와 덕만 보았지 집안은 보지 않았다. 무능한 귀족자제들은 가차없이 파면시켰다. 그는 자주 명종에게 인덕으로 백성을 대할 것을 권했고, 명종이 덕을 잃은 행동을 할 때면 거침없이 간했다. 풍도의 보좌하에 명종조에는 사회가 안정되었다. 풍도의 제창하에 석민등의 사람들이 국자감에서 구경(九經)을 인쇄하여 후세에 남긴다. 이것이 고대의 관인본의 시작이다.

 

나중에 명종이 병으로 죽자. 풍도는 민제, 말제를 계속 보좌한다. 말제 이종가의 즉위에 관하여는 풍도가 또 한번 배신자라는 악명을 덮어쓴다. 이종가는 원래 명종의 의자(義子)였는데, 명종의 신임이 컸다. 명종이 하급장교를 지낼 때, 이종가는 자기가 번돈으로 명종의 일가를 먹여살린다. 이종가는 무공을 숭상하고 전투를 잘하였으며, 성격이 돈후하였고, 젊은 민제에 비하여 통일을 완성할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가 병사를 일으키자, 민제는 도망치고, 국내는 신속히 안정되었고, 국가는 빠른 시일내에 통일되었다. 이종가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풍도를 그다지 신임하지 못하고 산릉사로 내보내어 동주를 다스리게 한데, 그가 동주에 있을 때, 한 하급관리가 아문에서 풍도를 대놓고 욕하는 일이 벌어진다. 풍도는 "그는 아마도 취한 모양이군"하고는 집에 들어오게 하고, 술이 취한 후 잘 차려서 대접한다. 그리고는 조금도 그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직위를 승진시켜 주었다. 세상사람들은 풍도가 아량이 있다고 칭송했다. 그는 대신들끼리 같이 있을 때, 항상 양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풍자하고 반격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사람들을 단결시키는데 힘썼다. 여기에 그의 도량, 문재가 출중하여, 시일이 지나자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존경하였다.

 

936년,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후당의 말제를 쳐서 이기고, 중원에 들어온다. 석경당은 풍도를 수상을 모신다. "크고 작은 일 할 것없이 모두 그가 처리하였다(事無巨細, 悉以歸之)" 이 때 사규(史圭)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후당에서 관리를 할 때 청렴하고 절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였고, 일처리가 공정했다. 그러나 풍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석경당이 즉위한 후, 풍도는 개인은원은 따지지 않고, 먼저 사규를 추천한다. 풍도의 이런 행위는 그의 정적들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얼마되지 않아. 풍도는 석경당이 거란인들과 너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포부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낫지, 스스로 은거한다면 자기의 명성은 보전되지만, 백성들은 더 고통스러워야 할 것이라는 점때문에 관직에 남아있게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내가 지옥을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을 들어갈 것인가"라는 경지와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 황제와 협력하여 안정을 도모한다. 풍도는 심지어 60세의 고령임에도 거란에 사자로 갔다 오는 것도 마자하지 않는다. 거란은 원래 그를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리하여 사자로 오도록 요청하였는데, 사실은 한번 오면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였다. 석경당은 그를 잃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풍도는 "신은 폐하의 은혜를 입었는데 안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하고는 스스로 가겠다고 한다. 당시 거란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거의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모두 가지 않으려 하였는데, 그는 아주 담담하게 가겠다고 하여 다른 대소신료들이 다시 한번 그의 인품에 감탄한다.

 

거란에 도착한 후, 풍도는 아주 높은 예우를 받는다. 그러나 좋은 음식과 좋은 옷도 그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막지는 못하였다. 한번은 야율덕광이 그를 남기두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그는 "남조는 아들이고 북조는 아비인데, 양조의 신하가 된다고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러자, 풍도는 아예 거란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석탄으로 바꿔버린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풍도는 "북쪽은 추운데,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견디기 힘들 것같아, 이미 준비해두는 것이오"라고 한다. 마치 오랫동안 거란에 남아있을 것같은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자 거란왕은 감동하였고, 그에게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다. 풍도는 그러나, 세번이나 좀 더 머물겠다고 청을 올린다. 그래도 거란왕이 돌아가도 좋다고 하자, 그는 역관에 1개월을 더 머문 후에 다시 길을 떠난다. 그리고, 오는 길도 매우 느리게 걸어, 거란의 관리가 머물고 가라면 머물고 가고 해서, 거의 2개월만에 거란국경을 벗어난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렇게 묻는다. "북쪽에서 돌아올 때는 어깨에 날개가 달린듯이 빨리 내려오게 되는데, 재상께서는 중간에 쉴것 다 쉬고, 잘 것 다 자가면서 가시는 겁니까" 풍도는 "급히 귀국하고자 한다면 거란의 좋은 말로는 하룻밤이면 따라잡을 수 있고,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다. 천천히 가는 것이 안전하게 귀국하는 방법이다" 모두 들은 후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원에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그는 다시 사도, 노국공에 봉해진다. 신하로서는 최고의 등급에 오른 것이다. 후진의 출제 석중귀가 즉위한 후에도 풍도는 여전히 보정이었다. 나중에 출제가 다른 사람의 이간에 걸려 풍도를 경사에서 내보내고 남양을 다스리게 한다. 남양에 간 후에도 풍도는 잘 다스리고, 자기의 녹봉으로 공자묘를 세우고 현지의 문화를 진흥시키는데 일조를 한다.

 

풍도가 경사를 떠날 때마다, 그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오래지 않아 야율덕광이 침입하고, 후진은 멸망한다. 풍도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란에 투항한다. 야율덕광은 그를 태사에 봉한다. 이 기간동안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나중에 풍도를 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에피소드이다. <<신오대사>> 본전에는 그와 거란의 요태종 야율덕광 사이의 재미있는 대화를 소개한다.

 

태종이 묻는다. "어찌해서 우리 나라로 왔는고"

풍도가 답한다. "성도 없고 병사도 없는데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태종이 다시 묻는다. "그대는 어떤 늙은이인가?"

풍도가 다시 답한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

태종이 다시 묻는다. "천하백성은 어떻게 구하겠는고"

풍도가 다시 답한다. "이 때는 부처가 다시 나와도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황제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풍도가 너무 노예근성에 빠져있고, 민족적인 기개도 없고, 오랑캐의 황제앞에서 아부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모르겠는가? 풍도의 이러한 말때문에 중원의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구해진 것을. 왕안석은 사상이 깊은 정치가였다. 그는 풍도가 스스로 욕을 당하면서, 백성들의 안위를 구했다(屈身以安人)고 평했다. 이런 행위는 바로 부처보살의 행위와 같다. 거란이 중국을 침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성을 도살할 때, 중국의 영웅호걸은 누구도 나서서 백성을 구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풍도는 교묘한 말고, 대신의 풍모로 거란황제를 설득하여, 중국인들을 덜 죽이도록 만들었다. 구양수가 <<신오대사>>를 쓸 때는 비록 풍도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득이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거란인들이 중국인을 멸족시키지 않은 것은, 이 한마디 말에 도움을 받은 바 크다" 풍도의 말은 바로 일언지선(一言之善)이라는 것이고, 이것으로 거란족의 수중에서 많은 중원한족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입만 열면, 인, 의, 예, 지, 신의 구국을 얘기하는 것보다 백성들에게 훨씬 더 좋은 역할을 하였다. 풍도는 이렇게 거란에 협력하였는데, 그를 매국노라고 욕하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 뿐아니라 공정하지도 않다.

 

풍도는 그가 모시는 황제를 호랑이나 표범과 같이 보았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서비스하는 것이 아니라, 창생을 위하여 일을 하였다. 풍도는 '도"를 믿었고, 그는 '도'의 작용하에 반드시 영명한 군주가 탄생할 것으로 믿었다. 그는 명주의 출현을 기대하였고, 그를 도와서 창생을 도탄에서 구해내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앙이고 그를 지지하는 역량이었다. 거란에서도 풍도는 백성을 살게 하고, 생명을 구했다. 그는 자기의 녹봉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일생동안 두 명의 부인만을 취했다. 부장들이 미녀를 약탈해서 그에게 바치면, 그는 그녀들을 절에 보낸 후에, 가족들을 찾아서 다시 돌려보내주곤 하였다. 풍도는 이처럼 이국에서 고향의 동포들을 위하여 묵묵히 헌신하였다. 비록 그 작용이 미미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