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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光緖帝)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5. 8. 23.

광서34년(1908년) 10월 21일, 광서제는 서원(西苑, 현재의 中南海) 영태함원전(瀛台涵元殿)에서 사망한다. 광서제가 무술정변후 자희태후에 의하여 사실상 쫓겨나고, 10년간의 유폐생활을 거친 후였다. 청나라 태의원의 기록을 모은 <<자희광서의방선의>>라는 책에 따르면 광서제에게 처방한 약방 182개중에서, 신경쇠약에 관련된 약방이 64개, 관절염에 관한 것이 22개, 자식을 낳고 장수하도록 하는 것이 17개 등이었다. 광서제는 비록 계속 병환을 앓았지만, 당시의 의약조건이 상당히 좋았으므로 절대 돌연사를 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광서제는 자희가 사망하기 꼭 하루전에 돌연 사망하여, 당시 중국 조정내외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주었다. 동시에 광서제가 자연사를 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하였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광서제의 사인에 대하여는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병환으로 인한 정상적인 사망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이다.

 

첫째, 병사설. 어떤 사람들은 광서37세때의 병력기록을 살펴, 광서제는 현재의학으로 말하면 위중한 신경계통증세, 관절염, 골결핵등의 질병을 앓았다고 한다. 당시 어의 6명이 매일 1명씩 돌아가면서 치료하여,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처방을 하여 치료방법이 동일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여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광서제의 진료기록을 살펴보면, 1908년들어 3월 9일에 이미 병세가 위중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5월 10일에는 여러 가지로 처방하였으나 효과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7월 16일에는 강소의 명의 두종준을 불러 진료하게 하였는데, 두종준이 광서를 진맥한 후, "내가 이번에 북경에 온 것은, 황상의 병을 잘 치료하여, 명성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헛수고를 한 것이었다. 공을 세우는 건 바라지도 않고, 단지 잘못이나 저지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라고 하였다. 10월 17일에는 3명의 어의가 진맥한 후 기재하였는데. 이미 폐염증이 나타나고 심폐쇄갈의 증상이 나타났다. 10월 20일에는 밤에 광서가 위험한 상태에 돌입해서, 사지가 차갑고, 눈에 흰자위가 드러나고, 입은 꽉닫혀 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10월 21일에는 맥박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눈은 앞에 고정되어 있고, 입을 벌려 숨을 거꾸로 쉰다고 되어 있고, 저녁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이런 기록상으로는 점차 병세가 위중해져서 사망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 돌연사나 독살의 증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둘째, 살해설. 광서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에는 주로 자희, 이연영, 원세개의 세 사람에게 의혹이 집중되고 있다.

 

(1) 자희설. <<숭릉전신록>>과 <<청비류초>>등의 책에는 자희의 병이 위중해지자, 자신의 사후 광서가 다시 권력을 잡아, 자신의 기존방침을 뒤집을까봐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독살하였다는 것이다. 부의의 <<나의 전반생>>이라는 책에서도 "하나의 전해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서태후가 자신의 병이 위중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광서보다 먼저 죽는 것은 싫어서, 독수를 썼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겨우 38세밖에 되지 않은 광서가 나이가 74세인 자희보다 먼저 죽었고, 그것도 겨우 하루 차이라는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교묘하며, 이것은 자희가 깊이 생각하여 살해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이연영설. 영국인 프란더스 베커스의 <<자희외전>>과 덕령의 <<영태치혈기>>등의 책에서는 청나라 황궁의 환관인 이연영등이 평소에 주인인 자희의 권세를 등에 업고 광서제를 모함하거나 중상한 바 있어, 자희가 죽은 후 광서제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자기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손을 썼다고 본다. 그래서 자희가 죽기 전에 광서제를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3) 원세개설. 부의의 <<나의 전반생>>에서 원세개가 무술정변때 광서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이를 배신하고 중요한 때에 광서를 팔아먹은 적이 있으며, 원세개는 자희가 죽은 후에는 광서제가 절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약을 올리면서 암중으로 독을 투입하여, 광서제를 독사시켰다는 것이다.

 

(4) 누군지는 모르지만 광서제를 독살하였다는 것. 청나라 어의를 지낸 바 있는 굴귀정(屈貴庭)은 중화민국시대의 잡지 <<일경(逸經)>>에 쓴 글에서 "광서제가 죽기 3일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궁에 들어가 황상의 병을 살펴본 바 있는데, 황상의 병세가 원래 호전되고 있었는데, 돌연 악화되어, 침대위에서 구르고, 배가 아프다고 소리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이 어의는 비록 누군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광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1980년 청서릉 문물관리처는 숭릉지하궁전을 정리할 때, 광서제의 유체는 완벽하고, 키는 164센티미터이며, 칼날등 무기의 상흔은 전혀 없었다. 화학실험결과 머리카락과 경추등에서 독극물중독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청사자료연구자들이나 의학자료를 검토한 의학전문가의 결론과 일치한다. 결국 광서제가 자희보다 하루 먼저 죽은 것은 단지 역사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