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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의 후계자

by 중은우시 2007. 4. 2.

기원전94년, 한무제가 총애하는 구익부인(夫人)이 아들을 낳았다. 무제는 매우 예뻐했다. 비록 그는 이전에 이미 다섯 명의 자식이 있고, 황위계승자 즉 태자도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지만, 이 황제는 늙어서 자식을 얻었을 뿐아니라, 이 아이가 아끼는 후궁의 소생이며, 게다가 구익부인의 뱃속에서 꼭 24개월(옛날 기록에는 이상한 것들이 많다)만에 나온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예전의 요(堯)임금의 어머니가 꼭 14개월간 회임하였다가 낳았다는 고사를 기억해내고는 아주 기뻐서, 구익부인의 산방(産房)에 "요모문(堯母門)"이라고 써붙였다. 이로써, 한무제가 이 어린아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충분히 알만하다.

 

그러나, 황태자는 일찌감치 확정되어 있었다. 위황후(衛皇后)의 소생인 유거(劉據)이다. 이 유거는 한무제와 성격이 전혀 상반되었다. 한무제는 형과 법을 엄하게 집행하는 반면에, 태자는 아주 인자하고 후덕했다. 한무제가 처벌하려는 사람은 태자가 뒤집어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무제는 형벌제도를 엄하게 하기 위하여 일련의 고발기관과 집법대신들의 보좌를 받았다. 이 사람들은 유거가 황위를 승계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불리해질 것을 두려워했다.

 

게다가 한무제는 구익부인을 "요임금의 모친"에 비유하였는데, "요"와 같은 인물이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순리에 맞는 일이었다. 한무제는 또한 화공으로 하여금 "주공보성왕(周公輔成王)"의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니, 황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한무제는 신선을 믿고 장생불로를 바랐다. 그래서 무고지술(巫蠱之術)에도 관심이 많았다. 소위 "고(蠱)"라는 것은 여러 독충을 하나의 용기에 넣은 후, 그들로 하여금 서로 물게 한 후, 마지막에 하나가 남는데, 이 하나의 괴물이 바로 "고"인 것이다. 정화2년, 한무제는 병이 들었다. 수형도위 겸 직지수의사자인 강충(江充)은 이 기회를 틈타 한무제와 태자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즉, 누군가 고독으로 황제를 해하려 하는데, 이에는 위황후와 태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별궁에서 휴양할 때, 위황후와 황태자가 문안인사를 왔는데, 저지당했다. 태자인 유거는 분노끝에 강충을 붙잡아 죽여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태자가 모반하려고 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일시간에 이 소문은 전 장안에 퍼지고 만다. 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태자는 정말 병사를 일으킨다. 황제파와 황태자파가 장안성에서 5일간을 싸운다. 죽은 자가 수만이었다. 태자 유거는 전투에서 패하자 자결한다. 황후 위자부도 역시 자살하고 만다. 나중에 한무제는 깨달은 바가 있어서, "사자궁(思子宮)"을 만들고 후회하였다. 그러나, 황태자를 바꾸는 일은 결국 완성되게 되었다. 4년후, 구익부인이 낳은 유불릉(劉弗陵)은 8살의 나이로 태자에 오른다. 그가 나중의 한소제(漢昭帝)이다.

 

유불릉은 원래 "요모문"에서 태어난 한무제의 아끼는 아들이었고, 한무제는 이 어린 아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조건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여러 측면의 준비를 한다. 그는 유불릉을 위하여 조정중신인 곽광(光)으로 하여금 조석으로 어린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는 한편, 유불릉을 태자로 올리자 마자,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여버린다. 앞의 행위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후자는 당시의 많은 대신들마저도 그 이유를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어떤 사람이 한무제에게 아들을 태자로 세우는데, 왜 그 모친을 죽이는지 물어봤더니, 한무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왕의 국가가 혼란이 발생한 것은 많은 경우 황제가 어린데, 그의 생모는 젊고 힘이 넘쳤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교만하고 자긍심이 커져, 음란한 일을 마음대로 저지르며, 아무도 단속할 수 없게 된다. 너희는 여태후의 독재를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이것이 한무제가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면서 그의 생모를 죽였던 이유이다.

 

후계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처럼 예상을 깬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 것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옛 사람들은 전쟁때 기묘한 전술을 써서 이기는 것을 좋아했는데, 한무제는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기묘한 전술을 썼다. 그의 이 거동은 잔혹하다 아니할 수 없지만, 확실히 모후가 정치에 간여하여 교란시키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