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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光緖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5. 8. 23.

동치13년(1875년) 12월 5일 저녁, 동치제가 자금성의 양심전 동난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동치제가 죽기 직전에 양심전의 서난각에서는 자안태후(동태후)와 자희태후(서태후)의 두 태후가 주재하여 긴급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의 주제는 단 하나였다. 누구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 청나라의 귀족, 고관들이었다. 순(恂)친왕 혁종, 공친왕 혁흔, 순(醇)친왕 혁현, 부군왕 혁혜, 혜군왕 혁상, 패륵 재치, 재징, 공 혁막(황자의 등급은 친왕, 군왕, 패륵, 패자, 공의 다섯단계이다), 어전대신 보롱나모구, 이쾅, 징셔우, 군기대신 바오쥔, 콰이링, 롱루, 밍샨, 꾸이바오, 원시, 홍덕전행주 서동, 옹동서, 왕경기, 남서방행주 공각, 반고음, 손치경, 서포, 장가양등이었다.

 

청나라에서 황제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은 것은 동치제가 처음이었다. 청나라의 '가법'에 따르면 황제사망후 자식이 없으면, 반드시 황족의 친지중에서 다음 대의 사람을 선택하여 황태자의 신분으로 사망한 황제의 후사를 이어 황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동치제의 이름은 재순이었고, 아이신줴뤄 가계에서 "재"자 항렬에 속한다. 바로 다음은 "부"자 항렬이었다.

 

부(溥)자 항렬에서 황위를 잇기에 적합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부륜(溥倫)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위(溥偉)였다.

 

부륜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의 아들인 재치(載治)의 아들이다. 부자 항렬중 당시 연장자이고, 배분등에서도 적당했다. 그런데, 재치는 혁위의 친아들이 아니라, 혁위의 양자로 후사를 이은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혈연관계에로 보면 부륜은 친조부는 도광제의 아들도 아니고, 가경제의 손자도 아니었다. 부륜은 아이신줴뤄 집안에서 본다면 직계가 아니라 방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부륜은 아이신줴뤄의 직계 후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적절한 황제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위는 공친왕 혁흔의 둘째 아들인 재형(載灐)의 아들, 즉 공친왕 혁흔의 손자였다. 그리고, 공친왕의 넷째아들인 재징(載澂)이 후계가 없자 재징의 양자로 들어간다. 종친의 혈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위가 가장 적절한 후보였다. 다만, 부위는 계부인 재징과 함께 평상시에 기원이나 술집을 드나드는 등 행실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시에 동치제의 황후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그러므로, 황후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후계를 논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선택한 방법은 부자항렬에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고, 황후가 동치제의 자손을 낳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자희태후는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재(載)"자 항렬에서 선택할 것을 주장했고, 바로 순친왕 혁현의 아들인 재첨(載湉)이었다.

 

영국인들이 지은 <<자희외전>>에서는 광서제의 즉위에 따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희 : 동치제의 황후가 비록 임신을 하였으나, 언제 태어날 지 알 수가 없다. 황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즉시 후계를 정해 황위에 오르게 해야할 것이다.

공친왕 : 황자가 탄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 황제의 사망을 비밀로 부치고 장례를 미루자. 만일 황자를 낳으면 후계로 삼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새로운 황제를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왕공대신들 중에서 공친왕의 의견이 맞다는 입장을 보이다)

자희 : 현재 남방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 그들이 만일 황위가 빈 것을 안다면 아마도 형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국가의 근본이 흔들릴 수도 있다.

(군기대신과 신하들 중, 특히 한족 3명은 자희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였다)

자안(동태후) : 내 생각으로는 공친왕의 아들이 대통을 이을 수 있을 것같다.

공친왕 : 감히 그럴 수 없다. 승계의 정상적인 순서를 따른다면, 당연히 부륜이 선황의 후계를 이어야 한다.

재치(부륜의 부친) : 감히 그럴 수 없다.

자희 : 재치는 혁혜의 양자이지 않느냐. 공친왕! 예전에 이렇게 한 사례도 있느냐?

공친왕 : 명나라의 영종황제가 이렇게 계승한 적이 있다.

자희 : 그건 적당하지 않다. 영종이 계승한 것은, 손비가 속여서 한 것이지 않느냐. 그리고, 영종이 재위했을 때는 국가가 안정되지도 못하였다.

자희 : 내 생각으로는 혁현의 아들인 재첨을 세우면 될 것같다. 그리고, 지금 바로 결정해야지 늦춰서는 안된다. 투표로 결정하자.

자안 : 좋다.

투표결과 순친왕등은 부륜에게 투표하였고, 세 사람이 공친왕의 아들 부위에게 투표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자희의 뜻에 따라 순친왕의 아들 재첨에게 투표하였다. 이로써 황위가 결정되었다.

 

이 글에서 투표로 결정했다는 부분은 영국적인 사고방식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고, 청나라때 투표로 결정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관련자들의 입장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자희의 일파와 공친왕의 일파간에 재첨을 세울 것인지, 부위를 세울 것인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자희의 의사가 관철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