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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황실은 왜 무당산을 중건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9. 28.

 

 

글: 중화유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무당산(武當山)은 북극진무현천상제(北極眞武玄天上帝)가 득도하여 우화한 장소라고 한다. 그리하여 역대로 도교의 궁관(宮觀)이 가득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당산을 '무협'으로 인식한다. 고심막측한 내가권(內家拳),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의 태극권...특히 무림고수인 장삼풍(張三豊)에 대한 전설은 많이 전해져 와서, 무당산에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덧씌웠다. 무술의 중심지로서, 남무당, 북소림이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고, 무림이라는 강호에는 무당의 무술이 천하에 이름을 얻었다. 강호라는 시야를 벗어나서 본 무당산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아마도 낯설어 할지도 모른다.  "비현무부족이당자(非玄武不足以當之, 현무가 아니면 당할 수 없다)"의 내력에 대하여는 말로는 다하기 어려운 깊은 뜻이 숨어있는 것같다.

 

무당산은 화중의 형초(荊楚)의 복지(腹地)에 위치하고 있으며 8백리에 걸쳐 있고, 한수(漢水)가 뒤돌아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 이름났다. 도교의 형성과 발전에 따라 무당산은 점점 도교의 명산이 되어갔다. 무당산이 진정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게 된 것은 실제로는 통치자의 도교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었다. 무당산이 이름을 날리게 된 배후에는 황권의 지고무상한 위엄이 숨어있는 것이다.

 

당태종이 무당산에 칙명을 내려 사묘(祠廟)를 만든 때부터 무당산은 황권과 각종 연관을 맺게 된다. 송나라 원나라때도 황실은 무당진무신(武當眞武神)이라는 봉호를 내리고, 진무신존(眞武神尊)을 사직가신(社稷家神)으로 삼았다. 명나라 영락제에 이르러서는 무력으로 조카인 건문제에게서 황제자리를 빼앗은 후 영을 내려, "북건고궁, 남수무당(北建故宮, 南修武當, 북에는 자금성을 짓고, 남에는 무당을 짓는다)"을 진행한다. 그는 심지어 친히 무당산에 궁관을 짓는 것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이 공사는 인력, 물자, 재력을 엄청나게 투입하였다. 전체 공사는 14년이 걸렸으며, 정락(淨樂), 옥허(玉虛)등 구궁(九宮)과 태현(太玄), 원화(元和)등 팔관(八觀) 및 암당(庵堂), 암묘(巖廟), 사정(祠亭)등 모두 33곳의 건축물을 지었다. 이 공사규모는 대단했다. 건축기술도 정교하여 중국고대 기획, 설계, 건축의 모범과도 같은 사례이고, 세계건축사상의 일대기적이라고 할만하다. 무당산은 이리하여 중국최대의 황가도량이 되었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황실은 왜 이렇게 무당산에 건축물을 짓게 되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얘기하려면 우선 건문제의 삭번(削藩)과 연왕 주체(후의 영락제)의 정난지역(靖難之役)부터 얘기해야 한다. 주체는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며, 홍무3년(1370년)에 연왕에 봉해지며, 홍무13년(1380년)에 북경으로 가서 북방을 지키게 된다. 홍무31년(1398년) 주원장이 서거한 후,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하며 연호를 "건문"으로 한다. 건문제는 연왕등 여러 번왕인 숙부들이 병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아주 우려하였다. 숙부들 중에서 이숙, 삼숙은 이미 사망하였으며, 사숙 주체가 나이가 가장 많고 영향력도 가장 컸다. 그리하여 건문제는 대신 제태(齊泰), 황자징(黃子澄)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왕, 제왕, 상왕, 대왕, 민왕등의 번왕을 폐하고, 형주에 있던 상왕은 핍박을 받아 죽는다. 그후 전력을 다하여 최대의 위협세력인 연왕에 대처한다. 건문제는 북경에 포정사 장병(張昺), 도지휘사 사귀(謝貴)등을 심어두고, 연왕의 반란에 대비한다. 당시 연왕은 이미 조정의 그에 대한 위협을 감지했고, 그리하여 황급히 병란을 준비했다. 건문원년(1399년) 7월초, 주체는 조정이 그에 대해 손을 쓸 것이라는 정보를 취득한 후, 매복을 두어 장병, 사귀등을 붙잡아 죽여버리고 정난지역을 일으킨다. 연왕 주체는 자신이 거병하여 조정에 반항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은 제태, 황자징등의 간신을 토벌하려는 것이므로 자신의 거동이 "봉천정난(奉天靖難,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난을 평정하다)"이라고 표현했다.

 

건문원년7월 계유일(1399년 8월 6일), 주체는 장사를 모아서 말했다: "나는 왕위를 받은 이래 법을 지키고 분수를 지켰다. 이제 어린 주군이 즉위하여, 간신을 �어, 큰 화를 아무렇게나 불러일으키고, 우리 집안을 도륙하니, 조상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한다.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무리만 있으니 반드시 병사를 일으켜 토벌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주군의 곁에 있는 악의 무리를 청산하고자 한다(以淸君側之惡)" 이 선언은 "봉천정난"의 선언이다. 이후 3년여에 걸친 전쟁을 역사에서는 "정난지역"이라고 부른다. 주체는 "정난지역"을 일으킨 것이 정통적인 윤리도덕에 어긋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기한 역량을 동원하여 그가 병사를 일으킨 것이 "정명(正名)"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명나라때 고대(高岱)의 <<홍유록(鴻猷錄)>>에 의하면, 제를 지낼 때의 광경이 나타나 있다. 주체가 선언서를 읽은 후, 돌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어두운 안개가 흩어지지 않았으며, 검은 구름이 뭉클거렸으며, 번개가 쳤다. 수분후 검은 구름은 점차 흩어졌는데, 곳곳에는 검은 색의 깃발이 나타났고, 위에는 귀사(龜蛇, 거북과 뱀)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지의 <<속장서>>, <<명서>>에도 기재되어 있다.

 

부유린(傅維麟, 1646년진사)의 <<명서, 요광효전>>에 의하면 "영락제가 병사를 일으킬 시기에 대하여 묻자, 요광효는 말하였다: 아직 아닙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와야 합니다. 태종이 말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가? 요광효가 말하였다: 우리 군대입니다. 그리고 수일이 지난 후 들어와서 말하기를 : 됐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병, 사귀등을 연회에 불러서 매복을 두고 모두 참해버렸다. 장옥, 주능륵의 위사를 보내어 구문을 공격하게 하였다. 제를 지냈는데, 깃발이 하늘을 가렸다. 영락제다 돌아보고 말하기를 '무슨 신인가'라고 하였다. 요광효는 '말씀드린 우리 병사입니다. 현무신(玄武神)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실록>>에도 유사한 기재가 있다: '당시 바람이 불며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사람들은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조금 지나 동방의 구름이 열리면서 푸른 하늘이 나타났는데, 한장여였는데, 촛불처럼 비추는데 상하를 뚫었다.  장사들은 모두 기뻐하며 하늘의 뜻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제에 참여한 병사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나중에 전투과정에서 모두 무당산의 현천상제진무신이 자기들을 보우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백구하(白溝河)전투에서 겨울에 백구하에는 단단한 얼음이 얼어 있었는데, 주체의 군대가 막 얼음위를 도망쳐 지나간 후, 건문제의 추격병이 도착했는데, 얼음이 녹기 시작해서, 추격병은 전부 물속에 가라앉았다. 협하(夾河)전투에서는 쌍방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거의 반나절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서북쪽에서 돌연 검은 구름이 밀려오고 모래와 돌이 흩날렸으며, 뭉쳐진 모래폭풍이 건문제의 군대로 향했다. 영락제의 군대는 이 기회를 틈타 진격했는데, 이것도 진무신이 보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주체는 북경의 진무묘비(眞武廟碑), 무당산의 옥허궁, 정락궁, 자소궁, 남암궁등의 모든 비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언급했다.

 

도교와 민간전설에 따르면 원말명초의 진무(眞武)는 북방(北方)의 신이면서 전신(戰神), 수신(水神), 사명(司命)의 신이다. 중국고대에는 자주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북방은 중국의 정권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북방현제에 제사지내는 것은 사기를 고무시킬 뿐아니라 민심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북방에서 일어난 원나라, 청나라도 북방현제를 보호신으로 제사지냈다. 바로 이러한 특색으로 인하여 북방에서 난을 일으킨 연왕 주체와 모사 요광효는 이 점에 착안했다. 그리하여 건문원년 연왕이 병사를 일으킬 때 "현제현령(玄帝顯靈)"을 만들고, 정난지역의 과정에서도 그들은 계속하여 진무가 보우하는 신화를 선전하고 만들었다. 정난지역의 전투에서 발생한 모든 우연적인 현상이나 취득한 모든 승리를 현무신의 보호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주체가 반복하여 신하와 백성들에게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즉 그가 정난지역에서 승리한 것은 도교 현천상제진무신의 보우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신의 위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정난지역에 대하여 왕권신수의 신성한 색채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당산의 도교궁관을 건축한 것은 현무신이 영락제를 도와 준 것을 건축이라는 형식으로 확정시키는 의미가 있고, 이로서 천추만대에 걸쳐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주체가 진무신을 신봉한 것은 부친인 주원장과 가정의 영향이 컸다. <<고금도서집성>>의 기록에 의하면, 주원장은 젊을 때, 추격병을 피하기 위하여 무당산에서 현천상제를 모시는 "초전(草殿)"을 불태운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현천상제가 꿈에 나타나서 물었다. 주원장은 나중에 천하가 태평해지면, 금전(金殿)으로 배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주원장의 가정과 도교의 관계에 대하여는 민간에 이런 전설도 전해진다. 주원장의 조부가 길에서 '도사가 보니 묘지의 풍수가 진명천자(眞命天子)가 나타날 곳이다'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아마 주원장이 그가 진명천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면서, 도사가 풍수를 보았다는 전설을 통해서 황권신수(皇權神授)를 얘기한 것이고 할 것이다. 주원장의 조부, 부친이 도교를 신봉했을 뿐아니라, 그의 모친과 외할아버지도 도교를 아주 신봉했다. 주원장은 1361년경, 대군을 이끌고 구강(九江)을 공격하며, 당시 세력이 대단히 컸던 진우량(陳友諒)을 공격하였다. 이번 진공때 까마귀와 귀사가 나타나서 사기를 고무시켰다. 주원장은 이것을 교묘하게 해석하여 현천상제의 오아신병(烏鴉神兵), 귀사이장(龜蛇二將)이며, 현천상제가 우리를 보우해주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병사들은 사기가 올랐고, 결국 파양호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영락제가 천하를 얻은 후, 많은 반대자를 만나게 된다. 이 상황하에서 영락제는 제태, 황자징등 1만여명을 죽이고 심지어 방효유의 십족을 멸하는 참극까지 벌이게 된다. 주체도 사람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드시 백성들이 그가 황위를 취득한 것은 바로 하늘이 내려준 결과라는 것을 믿게 하도록 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가 황제위에 오른 후 처음으로 한 것은 바로 진무신에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무당산의 현천상제가 그를 보호했다는 신화는 결국 그와 진무신간의 특수관계를 과시하고자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민감한 무당도사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무당산의 도교궁관을 부흥시킬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영락제를 도와 여러가지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 냈다. 영락3년(1405년), 영락4년(1406년) 무당산의 랑매(榔梅)가 열매를 맺었는데, 오룡도사 이소희는 두번이나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올린다. 영락제도 후하게 상을 내린다. 랑매가 열매를 맺은 것은 길조이고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여, 자기가 만든 비석에서 이것은 진무신이 그의 즉위를 찬양하는 뜻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영락10년이 되어, 영락제는 정식으로 무당산에 건축을 시작한다.

 

영락제가 무당산에 건축물을 지은 원인은 그가 정난지역을 일으키고,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연왕은 번왕의 신분에서 대통을 이었으니, 자기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하여 합법적인 이론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계획적으로 진무신이 정난지역을 도와주었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무당산에 건축물을 짓는 것도 이를 고정화시키는 의미가 있다. 명나라역사전문가들은 영락제가 무당산에 궁관을 지은 것은 정난지역때 진무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영락제 본인도 이를 직접 언급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민간에 영향력이 컸던 장삼풍도 무당진무신을 모셨고, 또한 무당산에 "이 산은 나중에 반드시 크게 흥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는 것이므로, 이것도 영락제가 무당산에 궁관을 크게 짓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락제는 현천상제를 명나라의 가신(家神)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현천상제의 궁관을 황실의 가묘(家廟)로 삼았다. 실제로 그의 목적은 황위합법화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당산의 도교궁관이 황실가묘로 바뀌게 된 원인이다.

 

무당산은 과거 봉건제왕이 정권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종교적인 도구로 활용되었었다. 명나라의 가정황제는 "치세현악(治世玄岳)"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 글자는 지금도 현악문액방에 새겨져 있다.