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장손황후: 당태종이 가장 신뢰한 정치고문

by 중은우시 2007. 11. 7.

글: 맹헌실(孟憲實)

 

장손황후가 자기가 관리하는 일만 잘 처리했더라면, 그녀의 지위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오늘날 그녀를 평가하는 것처럼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든 당태종의 인식이든. 장손황후는 절대 단순히 우수한 후궁관리인이 아니었다. 실제로 장손황후는 이세민의 고급참모였고, 특히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녀가 이세민의 고급정치참모역을 담당했다.

 

장손황후가 사망하자, 이세민은 그녀를 잃으니 좋은 보좌역을 잃어서 슬프기 그지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한 황후가 매번 법도에 맞게 간해서, 짐의 부족함을 메워주었다고 한 바도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 때, 장손황후가 그 과실을 보완해 주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만일 황후가 막 죽은 후가 아니라면 이처럼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황후가 한 말은 모두 그가 듣기에 좋은 말(善言)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말인가? 당태종에게 좋고, 천하에 좋은 말이란 뜻이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장손황후는 이세민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고난을 겪어왔으니, 신뢰는 이미 검증을 거친 것이었다.

 

이세민은 어떤 일에서 황후의 말을 들었을까? 역사의 기록은 많지 않다. 우리가 황후의 각도에서 본다면 그녀는 어떻게 황제의 고문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첫째, 장손황후는 황제가 묻더라도 자주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떤 때는 황제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가, 황제가 두세번 다시 물으면 '그것은 황제의 일입니다. 부녀자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다. 이세민이 이렇게 저렇게 해명해서 부녀자의 정치간여라는 말은 듣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 그녀는 자기의 견해를 밝히곤 했다. 이는 왜인가? 황후는 정말 의견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고의로 애를 태우는 것일까? 둘 다 아니다.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세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하고, 그것이 정말 황후로부터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의견을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하여만 제기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황후는 중요한 문제에만 대답을 한 것이고, 이세민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문제에 대하여만 대답한 것이다. 무슨 일이건 다 묻는다면 그것은 비서이다. 중요한 일인 경우에만 묻고 대답해 주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둘째, 장손집안의 일에 대하여는 황후는 의견을 주장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황후는 이전의 방식을 바꾸어 회피하지 않고, 주장했다. 이는 당연히 그녀가 장손집안의 가장 권력을 가진 인물이어서이기도 했고, 그녀는 스스로 장손집안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두 가지 사건이 가장 명확히 이를 보여준다. 하나는 장손안업의 생명을 보존해준 일이다. 장손안업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켜서 정관원년에 그는 이효상등의 사람들과 역모에 참가하고, 황제를 죽이고자 한다. 이는 중대한 정치사건이었고, 율법에 따르면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황후가 간섭했다.

 

그녀는 황제를 보자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장손집안은 정말 불행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폐하가 안업에게 얼마나 잘해주었습니까. 아무 공로도 없는데도 감문위장군을 시켜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는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반역에 가담하다니 정말 만번 죽여도 마땅한 일입니다"

 

황제는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당태종은 물었다.

 

황후는 말했다: "무슨 뜻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제 오빠가 이런 일을 벌였으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형제자매가 오빠를 박해했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오빠가 우리에게 나쁘게 대한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조정에까지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 장손안업은 장손황후의 배다른 오빠로, 장손황후와 장손무기등에게 악독하게 대했다)

 

이세민은 "나는 당연히 조정에 누가 되게 하지 않겠고, 황후에게도 누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장손안업은 죽음은 면하고 남방으로 유배를 갔다.

 

장손황후의 이번 노력으로 장손안업은 과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비록 조정의 명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장손안업의 목숨을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런 결과로 황후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전의 복수를 하려고 하거나, 가정내부의 모순을 격화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가정문제에 대하여 무측천은 황후가 된 이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오빠들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모두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서였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후, 이미 옛날의 오빠들이 그녀에게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어릴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그대로 복수해서 죽음으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만일 권력을 가지게 되면 마치 마약과도 같이 중독이 되어 버린다. 많이 쓰면 쓸 수록 더 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권력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쾌감은 결국 사람을 죽임으로써 쾌감을 얻게 된다. 친척이라도 죽이게 되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장손황후는 강인한 이성을 지니고 있고, 권력에 대하여도 이성적인 입장을 유지했었다. 장손안업의 목숨을 보존시켜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장손무기가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손무기는 이세민과 평민시절부터의 친구였다. 당나라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태종이 최고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매우 크다. 이세민은 당연히 그를 가장 신임했다. 이세민이 정권을 잡자, 장손무기는 이부상서가 된다. 나중에 이세민은 장손무기에게 상서복야(尙書僕射)를 맡기고자 한다. 상서복야는 정관시절의 재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황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외척의 정치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이세민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손무기로 하여금 좌복야(左僕射)를 맡게 했다. 이후 한번은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장손무기가 정치를 독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그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장손무기를 신임한다. 마치 아들처럼 신임하고 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황후는 계속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녀는 장손무기에게 스스로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장손무기는 당연히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후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사직했다. 황상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황후는 이를 듣고 아주 기뻐했다. 외척의 정치간여를 막는 모범을 보인 것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가? 더구나 당태종은 아주 강력한 황제였는데, 장손무기가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누구도 장손황후를 따르지 못한다. 그녀는 어떤 사람보다 장손무기를 잘 알고 있었고, 어떤 사람보다 이세민을 잘 알고 있었다.

 

장손황후의 멀리내다보는 탁견은 여러 해 후에 증명된다.

 

셋째, 위징과 방현령을 추천했다.

 

장손황후는 장손무기에 대하여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지만,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첫째는 위징이다. 위징은 원래 이세민의 편이 아니었으나, 이세민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이세민의 참모들 중에서는 위징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이세민은 위징의 간언을 잘 받아주었지만, 항상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황후의 성가를 높이는 이야기이다.

 

하루는 이세민이 조회를 마친 후 돌아왔는데 아주 화가 나 있었다.

황후가 왜 그런지 물었다.

이세민은 "그 시골촌놈이 조회에서 또 나에게 대들었다. 이 시골뜨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 마음 속의 원한을 풀 수 없을 것같다"

황후는 즉시 돌아가서 조복을 입고 돌아와 이세민에게 축하한다고 하였다.

이세민은 왜그러는지 물었다.

황후는 "사서에 보면 임금이 성군일 때 신하들이 충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가 성군이시니 위징과 같은 인물이 직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에서 이른 성군을 얻었으니, 폐하의 가까운 사람으로써 제가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세민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역사기록이 없다. 분명히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황후가 황제를 설득한 각도를 보자. 그녀는 황상의 입장을 올려줌으로써 위징의 직언을 보호했다. 생각해보라 만일 그녀가 황제의 도량이 좁다고 말하기 시작했다면, 이 문제는 풀기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어쩌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이 성공한 것은 사람성격의 약점을 잘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황상이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과 황상의 위신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다.

 

황후는 의견을 제시할 줄 알았을 뿐아니라, 의견을 잘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문제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후궁의 일에 대하여도 황후는 항상 이러했다. 이세민이 크게 노했을 때, 그녀는 엄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황제의 태도가 약간 완화되면, 황후는 다시 사정의 경위를 말하곤 했다. 이리하여 황제가 일시적으로 화가나서 일을 잘못 처리하거나, 좋은 사람이 억울한 일이 당하는 법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애썼다.

 

장락공주가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황후의 친딸이 시집가는 것이므로, 황제는 특별히 혼례에 신경쓰도록 당부했다. 결과적으로 조정에서 준비한 예물이 아주 많았고, 심지어 장공주(長公主, 황제의 여형제)보다 많게 되었다. 위징이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고, 정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세민은 위징의 의견을 장손황후에게 전했다. 황후는 깊이 감탄했다: "폐하에 대하여, 부부관계인 나도 얼굴색을 살펴서 말하는데, 위징같은 인물은 정말 얻기 힘든 인재입니다. 과거에는 황제께서 위징을 중용한다는 말만 들었고, 이유를 몰랐었는데, 이제 알 것같습니다. 위징은 의(義)를 위하여 정(情)을 끊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충언은 역이이나 이어행이라고 했으니, 실로 사직을 지킬 신하입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황후가 칭찬한 인물은 딱 두사람이라는 것이다. 위징과 방현령이었다. 당태종이 위징을 신임하고 중용한 것에 실은 배후에 황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징은 정관지치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