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때 황후선발의 8단계시험

by 중은우시 2008. 1. 8.

글: 월초(越楚)

 

명나라시기에 누구든지 황후가 되려고 생각했다면, 8단계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가능했다.

 

<<명사. 후비전>>의 기록에 따르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역대후궁들이 정사를 어지럽힌 것에서 교훈을 얻어, 홍무원년에 <<여훈(女訓)>>을 편찬하여 후비들이 지켜야할 '가법'으로 삼았다. 후비의 선발에 있어서도 조정의 권신이 후궁과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천자, 친왕의 후, 비, 궁빈은 양가집 딸들 중에서 신중하게 뽑는다. 그리하여, 비, 후는 민간에서 많이 뽑혔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를 주로 뽑았다. 이로써 황제를 보좌하여 근검절약하는 기풍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것은 희망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명나라때 후궁제도는 아주 잘 정비되었으며, 선발과정은 "8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차례로 도태시켰다.

 

제1단계는 "해선(海選)"이다. 황제가 혼인할 연령이 되면, 환관을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13살부터 16살까지의 양가집 규수들중에서 5천명을 추려 뽑는다. 이 5천명은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예선통과자가 되는 셈이다. 황실은 약간의 금전과 여비를 지급해서 소녀의 부모들에게 규정된 시간내에 북경성으로 보내어 선발에 참여하도록 한다.

 

제2단계는 "초선(初選)"이다. 이 초선은 큰 마당에서 이루어진다. 환관들이 소녀들 100명을 한 줄로 세워서 연령이 많고 적음에 따라 줄을 세워서 하나하나 관찰한 후에, 키가 약간 크거나, 약간 작거나, 혹은 약간 뚱뚱하거나, 약간 마른 소녀들은 도태된다. 이 초선에서 개략 1천명이 도태된다.

 

제3단계는 "재선(復選)"이다. 일반적으로 초선이 열린 다음 날에 이루어진다. 초선을 통과한 소녀들은 계속 줄을 서 있고, 환관들은 아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자세히 각자의 오관, 두발, 피부를 관찰한다. 당연히 몸매도 본다. 한 가지라도 규정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줄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 후에 각자에게 집안, 성명, 연령등을 보고하게 하고, 음색, 자태를 심사해서 목소리가 탁하거나 이빨이 고르지 못하거나 자태가 우아하지 않은 자들을 도태시킨다. 이렇게 하여 2천명을 걸러낸다.

 

제4단계는 "정선(精選)"이다. 환관들은 자를 가지고 소녀의 손과 발을 잰다. 다시 그녀들에게 수십보를 걷게 한다. 그리하여 걷는 자세와 품격을 본다. 이리하여, 발이 약간 크거나 손과 팔이 두껍거나,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하면 다시 도태된다. 마지막으로 1000명의 미녀가 선발되어 궁중에서 시행되는 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 환관들의 임무는 이 단계에서 끝난다.

 

제5단계는 "유궁(留宮)"이다. 나누어서 궁중의 나이든 궁녀들이 미녀들을 하나둘 '밀실로 불러들여서 그의 유방, 겨드랑이냄새가 있는지 확인하고 피부를 만져본다" 신체검사의 정도는 우주인을 선발하는 것에 못지 않다. 신체검사를 통과하면 그중에 300명을 궁중에 남는 궁녀로 확정한다.

 

제6단계는 "진빈(晋嬪)"이다. 이 300명의 궁에 남는 미녀는 황제가 특별히 파견한 전문가에 의하여 1개월간 관찰한다. 그녀들의 성격과 말투를 가지고 성격이 온유한지 후덕한지를 판단하며, 지혜로운지 현명한지를 판단한다. 이를 기준으로 다시 250명을 걸러내서 남은 50명은 비빈(妃嬪)으로 승격된다.

 

제7단계는 "선삼(選三)"이다. 소위 "선삼"이라 함은, 바로 황태후 혹은 태후가 50명중에서 3명을 뽑아서 황제에게 친히 선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거시험에서 마지막에 3명을 뽑는 것과 비슷하다. 명희종이 황후를 뽑는 경우를 예로 들면, 당시 태비 유씨는 친히 50인을 불러서, 그들과 얘기하고, 서예, 산수, 시, 그림등 여러 재예를 시험한 후 3명을 뽑았으니 바로 황후 장언(張)과 귀비 왕씨(王氏), 단씨(段氏)였다.

 

제8단계는 "흠정(欽定)"이다. 유태비는 장언등 3명을 황제에게 알린다. 명희종은 친히 3사람을 불러서 본 후에 직접 면접시험을 본다. 희종은 세명의 절색미인을 보고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고,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조선시(趙選侍)에게 결단을 내리게 하고, 조선시는 장언으로 정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하여 장언은 중궁황후가 되고, 왕씨는 양비(良妃), 단씨는 순비(純妃)가 되었다. 이때, 장언의 나이 15살이었다.

 

일반전으로 3명안에 들어가면 황후로 뽑히지 못한 2명은 모두 귀비로 봉해진다. 그러나, 물론 금은폐를 주고 집으로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명광종이 태자일 때 태자비를 뽑는데, 유대고와 곽씨자매는 최후의 각축에 뛰어들었다. 곽씨언니가 태자비로 선발되었고, 그녀의 동생과 유대고는 낙방되어, 돈을 주고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유대고는 자신의 몸값이 올랐다고 생각하여, 고향에 돌아간 후 보통사람들에게는 시집가지 않으려고 하여, 결국 평생 노처녀로 살았다고 한다.

 

유감스러운 점은 명나라때의 이처럼 가혹한 황후선발제도를 통하여 선발한 후비들도 결국 주씨자손들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고,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